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빛과소금_

"하루는 귀한 일생입니다" (빛과소금, 130605)

Soli_ 2013. 6. 30. 02:05

★<빛과소금>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지’는 지금 일곱 살인 저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훗날 ‘청년 예지’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영성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정, 사랑, 상처, 교회, 공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하루는 귀한 일생입니다"


스무 살 예지에게,

몇 해 전, 아내에게 장미선인장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조금씩 시들더니 목숨을 다했지요. 아니, 그렇게 보였어요. 그런데 올해 봄이 시작하던 즈음, 아내가 베란다 창틀에서 새끼손가락 손톱 만한 장미선인장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장미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던 자리, 어미에게서 떨궈진 생명이었을 것입니다. 일 년 넘게, 겨우내 겨울바람에 맞서 살아난 생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조그마한 유리 찻잔에 거처를 마련하여 계란 껍질로 집을 만들어 옮겨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초록빛깔은 더욱 성숙해졌고 키도 조금 더 자랐습니다. 보잘것없는 생명이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시위하는 장인선인장에게 배웠지요.

시인 메리 올리버는 <완벽한 날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우리가 미처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견고한 질서를 세우고 수행하며 존재하는 생명들은 그 자체로 경탄의 대상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촉촉하고 풍성한 세상이 아침마다 우리에게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시인은 새, 물고기, 호수, 꽃, 나무 등을 관조하며 숲에서,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삶의 본질을 직관합니다. 찬란한 세계, 그 너른 품에서 살아가는 충만한 존재들과 조응하는 우리 삶의 방식은, 마땅히 그것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의 본질은, 무엇을 성취하고 도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존재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완벽함이란 없는 것이죠. 우리는 그 자체로 돌올하고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삶의 본질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시인처럼 묻지도, 답하지도 않습니다. 우주는 충만한 존재 그 자체를 뽐내지만, 우리는 그저 성공을 위해 분투합니다. 성공해야만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존재하나 생존하기 위해 바둥대는 그 모순은 결국 비루함에 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생을 허비합니다.

어렸을 적, 누구나 꿈꾸던 ‘되고 싶은 나’가 있습니다. 대부분 어떤 직업의 형태로 표상하기 때문에, 그것은 엄밀히 말해 ‘갖고 싶은 나의 자리’입니다. 어찌 되었건 그 꿈은 나의 삶을 긍정적으로 견인하는 가치 있는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욕망이 좌절한 직후, 혹은 그것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부터입니다. 도달하고픈 나의 자리와 지금 나의 자리, 꿈과 현실의 간극, 그 괴리감은 좌절과 패배의 정서를 야기하며, 우울과 무기력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 꿈을 성취했음에도 자신의 인생이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숱한 선택의 갈림길에 처합니다. 기호나 취향에 따른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대학과 취업, 사랑과 결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을 요청합니다. 어느 대학의 무슨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사랑을 나눌 것인지… 우린 선택의 기로에서,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망설이고 고민합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리고 훗날, 감사하거나 회한합니다. 어떤 이들은 선택의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확신했지만, 그들의 길은 실패하거나 옳지 않았던 경우도 간혹 목격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어떤 길을 선택할지를 묻지 말고, 어떤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 위에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길과 악한 길이 뚜렷이 대비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대체로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묻는 것이 아니라 각오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된 우리의 내밀한 욕망을 폭로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고자 욕망합니다. 하지만 다른 존재는 애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부모, 친구,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나’는 여러 양태로 존재합니다. 모든 양태가 ‘나’의 존재입니다. 역할은 평가를 수반하는 까닭에, 존재의 가치까지 가늠하려 하지만 그것을 허용해선 안 됩니다. 자본주의적 사회 시스템은 직업의 우열과 귀천을 가늠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것과 결연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가치는 직업의 서열 따위로 가늠될 수 없습니다. 삶의 방식은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되,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들에 핀 백합화’가 그 자체로 충만한 생명이듯, 우리의 존엄도 그러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오랜 지병처럼 앓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득, 비탈진 산 중턱을 이겨내고 가쁜 숨을 움겨잡고 올랐던 정상에서, 정복자의 포만이 아닌 이유와 근원을 알 수 없는 허탈함에 몹시 난처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움은 결핍에서 비롯되어 갈망을 향해 치닫습니다. 기어코 다다른 산 장상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갈망의 오마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얻고자, 혹은 무언가에 닿고자 서둘러 떠나 숨가쁜 걸음 끝에 도착했지만 정작 허망할 때가 있습니다. 얻지 못해서, 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얻어도, 닿아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의 갈망 때문입니다. 어떤 갈망, 어떤 그리움일까요? 


작가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여행할 권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여행하는 이유도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에서 갖가지 삶의 모양새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깨닫습니다. 국적도, 피부색도, 언어도, 습관과 개성도 다른 그들이지만, 그들에게 서려있는 ‘여느 보편적 존재들의 솔직한 갈망’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무리 멀리 가도 세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리움은 본향을 향한 것입니다. 태곳적 나의 존재가 발현되었던 그곳, 잠시 망각하고 있으나 언젠가 도달할 그 기쁨의 나라. 분투하며 살지만 결국 위태로운 현실에 처한 우리의 존재도, 언젠가 그곳에 이르러 충만할 수 있으리라 갈망합니다. 디아스포라적 감성은, 우리로 하여금 방종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웅숭깊은 하나님의 배려일 것입니다.

저는 요즘 되도록 천천히 걷습니다. 느릿느릿, 숨을 고르며 걷는 길에 수많은 풍경이 가슴에 담깁니다. 사람들의 웃는 모습도 수백 개입니다. 목소리는 수천 개입니다. 골목길 모퉁이 조그만 채소가게 아저씨의 표정도 날마다, 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아이는 날마다 조금씩 자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만큼, 딱 그만큼만 나의 세계가 됩니다. 가슴에 남은 풍경만 추억이 됩니다. 수백 개의 표정과 수천 개의 목소리로 목소리로 기억하는 이들만 나의 사람이 됩니다. 때로 우리 인생엔 느린 걸음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종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곳도, 더디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을 통해 계시됩니다. '온 우주로도 하나님의 존재 어느 한 자락이라도 가둘 수 없지만, 길가 한 모퉁이에 피어있는 작은 들꽃 하나에도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하나님 나라의 즐거운 향연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 너머 우리가 살아내야 할 가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하루는 귀한 일생이다”라고 썼습니다. 인생의 성패는 하루의 삶을 제대로 살았는가로 결정되고, 하루의 성패는 아침의 마음가짐으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나의 생명보다 귀한 딸, 그대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이 아포리즘을 가슴에 새겼으면 합니다. 하루하루를 귀한 일생으로 살되, 존재의 존엄을 견고히 지키고 가슴속 그리움을 곱씹어 그 근원을 쫓길 바랍니다.

부디, 행복한 청춘으로 뜨겁고 깊고 충만하길, 지금부터 기도하겠습니다.

그대의 아빠, 진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