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빛과소금_

그대의 청춘을 응원합니다 (빛과소금, 130910)

Soli_ 2013. 10. 2. 23:47

★<빛과소금>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지’는 지금 일곱 살인 저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훗날 ‘청년 예지’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영성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그대의 청춘을 응원합니다





스무 살 예지에게,

 

어렸을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삼 남매를 힘겹게 키우셨습니다. 집은 점점 작아지고 좁아졌으며, 마침내 여름이면 푸른 곰팡이가 피던 반지하 집에 살 즈음부터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하시기 시작했습니다(어쩌면 그전부터 그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린 저의 기억엔 ‘그때’의 슬픔이 하나의 정지된 화면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푸른 곰팡이가 아니라, 한때 푸른 잔디밭 마당을 가진 집에 살았다는 자부심으로 버텼지만, 좌절은 곧이어 엄습했습니다. 좋은 선생님도 만났지만, 어떤 선생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은 분기별 등록금을 아직 내지 못한 아이들로 방과 후 청소를 시켰지요. 처음에는 절반에 가까운 아이들이 청소를 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다섯 명도 안 되는 아이들이 힘겹게 청소했습니다. 저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았습니다.


중학생이던 때 누나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누나의 청춘을 엿보며, 막연히 꿈꾸던 낭만이 있었습니다. 그즈음,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예찬하던 민태원 선생의 글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읽고 또 읽던 멋진 문장들. 특히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는 문장에 한껏 설렜습니다. 또 새뮤얼 울먼이 여든한 번째 생일에 맞춰 출간한 책의 서두에 적힌 <청춘>이란 시도 얼마나 멋지던지요.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네

그것은 장밋빛 뺨,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손발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라네

청춘은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말하는 것이라네

_새뮤얼 울먼, <청춘> 중에서


물론 이 시는 ‘스무 살 청년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청춘의 뜨거움을 살아내야 한다는 당위를 표상하고 있지요. 어찌 되었건, “청춘의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멋지게 펼칠 ‘스무 살’의 청춘을 갈망했습니다. 어쩌면 그 갈망만이, 가난하고 지난했던 슬픔을 견디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누나의 청춘도, 저의 갈망도 곧 좌절했습니다. 눈물샘을 자극하던 매캐한 최루탄 연기, 아스팔트 위에 치솟던 불길. 언젠가 누나를 만나러 가던 길에서 목격한 80년대 후반 대학가의 풍경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가난도 견뎌야 하고, 세상과도 싸워야 했던 누나의 청춘은 힘겨웠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훌쩍이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누나의 슬픔을 짐작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누나와 언쟁하며 누나를 조롱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학생의 언어였겠지만, 조롱의 요체는 ‘당신의 청춘은 왜 그리도 무력한가?’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누나는 막내 동생과의 싸움에서도 무참히 패배했지요(마흔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의 어린 치기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나에게 용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누나의 책장에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란 책을 발견했던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아직 겨울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976년 발표된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아득한 슬픔의 책입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고, 다른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면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비롯한 12편의 단편 연작 소설이지요. 작가 조세희는 이 ‘난장이 연작’을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에 대한 책”이라고 요약했습니다. 거인의 폭력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숱한 난쟁이들의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에겐 이 책이 세 권 있습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1986년판, 그리고 2000년판과 200쇄 기념 한정본인 2005년판. 2000년 판의 면지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십 년도 훨씬 전에 읽었고 오늘 또 다시 읽는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나면 또 흐르면 꺼내 읽으리라. 그 슬픔이 여전한지 확인하련다.”(2002.5.19)


언젠가 작가는 이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시대를 희망한다고 하였으나, 이 슬픔의 서사는 여전히 숱한 사람들을 사로 잡습니다. 난쟁이들의 절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저는 이 책을 열일곱 살에 처음 읽었고, 지금까지도 거듭거듭 읽습니다. 읽을 때마다 아픈 책은, 곁에 두어야 할 가장 좋은 책입니다. ‘난장이들의 세상’이 곧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누나의 슬픔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지요. 그때부터, ‘청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차가운 현실에 대한 준엄한 자각으로 대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겨울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의 부름


