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빛과소금_

그대, 행복이란 신화 너머 좋은 삶을 사십시오 (빛과소금, 131009)

Soli_ 2013. 10. 31. 23:17

★<빛과소금>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지’는 지금 일곱 살인 저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훗날 ‘청년 예지’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영성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그대, 행복이란 신화 너머 좋은 삶을 사십시오




스무 살 예지에게, 


무지개 ‘예(霓)’, 이르다 ‘지(至)’. 우리는 그대를 “예지”라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이름에는 부모의 소망이 담겨있듯이, “예지”란 이름은 우리의 소망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물로 벌하신 후,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셨지요. 모든 불신앙과 절망, 공포, 죄악을 이겨내고 다시금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에게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하시죠. 늘 먼저 찾으셨지만 되려 버림 받으셨고, 외면 받으시면서도 끝내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품습니다. “무지개”(霓)는 홍수 심판 이후 주셨던 언약의 징표였습니다. “예지”란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에 이르라’는 뜻입니다. 또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삶을 살라’는 당부입니다. 온갖 비바람과 먹구름이 지나간 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 무지개. 그처럼, 삶의 모든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그대의 삶에 펼쳐질 아름다운 그 무엇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어미의 자궁과도 같은 것

2007년 4월 23일 아침에 시작된 엄마의 진통은 다음날 저녁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엄마는 꼬박 이틀을 고통 가운데 힘겨워하면서도, 수술을 권하는 의사 선생님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고 자연분만을 선택했습니다. 4월 24일 오후를 지나면서 엄마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궁이 열리고, 그대도 조금씩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며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는 진통이 엄마를 힘들게 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지음(그대의 태명이었지요) 엄마는 수술하잔 얘길 한 번도 안 하시네요. 다들 이즈음 되면 그런 얘기들 하시거든요.” 가녀린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아내가 그렇게 강한 여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자는 그렇게 엄마가 되고서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됩니다. 


엄마에겐 탈수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 시도를 해보고 안 되면 밤에라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극심한 진통 끝에, 드디어 그대가 엄마의 자궁을 열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대는 4.06kg의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어요. 힘찬 울음으로 생명의 건재함을 과시하던 그대는 신기하게도, 엄마의 가슴 위로 올려졌을 때 울음을 멈췄지요.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요. 고운 눈망울을 두리번거리다 아빠의 시선 앞에 멈췄지요.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선생님들도 탄성을 질렀답니다. 아빠는 그대의 탯줄을 자르며 그만,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대가 신생아실로 옮겨진 후, 엄마에겐 두 번째 위기가 닥쳤습니다. 탈진한 상태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엄마는 경련을 일으키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호흡 곤란에 자칫 뇌경색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엄마는 응급처치를 받고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밤새 수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그리고 엄마의 목숨을 건 출산의 시간들 속에서, 아빠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그것만이 그대를, 엄마를,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긍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카밈(rachamim)’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미의 자궁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곧 어미의 자궁과도 같은 것이지요. 마치 예지를 품은 엄마의 지극한 사랑 같은 것.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시면, 우리는 더 이상 숨쉴 수 없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궁을 벗어난 태아가 더 이상 숨쉴 수 없듯이 말입니다. 



10개월간 예지를 품는 엄마의 사랑을 보며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배웠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온전한 호흡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 사랑, 은혜라는 것. 아빠가 엄마를 만나고, 그대를 갖게 되고, 그대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였지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출발점이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그대의 인생


