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빛과소금_

그대, 희망의 길벗이 되십시오 (빛과소금, 130707)

Soli_ 2013. 7. 7. 02:51

★<빛과소금>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지’는 지금 일곱 살인 저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훗날 ‘청년 예지’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영성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그대, 희망의 길벗이 되십시오



스무 살 예지에게,

 

오직 가진 것이라곤 상상력뿐인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기 전부터 이미 고아였던 아이, 부모를 잃은 상실의 아픔을 타고난 아이, 너무 어린 나이에 삶의 고독과 고단함을 알아버린 아이… 그 때문이었을까요? 아이는, 스쳐 지나는 보잘것없는 사물과 풍경 하나하나에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을 덧붙여 온갖 희망을 재잘거립니다. 그 재잘거림에 어떤 사람들은 좀 모자란 아이로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어른은 고아라서 그런다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고아인 그 아이는, 못생기고 주근깨 투성인 데다가 머리마저 사나워 보이는 빨간색입니다. 이쯤 되면, 아빠가 누구 얘기를 하시는지 아시겠죠? 바로 그대가 태어나던 해에 애니메이션 DVD 전질을 구입하고, 한글을 익히기 전에 선물한 루시 M. 몽고메리의 원작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입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에이번리에 살던 독신 남매 매튜와 마릴라는 농장 일을 도울 사내 아이가 필요했지요. 하지만 착오로 앤 셜리라는 여자아이가 오고, 마릴라는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아이를 키울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앤이 살게 된 초록지붕 집은, 그 아이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앤은 사과나무 가로수 길에게 ‘기쁨의 하얀 길’이라는 이름을, 밸리 아저씨의 집 앞 호수에겐 ‘반짝이는 호수’라는 이름을, 창밖으로 하얀 꽃잎을 흩날리는 벚꽃 나무에겐 ‘눈의 여왕’이란 이름을, 창가를 지키는 화분에겐 ‘포니’라는 이름을 선사합니다. 이름을 갖게 된 풍경들은 의미가 부여된 ‘특별한 존재’로 거듭납니다.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지난한 일상의 찰나가 기쁨의 일상으로 변주됩니다. 앤의 상상력은 버려진 자신의 존재를 추수리는 힘겨운 희망이었고, 가까스로 주어진 첫 번째 기적을 살아내는 실낱 같은 희망이었습니다. 


앤의 희망이 되어준 사람들


사실 앤의 희망은 힘겹고 위태로운 것이었습니다. 홀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무엇보다 앤에게는 마릴라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무뚝뚝하고 완고한 원칙주의자였지요. 앤과는 달리 섣부른 희망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답니다. 그녀의 첫사랑은 훗날 앤의 라이벌이자 연인이 되는 길버트의 아버지였습니다. 첫사랑을 잃은 마릴라는 평생 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고요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바르고 곧게 살아갑니다. 정직과 원칙에 집착하는 그녀의 태도는 아마도 인생의 숙명에 대한 성실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애초 사내아이를 원했으나 여자아이가 집에 왔을 때, 그 ‘오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자아이가 인정사정 없이 매몰찬 가정으로 끌려가는 것도 끝내 용납할 수 없었지요. 그리하여 앤은 그녀의 딸로 서서히 자라갑니다. 



열한 번째 에피소드 “사라진 브로치” 편은 앤과 마릴라의 관계에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아무도 없는 마릴라의 방에 브로치가 놓여 있었지요. 우연히 앤이 그 브로치를 발견하고 언제나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그리고 잠시 뒤, 마릴라는 브로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여 다그치기 시작합니다. 마침 다음날은 교회학교 소풍이 있는 날이어서 앤이 평생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지요. 브로치를 만졌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신뢰하기 힘든 ‘고아’ 아이였기에 그 의심과 벌은 합당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소풍을 가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린 마릴라도 속상합니다. 앤은 거짓 자백을 준비하고, 마릴라는 집안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 몸을 혹사시키며 자신의 원칙을 지켜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없어진 듯 여겼던 브로치가 발견되고, 앤은 누명을 벗고 가까스로 소풍에 갑니다. 마릴라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앤에 대한 편견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저런 아인 여태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오라버니 말대로 확실히 재미있는 아이이기는 하군요. 나까지 저 아이가 다음엔 무슨 말을 꺼낼 건가 하고 기다려지거든. 나한테도 마법을 걸 작정인 게지.” 


마릴라는 엄하고 보수적이었지만,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정직과 성실함, 삶의 원칙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혼란스러웠을 어린 앤에게 변치 않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앤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앤은 어느덧 어른스러운 눈빛을 가진 예의 바른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마릴라는 쓸쓸한 마음을 읊조립니다. 


