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나의 책 나의 저자
올해의 책은 없다. 다만 나의 책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때 책에 대한 광신도였다. 책으로 회심했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었으며 책의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책의 사람들은 곧잘 책을 배반하였다. 좌절은 타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절망은 내게서 귀결되었다. 책에 대한 신앙으로 시작한 밥벌이였으나 이제는 밥벌이를 위해 책을 만든다. 좋은 책을 놓고 필사적으로 토론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좋았던 책을 가만히 듣고 나에게 좋았던 책을 조근조근 말할 뿐이다. 설득은 그 책의 몫이다. 그가 그 책의 텍스트로 들어갈 때에야 그 책이 그의 삶으로 틈입할 것이다. 다만 나는 나의 소중한 책을 성실하게 기록하길 바란다. 여기 소개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들이 놓여 있던 곳에 나의 기쁨과 슬픔이, 희망과 절망이 있었다. 그렇게 삶이 되는 책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 책들이 당신에게도 말을 건네길 바랄 뿐이다.
요약
10권의 책
온 더 무비
존 치버의 일기
처럼
세월호, 그날의 기록
필리버스터
L의 운동화
안녕 주정뱅이
가만한 당신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불과 글
함께 소개하지 못해 속상한 책
나의 저자
이서희
김재수
10권의 책
■■■ 출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자서전
올리버 색스 지음┃이민아 옮김┃알마 펴냄┃2016년 1월
당신 덕분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 행성
“나는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습니다. 많은 것을 받았고 일부는 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의식 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 타자의 고통에 직면하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조할 수 있는 자라면, 그런 자의 삶의 긍정이라면 받아들이겠다. 내겐 올리버 색스가 그러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다. 그의 독자였던 것이야말로 하나의 특권이자 모험이었으니, 이 책을 헤아리는 건 나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다.
아무리 나빠도 우리는 움직인다. 아무리 좋아도
절대에 가닿지 못하는, 안식할 곳 없는 우리,
언제나 멈춰 있지 않아, 더 가까워진다.(356쪽)
《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박영원 옮김┃문학동네 펴냄┃2016년 1월
이토록 치열한 독백
그는 내가 싫어하는 인간의 유형을 대체로 갖췄다. 눈부신 성공을 거둔 작가였지만 동료 작가들을 끊임없이 질시했다. 원고료에 집착하면서도 출판사들의 환대를 끊임없이 배고파 했다. 일부일처제라는 신념을 옹호하면서도 아내와 불화했다. 양성애자임에도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 했다. 평생 가족들에게 신경질적이었다. 우울하고 천박했다. 보수적이고 냉소적이었다.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자였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부터 1982년까지 35년간 써왔다는 그의 일기를 읽으며, 나는 어느새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900쪽이 넘는 그의 일기를 다 읽은 후 그의 아들이 쓴 서문을 다시 읽으며, 나는 울컥했다. 나도 그처럼.
우리는 식당에 있었다. 난 의자에 앉아 아버지가 주신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역시 그런 나를 의자에 앉아 지켜봤다. 그리고 내 생각이 어떤지 물어왔다. 난 흥미로운 글이라 생각한다고, 아름답게 쓰인 글이라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더 읽어보라고 하셨고 이에 난 좀더 읽어나갔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10쪽)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자신의 생을 이토록 치열하게 기록했던 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비밀의 전제로서만 가능했을 듯한, 잔인할 정도의 솔직하게 기록한 일기를 아들에게 보여주던 그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종종 자신의 세계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분열의 시간들을 그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독과 속박의 위태롭게 거닐던 자의 독백들, 이토록 치열한 독백을, 나는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치버의 삶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삶에 대한 경이.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김응교 지음┃문학동네 펴냄┃2016년 2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동주의 길
모름지기 시인의 책이라면 이러해야 한다. 이 말은 윤동주 시인의 책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책의 당위이기도 하며, 김응교 시인만이 쓸 수 있는(써야 하는) 책의 소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당위를 수렴한 소명의 결과다. 간혹 책의 갈피 속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곡진한 숨결은 그 때문일 것이다. 소명의 숨결이다.
이 책은 작가론, 혹은 평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김응교는 윤동주의 시어들로부터 시대의 동심과 애통을 포착하여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의 길을 섬세하게 복원한다.