사실 그대는 우리의 두 번째 아이였습니다. 2005년 4월에 결혼해서 이듬해 봄이 시작될 무렵, 우린 첫 생명을 품었습니다. ‘빛나는 새벽’이란 뜻의 “현서”란 태명을 짓고 우린 참으로 행복했답니다. 하지만, 현서는 8주차 아이의 형체를 가질 즈음, 스스로 심장을 멈췄습니다. 잠깐의 수술 끝에 ‘숨’을 잃어버린 현서의 육신은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야 했지요. 극심한 혼란과 고통 속에 신음하던 시간들이 지난 후에야 우린 현서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슬픔은 가슴에 묻되, 현서의 이름은 평생 간직하기로 했습니다. 그때의 일기장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주 동안 우리와 같은 ‘숨’을 가지고, 부모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던 고마웠던 아이, 밤마다 시편을 읽으며 함께 기도하며 힘이 되어주었던 아이, 우리의 신앙이 너무 작음을 일깨워주던, 우리의 소망이 너무 작음을 말해주던 아이, 진형이 순일을, 순일이 진형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기쁨임을 말해주던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은 현서였다. ‘밝아오는 새벽, 빛나는 새벽’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현서. 안녕, 현서. _2006년 3월 23일


현서를 잃고 그대를 만나기까지 우리가 배웠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 없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생명이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분의 은혜로 비롯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서의 멈춘 심장을 확인하던 순간, 예지를 품던 10개월간, 산고의 고통을 외길 숙명의 숭고함으로 인내하던 시간들 속에서, 그리고 잠시 정신을 잃어 위험천만한 지경에 이른 아내의 옆에서, 우리 둘만 남은 고독한 병실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묵상하고 구하였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부모로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을 견디면서, 새삼스런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갔던 것이지요. 그것은 현서도, 예지도, 그리고 그대의 동생 예서도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좋은 부모로 살아가기 위해 많이 노력합니다. 특히 엄마는 종일 그대를 품고 사는 까닭에, 늘 정보를 모으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애착 관계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가 되기 위한 공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공부는 간혹 가슴속 은밀한 욕망과 만나 성취와 소유 욕구로 전락합니다. 공부의 변질이지요. 모름지기 공부란 온몸으로 삶을 벼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공부는, 자녀를 어떤 존재로 바꾸기 위한 과도한 욕망에서 벗어나 부모 스스로 좋은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좋은 부모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여느 부모들처럼, 그대를 속박하고 지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무 살이 된 그대를 기껏 우리의 욕망으로 삼아 어떤 대학, 어떤 직업, 어떤 존재 등으로 규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대의 부모와 맞서기 바랍니다. 결코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그대의 인생이니까요.  


행복이란 신화 너머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자 탁석산은 ‘행복’이란 신화의 정체를 추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행복이란 단어는 제레미 벤담의 유명한 저술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설>에서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happiness)”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일한 개념으로 쓴 것이지요. 또한 ‘최대’라는 물리적 수사와 결합하면서, 행복은 계측 가능하며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추구됩니다. 하지만 행복은 결코 어떤 외적 조건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유의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현재의 소유 그 이상을 추구합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행복이란 신화가 있습니다.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부자의 불행, 빈자의 행복이란 역설을 도무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소비에트대백과사전은 행복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최대의 내면적 만족으로,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과 자기 삶의 목적 실현에 부응하는 존재 상태에 대한 인간 정신의 의식”으로 정의한다고 합니다. 


탁석산은 행복이란 신화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세가지 관점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그것은 개인, 이웃, 그리고 사회 공동체입니다. 개인은 수행을, 이웃은 서로간의 예의를, 사회는 정의롭게 분배되는 부와 평등을 통해 행복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 이웃, 사회가 적절한 역할을 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결과로 자신, 이웃, 사회가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_탁석산, <행복 스트레스>(창비, 2013) 중에서. 


부모로서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소유가 아님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우리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좋은 삶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대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늘 이웃을, 세상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행복이 헛헛한 신화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부디 그대 내면과 정신의 확신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삶’으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일 예배에서 목사님께서 읽어주신 시를 책상 앞에 적어 놓았습니다. 


천천히 씹어라/공손히 먹거라/봄에서/여름 지나/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비바람 땡볕으로/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삼켜버리면/어느 틈에/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면/그가 사람이 아닌거여

_이현주, <밥 먹는 자식에게>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긍휼로 생명의 호흡을 누립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벗 삼아 최선의 예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 좋은 삶입니다. 오늘 내가 있기까지 타자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타자를 위한 오늘 나의 작은 발걸음은 사람 된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대, 부디 ‘좋은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