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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픈 희망"에 대하여(존 버거)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면 망자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저 전통적이고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행위였죠. 그러던 것이,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면 전부 '퇴물' 취급을 하는 세계 경제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여러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냘픈 희망이지요. 하지만 살찐 희망은 헛소리입니다. 그러니 이 가느다란 희망을 간직해 나갑시다...

view_/책_ 2015.04.20

애도와 멜랑꼴리의 경계선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책(출판저널, 2015년 4월호)

2015년 4월호 이 달의 책 편집자 서평 애도와 멜랑꼴리의 경계선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책 오늘, 우리는 우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산다. 우리는 우울을 먹고 마시며, 애도가 일상이 된 나날들을 산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2014)의 여주인공 산드라도 우울을 앓는다. 우울증으로 병가를 낸 사이, 회사는 직원들의 투표를 거쳐 그녀의 해고를 결정한다. 직원들은 그녀 대신 보너스 1000유로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그녀는 사장을 찾아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청한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재투표를 앞두고 1박2일 간 산드라는 동료를 찾아 집을 나선다(그래서 이 영화의 원제는 “Two Days One Night”이다). 산드라도, 동료들도 고달프다. 신자유주의 사회와 만성화된 경제 위기는..

기고_/etc_ 2015.04.16

예지의 첫 번째 이메일

아홉 살 예지가 아빠에게 메일을 썼다.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주었는데, 제대로 된 첫 번째 메일을 아빠에게 보낸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을 거의 금지하고 있는 까닭에, 다른 아이들보다 한참 느리다. 여섯 줄 메일을 쓰는데 더듬더듬 독수리 타법으로 거의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느린 걸음에 더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누리고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를 갈지 물으며 "두근두근 아빠의 선택은?"하고 덧붙이는 센스도 감동이고, 집안의 권력 서열을 제대로 숙지하고 '모르면 엄마한테 물어보고 알려 달라'는 그 눈치도 감동이고, "아빠 사랑해!"로 맺는 그 마음도 감동이다. 이제, 답장을 써야겠다. 고맙다, 딸.

霓至園_/rainbow_ 2015.04.07

Y에게

Y에게, 무의식은 내 안에 깃든 타자의 흔적이고 타자를 향한 사랑을(또는 그 사랑이 유실된 흔적을) 탐구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본령이라면, 가장 치열했던 사랑의 슬픔이 오히려 가장 무심하고도 심상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우리의 삶이 아닐까 생각하는 시간이었지, 내게는. 그리고, 그렇다면, 과연 무의식을 탐사하여 그것에 닿는 것은 가능할까, 다시 말해, 타자에게, 그 열렬한 사랑에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닿을 수 있을까 묻고 의심하는 시간이었지. 확신이나 불신의 확정적 단정이 아니라는 점에서 만족해. 밤새 비바람이 창을 때리고 창밖에 번개에 번쩍했는데,예지가 무서워서 잠을 못자더라. 그래서 옆에 누워 소리와 빛의 간극을 헤아리기 시작했어. 번개가 치고, 하나, 둘, 셋...일곱, 우르르쾅쾅. 번개가 치고, 하나,..

窓_ 2015.04.03

여백과 구도

고독했던 시절 필름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필름카메라이어서 찰나를 허비하지 않는 지혜를 배웠을 것이다. 근원과 현상에 대한 의문과 갈망으로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 있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다음에야 구도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백이야말로 피사체를 돋보이게 한다는 것, 미처 의식하지 않는 환희의(혹은 슬픔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진을 찍어주신 분께 감사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霓至園_/rainbow_ 2015.03.27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숱한 연민을 까만 눈동자로 앓는 사람입니다. 섣부른 말로 단정 짓지 않으며 가만히 타자의 슬픔을, 때론 무심한 척하는 얼굴의 미세한 요동을 응시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다가설 용기는 없지만, 굳센 사랑에는 무모한 결행을 감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참해질 때도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헤어짐의 윤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관계에 대한 경우의 수를 셈하는 이와는 우정을 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정을 맺은 벗에게는 경우의 수를 헤아려 그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우연'을 '섭리'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테레자'처럼 책을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밀란 쿤데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지만, 끝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건짓고 이유를 동반한다..

視線_ 2015.03.15

행방불명으로 인해 시작된 순례와 모험의 서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 The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 2001 오늘의 예지원 상영작, . 미야자키 하야오의 2001년 작품. 유바바는 타자의 이름을 빼앗아 그들을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이자 시스템이라면그 반대편의 소박하고 진실된 삶의 자리엔 유바바의 도플갱어인 제니바가 있다. 유바바의 아들인 비대한 아기는 탐욕과 욕망의 유비로서 적당하다. 하쿠는 유바바의 하수이면서도 치히로를 연민하는 자기모순적 존재다. 그렇다면 치히로는 하쿠와 연대하되 오히려 그를 아우르는 순정의 소녀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끝내 잊지 않고 지켜 내는 순례이자, 돼지로 몰락한 부모를 구해 내는 모험 이야기가 이다. 나를 사로잡았듯이 예지와 예지의 친구들에게도 그..

view_/영화_ 2015.03.12

시대의 우울에 맞선 간절한 응원과 연대

시대의 우울에 맞선 간절한 응원과 연대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 2014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출연 마리옹 꼬띠아르, 파브리지오 롱기온 동료를 선택하면 1000유로의 보너스를 잃는다. 그 동료는 휴직 중이며 우울증을 앓고 있다. 동료의 복직을 앞두고 사장은 그들에게 묻는다. 동료를 해고하는 데 동의하면 보너스를 주겠지만 동료가 복직하면 보너스는 없다. 작업반장의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는 정황으로 인해, 14:2란 압도적인 수치로 보너스를 선택했던 첫 번째 투표는 무효가 되고 재투표가 성사된다. 그녀가 복직하는 월요일 아침의 비밀투표를 앞두고 이제 그녀가 동료들 설득하기 위한 1박2일(Two Days One Night)의 여정이 시작된다. "멜랑꼴리 환자는 상실감으로..

view_/영화_ 2015.02.03

린다 매카트니 사진전,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의 기록

린다 매카트니 사진전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의 기록, 대림미술관, 2015.1.24 지난 토요일에 다녀왔어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왔다는 이유로 먼저 들여보내 주더군요.^^ 매카트니 가족들의 일상, 비틀즈 멤버들을 비롯해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등 여러 아티스트 사진들, 린다의 사회 참여적 사진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비틀즈를 좋아하는 제겐 대부분 익숙한 사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감흥은 새로웠어요. 린다의 사진 속에서 폴은 가장 행복한 모습이더군요. 다녀와서 비틀즈의 여러 책들을 꺼내 놓고 다시 봤네요. 예지는 재밌었다고, 예서는 심심했다고 해요.ㅋ

view_/etc_ 2015.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