그리고 만주 명동마을에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이르는 그 길은 정지용, 문익환, 니체, 투르게네프, 벤야민, 레비나스, 바디우, 블랑쇼 등을 만나 세계로 확장되고, 윤동주는 하나의 ‘고전’이 된다. 무릇 오늘과 내일의 주석으로서의 고전이다. 통절의 시대, 슬픔의 곁에서 당신을 위로하는 시인의 당부가 이 책에 새겨져 있다. 그렇게 ‘동주’(東舟/童舟)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된다. 우리가 이 책을 애써 읽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윤동주의 시에는 인간의 희망에 대한 ‘무제한적인 진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윤동주의 시에는 분명 절망에서 머물지 않는 끊임없는 잉걸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무제한적인 진보를 믿었기에 그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공감하는 이들이 아직도 윤동주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닐는지요.(503쪽)
《세월호, 그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지음┃진실의힘 펴냄┃2016년 3월
시대의 곡절마다 핍박받은 진실에 관하여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70-80년대 독재정권하에서 고문을 당해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이 진실 규명에 함께한 인권활동가, 변호사, 의사 들과 힘을 모아 만든 재단이다. 수십 년의 고통과 노력 끝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고문과 투옥의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은 병들고, 젊은 시절은 속절없이 사라졌다.(뒷날개)
이 책을 엮은 이들은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시대의 곡절마다 진실은 은폐되고 핍박받았다. 진실의 복원을 위해 싸우는 그들이 세월호 유족들과 만나 이 책을 만든 것은 필연이다. “세월호 유족들이 건너야 할 슬픔과 절망의 시간이 바로 ‘진실의 힘’이 지나온 시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슬픔과 절망의 시대를 견뎌온 이들이, 슬픔과 절망의 시대를 건너야 할 이들에게 손을 건넨 것이다.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 싸움은 참으로 힘겨웠고, 힘겨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리하여 진실은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의 요체는 바로 그들이므로.
이 책은 2014년 4월 15일 세월호의 늦은 출항부터 시작하여, 세월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오전 8시 49분부터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한 10시 30분까지 101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 단위로 촘촘하고도 담담하게 기록한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에 단원고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구조 계획 없는 구조 세력’이 국가를 장악하고 있었다. 101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 대통령은 없었다.
8시 50분 사고 발생 직후,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5분 5초였다. 9시 24분 둘라에이스호 교신 직후,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9분 28초였다. 9시 45분 조타실 선원들이 해경 123정에 오른 직후, 그때라도 퇴선 명령이 있었다면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6분 17초였다.
당시 해역 수온은 12.6도였다. 최악의 경우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바다에 떠 있기만 해도 최대 6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629쪽)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
이김 편집부 엮음┃이김 펴냄┃2016년 3월
정치혐오 너머에 민주주의가 있다
이 책은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192시간 27분의 테러방지법안 반대 필리버스터 속기록 전문을 담았다. 필리버스터가 3월 2일에 끝났는데, 이 책의 출간일은 3월 16일이다. ‘257*182’ 판형에 빼곡하게 앉힌 텍스트로만 1344쪽이다. 서른여덟 명의 국회의원들 중 어떤 이들은 이번에 새롭게 평가를 받거나 소위 스타가 된 이들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외에도 오랜 시간 수많은 이들이 저곳에서 거악에 맞서 온몸으로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혐오의 시대는 그들의 발언과 투쟁을 차단하고 가뒀을 것이다.
정치혐오는 정치, 자본, 언론을 장악한 권력의 오랜 기획이다. 정치를 혐오하는 시민들을 오히려 정치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지난 필리버스터 정국은, 견고했던 혐오의 편견이 조금씩 무너지던 극적인 순간들이었다. 비로소 그들이 시민들에게 발견된 것이다. 시민들은 그제서야 저 자리에서 외롭게 싸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영악한 권력은 정치혐오의 기획을 더욱 치밀하고 노골적으로 추진할 것이고 국민들은 쉬이 망각의 습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저들의 투쟁을 기록하는 것. 그 싸움을 간직하고 이어가도록 추동하는 것. 그러므로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라는 이 책의 부제는 합당하다.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므로.