“아프니까 청춘”이고 “천 번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멋진 말이 청춘의 위로가 되는 세상입니다.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지만, 결국 ‘반쪽’짜리 위로입니다. 청춘의 아픔은 청년의 성장통 따위가 아닙니다. 왜곡된 정의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도, 청년도, 중년도 고통스럽습니다. 평생의 벗을 사귀어야 할 청소년들은 오직 성공을 위한 무한 경쟁의 외길을 내달려야 합니다. 힘겹게 들어간 대학에선 성공이 아닌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취업이란 당위는 청춘의 낭만을 거세합니다. 직장인이 되어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평균 수준의 연봉을 받아선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자립이 쉽지 않은 나라입니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라는 책이 있더군요(제목만 읽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숱한 ‘불혹’은 오늘도 흔들리고 좌절하고 고뇌합니다. 경제학자 우석훈 선생은 더 이상 풍요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감히 이렇게 권면합니다. 멘토를 찾지 마십시오. 성공한 자리에 오른 이들을 선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적절한 위로가 절실하겠지요. 헨리 나웬 신부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상처를 가진 이들이 타자의 아픔을 만지는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일부 성공한, 소위 ‘멘토’들의 헛헛한 위로가 이를 수 없는 지점에, 나와 같은 고통과 아픔을 지금도 견뎌내고 있는 벗과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 연대만이 지속 가능한 우정을 담보하며, 힘겨운 삶의 경주를 견인할 것입니다.  


성공한 기성세대의 일부 예외적 엘리트가 지배하는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혹여 그들을 선망하여 질주한 인생이 그들의 자리, 혹은 그 언저리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은 그런 식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목표를 위해 그대의 청춘을 소비하지 마십시오. 벗과의 우정을 희생시키거나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청춘을 즐기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으로


스무 살 무렵, 성경책 한 모퉁이에 적어 두었던 문장이 있습니다. “신앙, 혹은 신학은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발견이었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삶의 시작은 시대와 세상 속에 공고하게 자리잡은 위선과 불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저항하지 아니하고는 신앙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소명 이전에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고 살아 남기 위한 절박함이었습니다. 



2010년 3월 11일, 고려대학교 교정에 한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김예슬 씨가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감동적인 명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대자보의 명문을 보며 아슬하고 위태로운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김예슬 선언”을 수없이 읽었습니다. 솔직한 나의 기대는 절반의 희망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어떤 의심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김예슬 씨의 대자보가 저녁 아홉 시 뉴스에 등장하며 여러 이슈를 가져왔고, 찬반 논쟁도 뒤따랐지요.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명문대 학생이 아니라, 지방대 학생이라면 이렇게 이슈가 될 것인지에 대해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나의 의심은, ‘기껏 대학교 3학년짜리의 진심’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에 대한 ‘꼰대’ 같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젊은 치기가 앞날 유망한 한 청년의 삶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고, 혹은 그가 몇 년 후 총선에서 진보 정치의 기수로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 삐딱한 예측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김예슬 씨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김예슬 씨의 사유와 결기를 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책은 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넓었습니다. 책을 읽고서야, 그에 대해 가졌던 의심은 좌절하였고, 그 좌절을 한껏 기뻐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대학 거부 선언은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임을. 나는 꼭 해내야 하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야 함을. 그리고 또한 알고 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 싸움은 말도 주장도 아닌 내가 살아낸 만큼의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수많은 고뇌와 눈물 어린 시간 속에서 결단한 나의 첫 걸음을, 새로운 사람의 길 하나 만들어 내겠다는 나의 떨리는 걸음을, 나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김예슬 선언_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느린걸음)


김예슬 씨는 다행히 분노에 치우쳐 삶을 만만히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모한 로맨티스트도 아니었고 몽상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슴 뛰는 삶의 모델이 나에게는 아름답지 않다”고 일갈합니다. 어떻게 꿈이 직업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롤 모델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학 거부’를 선언하고 당당히 대학 문을 나섰지만, 당장 고졸자 신분으로 돌아온 자신의 현실적 처지를 엄혹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는 “젊음이라는 빛나는 무기 하나 믿고” 거짓과 더불어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삶”을 택했습니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 예지가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의 갈피 속에 새겨 넣은 저의 문장입니다. 대학에 가든지, 거부하든지는 오롯이 그대가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인생이라는 것, 그대의 빛나는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하여, 새뮤얼 울먼이 노래한 대로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으로 우정의 연대를 도모하고, 세상에 맞서 저항하시길 바랍니다. 부디, 그대의 청춘을 사수하십시오. 그대를 응원합니다.   

그대의 아빠, 진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