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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패배하지 않는다

2015년 10월 1일, 저자들에게 쓴 편지 + 책을 만드는 ‘업業’을 ‘명命’으로 받들던 시절이 있었어요. 책을 만드는 것이나 소개하는 것에 필사적이던 시절, 그러나 언제부턴가 '책이 과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란 회의에 직면하였고,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책이란 ‘명’이 하나의 ‘업’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일종의 비약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밥벌이로 전락한 책은, 그제서야 유의미한 물질의 가치로 발화한다는 것. 하나의 책에 그로 인해 희생당한 나무들의 생명값을 정확히 계산하여 묻게 되고, 하나의 책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의 삶에 대한 재화의 근원으로서 합당한지를 고민하게 하고, 하나의 책이 굳센 확신이 아니라 숱한 회의懷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위한 불경한 책

■〈CMR〉(기독경영연구원) 201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위한 불경한 책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사울 알린스키 지음|정인경 옮김|생각의힘 펴냄|2016 미국의 지난 대선 정국에서 샌더스 열풍이 거세게 불었을 때,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배회하고 있다. 사울 알린스키라는 유령이.” 이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의 오마주다. 2015~2016년 미국 정치 혁명의 주역으로 부상했던 버니 샌더스는 무명의 아웃사이더였다. 샌더스는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면서 부의 불평등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고 ‘1퍼센트에 맞서는 99퍼센트’의 싸움을 이끌었다. ..

기고_/etc_ 2017.01.04

2016년 나의 책 나의 저자

2016년 나의 책 나의 저자 올해의 책은 없다. 다만 나의 책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때 책에 대한 광신도였다. 책으로 회심했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었으며 책의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책의 사람들은 곧잘 책을 배반하였다. 좌절은 타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절망은 내게서 귀결되었다. 책에 대한 신앙으로 시작한 밥벌이였으나 이제는 밥벌이를 위해 책을 만든다. 좋은 책을 놓고 필사적으로 토론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좋았던 책을 가만히 듣고 나에게 좋았던 책을 조근조근 말할 뿐이다. 설득은 그 책의 몫이다. 그가 그 책의 텍스트로 들어갈 때에야 그 책이 그의 삶으로 틈입할 것이다. 다만 나는 나의 소중한 책을 성실하게 기록하..

view_/책_ 2016.12.28

내가 추천한 '〈CTK〉 올해의 책'

이번에도 〈CTK〉 올해의 책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CT(Christianity Today)〉는 1956년 빌리 그레이엄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이래 현재 250만의 독자들이 구독하고 있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대표적 매체이다. 〈CTK(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는 〈CT〉로부터 독점 제공받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2008년부터 한국에서 발행하고 있다. 내게도 20대 언저리에 〈CT〉를 꽤나 열심히 읽던 시절이 있었다. 〈CTK〉 올해의 책 선정절차는 다음의 절차를 밟았다. 선정위원들은 편집부로부터 각 부문별 1차 후보 목록을 받은 후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간혹 편집부의 후보 외의 도서가 추천되기도 한다. 선정위원들의 의견을 대체로 반영하지만, 최종 선정은 편집부가 결정하는 듯하다...

기고_/CTK_ 2016.12.25

예지에게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고백하다

★ 2016년 크리스마스에는 열 살 예지에게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고백하기로 했다. 다음은 산타클로스, 혹은 엄마와 아빠가 쓴 편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하는 예지에게, 이 편지는 꼭 혼자서만 읽어야 한다.특히 동생에겐 비밀로 하거라. 예서는 열 살이 되어야만이 편지를 이해할 수 있단다. 그러니 그 비밀을 지켜주는 건예지와 나의 약속이다. 자, 지금부터 방에 들어가이 편지를 읽으렴. 산타클로스. ...................................................................... 사랑하는 첫째 예지에게 우리가 함께 읽었던 책 《사자와 마녀의 옷장》을 기억하니? 우린 지난여름 이 ..

霓至園_/rainbow_ 2016.12.24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빛과소금〉 2016년 1월호 '미안해, 하지 못한 말'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열다섯, 혹은 스물아홉 현지에게 내가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스물아홉 신학대학원생이었고, 너는 열다섯 중학생이었다. 나는 청년부와 중등부 담당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고, 너는 나의 제자였다. 교회 청년들과 보냈던 광장의 기억들이 아직도 선연하다. 뜨겁던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 펼쳐졌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였고, 찬바람이 불어오던 가을 끝 무렵에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효순, 미선이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을 들면서, 나는 너희들을 생각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미군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압사당하며 참혹하게 죽었다. 미군은 아이들의 확실..

숨은 편집자를 찾아서_인터뷰

'어쩌다 1인 출판'은 나무연필, 메멘토, 봄날의책, 오월의봄, 유유 출판사가 함께 운영하는 블로그입니다. '숨은 편집자를 찾아서'라는 코너가 있는데 , 감사하게도 조성웅 유유 대표님과 인터뷰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2016년 8월 10일 http://blog.naver.com/onepress5/220783559712 숨은 편집자를 찾아서 지금 한국에서 책을 만드는 사람, 편집자라는 일은 그다지 환영받는 직업이 못 됩니다.게다가 편집자는 음지에 숨어 일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강합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판권 면에 이름이 적히고는 남몰래 뿌듯해하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편집자가 없으면 이 세계에 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이 존재하게 하는 데 있어 신과 같은 존재..

view_/etc_ 2016.10.31

어이 없는, 추천사

좋은 책이다. 그래서 언젠가 서평을 써서 기고한 적이 있다. 이 책을 고르고 글을 쓴 건 내 의지였을 것이다. 오늘 우연히 이 책을 살피다가 뒤표지에 내 서평의 일부가 추천사로 들어가 있는 것을 봤다. 그 출판사는 내게 그것을 인용하겠다고 요청하지 않았고, 난 그것을 허락한 적도 없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 책(초판)의 뒤표지엔, 당연히 내 추천사는 없다. 나도 편집자이지만, 어찌 이런 경우가. 좀 어이가 없다.

view_/책_ 2016.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