마릴라는 문득 앤이 훌쩍 커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지 못한 사이에 앤은 숙녀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앤에 대한 대견함은 표현하기 힘든 그리움으로 바뀐다. 작고 깡마른 몸에 커다란 눈을 하고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떠도는 모든 상상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아이가 어느 사이엔가 다소곳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자신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품속에서 언제나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보호가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조금은 생소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앤의 달라진 모습은 마릴라에게 가슴 한 곳이 허전해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허전함은 침묵 속에서 깊어지고 밤의 정적 속에서 목메는 슬픔으로 바뀌어 버린다.


마릴라는 어느새 앤의 어머니가 되어있었습니다. 마릴라는 앤이 더 이상 자신의 보호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펐지만, 이제는 앤이 그녀의 필요가 되어줄 차례였지요. 매튜가 죽고 마릴라가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즈음, 마침 앤은 꿈에 그리던 에이브리 장학금을 받고 더 큰 세상으로 초대받습니다. 하지만 앤은 장학금을 포기하고 마릴라 곁, 초록지붕 집에 남기로 결정하지요. 그렇게 이번엔 앤이 마릴라의 기적이 되어줍니다. 마릴라가 어린 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앤의 희망이 되어준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매튜 삼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언제 다시 고아원으로 쫓겨날지 모르는 낯선 집에서 언제나 앤의 편의 되어주었지요. 마릴라가 엄격한 훈육으로 가르쳤다면, 매튜는 늘 용서하는 엄마의 사랑으로 앤을 품었습니다. 앤이 가장 많이 한 대사 중 하나 “제 기분을 알아주시는 군요”는 늘 매튜에게 하던 말이었지요. 어린 소녀 앤이 가장 간절히 갖고 싶어하던 소매 부푼 옷을 선물한 것도 결국 매튜였습니다. 



평생의 벗이 되어준 다이아나. 처음 교회에 간 앤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삽니다. 초라한 옷차림, 붉고 노란 꽃으로 장식한 모자의 앤에게 들려온 것은, ‘고아’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었어요. 교회 따위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앤에게, 다이아나는 상상 이상의 친구가 되어주었지요. 무엇보다 다이아나는 ‘소매 부푼 옷’ 따위로, 고아라는 이유로 편견을 갖지 않고 앤을 대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이아나는 책을 좋아했고, 다이아나가 빌려주는 책들로 인해 앤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지요. 앤의 곁에 다이아나가 없었다면 앤의 낭만과 상상력은 금새 좌초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버트 블라이스. 짖궂은 장난꾸러기 길버트는 한때 앤의 앙숙이었습니다. 빨간 머리를 잡아 당기고 홍당무라고 놀려, 앤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건드렸지요. 그리고 이후 둘은 장학금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이 됩니다. 하지만 앤이 에이브리 장학금을 포기하고 초록지붕 집에 남기로 결정했을 때, 길버트는 에이본리 소학교의 교사 자리를 앤에게 양보하고 둘은 점차 연인이 되어갑니다. 


기적은 결코 빨리 오지 않는다


<빨강머리 앤>은 고아였던 한 아이가 자신에게 숙명처럼 주어졌던 숱한 절망들을 이겨내고 한 성숙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자라가는 성장 드라마입니다. 희망에 대한 앤의 상상력이,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게 된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역부족입니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희망을 지켜주고 응원한 벗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디언 세상에선 친구를 “나의 슬픔을 자신의 등에 매고 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지요. 예수님은 죽으시기 직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 ‘친구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배신과 모반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정은 독보적인 순수의 영역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그대가 태어나던 해, <빨강머리 앤>을 마련하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곧고 성실한 원칙의 마릴라, 따뜻하고 한결같은 배려의 매튜, 편견 없는 우정의 다이아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길버트와 같은 벗이 되고픈 욕심이 있었지요. 바로 그대의 벗으로, 그대와 평생 사귀고 싶은 마음입니다. 과한 욕심이라 타박할지 모르나 우리의 진심이었답니다. 


기적은 결코 빨리 오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를 둘러싼 온갖 절망스런 조건과 환경들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상상력 속에서 희망은 싹틀 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편견 없는 사랑과 우정으로, 우리의 한 줌 희망을 북돋는 사람들로 인해 그 희망은 기적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대의 벗을 곡진히 여기며 동행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가 먼저, 숱한 ‘빨강머리 앤’의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아득한 현실에서 가녀린 희망을 품는 사람들, 무엇보다 아픈 사람들의 길벗이 되어주길 기대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도 언젠가 <빨강머리 앤>의 앤딩 장면에서 앤이 인용한 브라우닝의 시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도다.

 

그대의 아빠, 진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