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소금〉 2016년 1월호 '미안해, 하지 못한 말'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열다섯, 혹은 스물아홉 현지에게
내가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스물아홉 신학대학원생이었고, 너는 열다섯 중학생이었다. 나는 청년부와 중등부 담당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고, 너는 나의 제자였다. 교회 청년들과 보냈던 광장의 기억들이 아직도 선연하다. 뜨겁던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 펼쳐졌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였고, 찬바람이 불어오던 가을 끝 무렵에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효순, 미선이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을 들면서, 나는 너희들을 생각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미군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압사당하며 참혹하게 죽었다. 미군은 아이들의 확실한 죽음을 위해, 후진하여 다시 압살의 절차를 밟았다. 너희들의 친구였으니 나의 아이들이기도 했다. 내 평생 처음 경험한 촛불이었고 분노였고 눈물이었다.
토요일엔 광장을 나가고 일요일엔 너희를 만나던 11월의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당회실로 가보니 장로님들이 배석하고 있었고, 잠시의 무거운 침묵 끝에 목사님이 말씀하기 시작했다. “자네, 토요일에 시위를 하러 나간다지. 그것도 청년들을 데리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금요일 저녁 기도회를 취소하고 예배당을 개방하여 대형스크린으로 경기를 관람하던 교회였다. 그런데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이들을 위한 추모의 촛불은 기껏 불온한 시위 정도로 취급받던 그 자리에서, 나는 더 이상 이 교회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무력하고 참담한 시간들이었다.
그다음 일요일 아침, 너희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이별을 각오했다. 사직서를 내던 자리에서 담임목사님은 몇 가지를 당부했다. 촛불집회에 나가지 말라고 당회에서 경고했던 것과 그와 관련된 사직의 이유는 비밀로 할 것. 사임하는 날까지 사임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 것. 사임한 다음 날부터 중등부와 청년부와의 그 어떤 이들과도 연락을 끊을 것. 당시 담임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후임 목사와 퇴임 후 예우 문제로 상당히 예민할 때였고, 그래서 더 신속하게 나의 문제를 처리했을 것이다.
마지막 예배를 드리던 날, 너희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맨 앞자리에서 나를 한껏 노려보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던 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너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며칠 뒤 도착한 편지도 애써 외면했다. 서른이 되던 그 겨울, 나는 몹시 아팠다. 대학원을 휴학하였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열다섯의 너는 제일 먼저 교회에 왔다가 제일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였다. 덕분에 우리는 자주 떡볶이를 사먹었고, 집까지 데려다주며 우린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너는, 노래하던 내가 종종 박자를 놓치면 킥킥 웃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너를 힐끗 쳐다보았고 너는 ‘메롱’ 하며 웃었다. 예배를 마치고 눈을 떠보면, 간혹 강대상 위에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너의 짓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았다.
너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기억한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눌러 쓴 편지지엔 너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지금까지도 그 편지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이별하던 그해 겨울, 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그리고 오늘처럼 이렇게 자책하고는 한다. 나는 전도사 자리를 던질 오기는 있었지만, 너희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무도한 어른의 부당한 당부를 지키기 위해 너희들과의 우정을 저버렸다. 정의를 외치지만, 결국 도망치듯 떠난 비겁한 사람이었다.
너희들과 헤어지던 그 계절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광장에 나간다. 2002년의 광장을 기억한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아직까지도 이루어내지 못한 우리의 정의를 슬퍼한다. 그들의 친구였던 너희들을 기억한다. 너는 이제 스물아홉의 청년이며, 곧 그때의 나처럼 서른이 될 것이다. 지금의 너는, 그때의 나처럼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날 수도 있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용서를 빌고 싶다. 그리고 함께 촛불을 들고 싶다. 오래도록 너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현지였다.
김진형|IVP에서 기획과 편집, 마케팅, 문서학교와 '청년도록' 발간 등의 문서 사역을 담당했고, 책담 인문교양팀장을 거쳐, 현재는 생각의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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