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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화톳불 같은 책

김재수 선생님께, 처음 편지를 드린 것은 작년 11월, 첫겨울 무렵이었습니다. “경제학은 밥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라는 고故 정운영 선생님의 문장을 인용하였지요. ‘밥’은 세상사의 고달픔, ‘사람’은 그 고달픔을 살아내는 이들의 은유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사람은 결코 홀로 규정될 수 없으며, 결국 우정과 사랑, 고독과 연대 사이에서 그 본질을 규명해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무릇 경제학도 그 맥락에서 당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흘러 다니는 무수한 말들 속에서, 선생님의 글을 견고한 텍스트로 오래 간직해야겠다는 다짐도 거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출간 제안을 드린 다음 날, 선생님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첫눈이 내..

view_/책_ 2016.10.25

책 읽는 공동체를 위한 서론(선교한국, 160805)

2016년 선교한국 대회에서 책 읽는 공동체에 대해 강의하였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있었던 강의로, (아마도) '헌신의 밤'(목요일 저녁 집회) 이후의 다음 스텝을 위한 일련의 강의 중 하나로 기획되었던 것 같습니다...만,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네요(선교한국에서 제게 요청한 강의는 '공동체에서의 선교도서 읽기'였어요.ㅜㅜ). '헌신의 밤'이 아니라 '내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해, 복음에 대한 강고한 확신이 아니라 회의와 질문에 대한 숙고에 대해서 말이죠. 무릇 독서란 그런 것이니까요. 아무튼. 강의안을 공유합니다. 이전에 했던 독서 강의안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강의안 뒷부분의 추천 도서목록은 페이스북의 여러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특히 강은수 목사님, 감사합니다!).

view_/문서운동_ 2016.08.23

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다운, 유혹으로의 초대

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다운, 유혹으로의 초대 《유혹의 학교》(이서희 지음┃한겨레출판 펴냄┃2016년 5월) 손쉬운 사랑은 없다. 다른 존재를 향한 열망이 발화되는 것은 순간이나 그 존재에 닿을 때까지는 고독의 시간을 앓아야 한다(고독이 소중하다면 그것은 존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은 견고하므로, 더욱이 다른 존재라면, 내 고독의 보상을 그에게 쉬이 기대할 수 없다. 천운이 도래하여 열망하던 존재와 연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지금부터의 시간들로 치열하게 증명되어야 하니까. 세상에 손쉬운 사랑은 없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랑도 없다.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떤 큰 물살로도 그대의 사랑을 끄거나..

《L의 운동화》 독자와의 만남 후기

《L의 운동화》(김숨 지음, 민음사 펴냄) 독자와의 만남 후기(6월 22일, 이한열 기념관) ‘달콤한 작업실’ 최예선 작가의 진행, 이한열 운동화를 복원한 김겸 박사의 강의, 그리고 《L의 운동화》를 쓴 김숨 작가와 김겸 박사와의 대화로 이어졌다. 다음은 정확한 인용은 아니고 '내 맘대로’ 대충 요약한 것(그러므로 어떤 부분은 나의 비약이거나 바람일지도). 1. 이야기는 복원되기도 하고 새롭게 탄생하기도 한다. 거듭남의 동력은 당신에게 있다. 무릇 역사는 그렇게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당신을 통해 미래로 흐른다. 2. 김겸 박사는 보존/복원의 과정과 가치에 대해 강조했다. 무엇을 보존/복원하는가? 오늘날 재화적 가치가 유일의 가치로 측량되지만, 보존/복원의 지향은 그 너머를 향한다. 그것은 망각으로부터..

view_/책_ 2016.06.30

해명되지 않는 울음의 이유를 묻는 대신

어스름한 저녁 빗줄기에 우울이 내려앉을 때, 섬세하지 못한 언어가 육체의 피곤을 핑계로 당신의 마음을 할퀼 때, 누군가 무심히 던졌던 말이 가슴의 체증으로 박힐 때, 미처 처리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루지 못한 일들로 얽힌 불면의 한밤을 서성일 때… 우리는 사소한 것에 마음이 무너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오랫동안 피로와 통증, 오해와 억울함, 포기와 좌절, 상처와 슬픔이 퇴적되고 적루된 삶의 울음과도 같을 것이다. 늘 괜찮다고 말했던 남자도, 꿋꿋하게 버티던 여자도, 투명에 가까운 마음을 가졌을 것 같던 열 살 아이라고 할지라도, 문득 작고 소소한 일상의 균열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당혹스럽다. 그런 울음을 마주할 때, 차마 울지 못해 더욱 견고한..

窓_ 2016.04.21

세월호 2주기

안부를 물었다. "잇달아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로 과거와 현재는 연결된다"는 체호프의 문장으로 위로하며, 그 문장 앞에서 울었던 소설 속 '한 어미와 딸'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었다. 그러나 위로받은 건 이번에도 나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안부를 물었다. 2년째 오늘은 4월 16일이다. _광화문 세월호 분향소에서 세월호 분향소 1주기, 2주기에 접은 종이배. 우리 집 거실.

窓_ 2016.04.16

인문정신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 (아름다운 서재, 2016)

※《아름다운 서재》(2016) '인문, 공부와 글쓰기' 기획자 편에 실은 글입니다. 인문정신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인문 공부와 삶을 다룬 책의 흐름에 대해 김진형_생각의힘 편집장십수 년째 책을 만들고 있다. 가끔 책이 벽돌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행동하는 삶(vita active)과 성찰하는 삶(vita contemplative)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사유의 책을 소망하며 산다. 도대체 인문학이라니 원고 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책은 《하버드 학생들은 더 이상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다》(사회평론, 2015)였다. “21세기에 인문학만 공부해서는 답이 없다” “우리나라만 문제인 줄 알았더니 하버드까지? 충격적이다” 등 온라인서점에 달린 몇몇 독자 단평에는, 인문학으론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

view_/책_ 2016.03.30

《처럼》《필리버스터》

★페이스북에서 소개한 두 권의 책. 2016년 3월 22일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김응교 지음, 문학동네, 2016) 모름지기 시인의 책이라면 이러해야 한다. 이 말은 윤동주 시인의 책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책의 당위이기도 하고, 김응교 시인만이 쓸 수 있는(써야 하는) 책의 소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당위를 수렴하는 소명의 결과다. 간혹 책의 갈피 속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곡진한 숨결은 그 때문일 것이다. 소명의 숨결이다. 이 책은 작가론, 혹은 평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view_/책_ 2016.03.30

그의 몰락 그의 책

그의 몰락 그의 책 1. 함께 책을 만들었던 저자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은 몹시 아프고 슬픈 일이다. 과연 나를 사로잡았던 그의 견고한 사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오래 간직해야 할 텍스트이므로 마땅히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하거나 설득당했던 그 순간의 희열은 다 무엇이었을까. 저자의 추문이 들려오던 즈음 나는 극심한 우울을 앓았고 간혹 고독과 회의에 빠졌다. 지난 며칠 그의 책을 다시 읽었다. 잔뜩 벼린 논리는 서늘했고 깊고 둔중한 사유는 뜨거웠다. 그리고 그의 책을 원래 있던 서가에 고이 꽂아두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 읽을 것이다. 추문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의 책은 어찌해야 하는가. 답을 찾았다. 정답이 아니라 결심에 가깝다. 그 책을 만든 출판사에 계속 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지켜내자고..

view_/책_ 2016.03.18

여성의 날, 예지에게

예지야, 오늘은 여성의 날이란다. 1908년 미국 뉴욕의 루트커스 광장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모였단다. 일하다가 화재로 죽은 여성들이 있었거든. 광장에 모인 여성들은 동료들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왜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이 일하면서도 더 좋지 못한 환경에서, 더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거란다. 광장에 모인 여성들이 요구한 건 두 가지야. 선거권을 달라는 것과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그래, 그때만 해도 여성들이 선거를 할 수가 없었어. 그러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여성들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지. 아빠처럼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노동자라고 해.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결성한 조직을 말한단다. 당연한 것을 요구하..

霓至園_/rainbow_ 201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