사상의 자유, 내가 뭔가 불만이 있으면 말할 수 있는 자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누구에겐가 말해서 그것을 시정할 수 있는 자유, 내 조국의 국가기관이 잘못되면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 내가 뽑은 위정자들이 잘못되면 그것을 비판하고 교정하려고 할 수 있는 자유, 이런 자유가 사라진 사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858쪽)
《L의 운동화》
김숨 지음┃민음사 펴냄┃2016년 5월
진실의 수행자
소설은 마크 퀸이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을 만든 작품 〈셀프〉(1991)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작품을 보관하던 냉장고의 전원 코드에 문제가 생겨 피가 녹아내려 훼손된다. 그렇다면 훼손된 마크 퀸의 작품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복원을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섞는다면 그 작품은 여전히 〈셀프〉일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소설의 주인공은 요셉 보이스의 퍼포먼스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1965)을 통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라는 복원가의 언명에 도달한다.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33쪽)
L(이한열)은 죽고 그의 운동화가 남았다. 28년의 세월을 홀로 버틴 운동화다. L의 270밀리미터 타이거 흰색 운동화 복원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주인공은, 최소한의 것만을 복원해야 한다는 원칙과 소멸되어 가는 것들에 대한 슬픔 사이에서 서성인다. 복원과 훼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유념하며, 한 사람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일이란 그 사람의 세계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가치를 부여잡고 고투한다.
L의 운동화는 싸우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L의 운동화가 발생한 것이다.(176쪽)
원칙과 지향은 모두 진실의 복원과 관련이 있다. 진실은 그즈음 어딘가에 있으며, 훼손된 기억의 복원을 쫓는 이들로부터 수행된다. 복원가의 곁으로 슬픔의 사람들이 맴돈다. 무릇 진실을 쫓는 자가 감당해야 할 숙명의 일면이다. 김숨의 문체는 고요하되 단단하다. 절제된 문장들은 바지런하고 성실하다. 간혹 몸의 언어처럼 보이는 것은, 서사를 밀고 나가는 힘 때문이다. 진실의 수행자로서, 김숨은 독보적이다.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창비 펴냄┃2016년 5월
저릿하고 서늘한 슬픔의 파문
“산다는 게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라고 시작하는 소설 <봄밤>은, 지독한 인생의 농담에 스러져간 영경과 수환에 대한 이야기다. 교사로 살다가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 알코올중독에 빠져 직장마저 그만두었던 영경이, 사업에 부도를 맞아 아내에게 버림받고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노숙자로 전전하던 수환과 만났을 때를 소설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잠시의 행운은 구차하고 삶의 비극은 가열찼다. 쉰다섯 그들의 쇠락은 훨씬 비참했다. 그러므로 남겨진 자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과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39쪽)
어떤 이들에게 술은, 슬픔의 변명을 기꺼이 들어주는 마지막 친구다. 이들의 주정은 비정상의 세상을 버텨내는 소멸의 신음소리다.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모두 술과 주정뱅이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것이 꼭 술과 주정뱅이가 아니어도 괜찮을 듯하다. 비극의 서사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비극의 서사들은 권여선이라는 화자를 통과하며 파문을 일으킨다. 저릿하고 서늘한 파문이다. 보편의 슬픔을 개별의 고통으로 감각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슬픔의 감정이 아니라 물리적 아픔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봄밤>을 쓸 때, 소설을 쓰며 처음으로 울었다고 한다. 신형철은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고 썼다. 독자도 그를 따라 울며 고통의 표정을 짓는다.
《가만한 당신》
뜨겁게 우리를 흔든,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지음┃마음산책 펴냄┃2016년 6월
우리 삶의 자리에 가만히 자리하기를
조지 마이클이 죽었다. 2016년의 크리스마스는, 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로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부고도 있으나, 대개의 부고는 그렇지 않다. 쉽게 잊힌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갈망도 그것 때문이다. 남겨진 자들은 모종의 형식과 절차로 죽음을 기린다. 애도는 남겨진 자들의 자리에 무언가를 심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생과 죽음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록이다.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 남겨진 자들의 자리에 가만히 자리하기를 바라는 마음. 이 책의 마음이다.
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6쪽)
목차를 보고 놀랐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여성, 흑인, 장애, 성소수자 등을 위해 싸우며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의 부고를 다뤘다. 그들이 구축해 놓은, 오늘 내가 누리는 가치들의 구체성 때문에, 다시 한번 놀랐다. 단숨에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단숨에 읽어서도 안 되는 책이다. 한 장씩 읽고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자리에 ‘가만히’ 자리하기를 빌어야 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홍한별 옮김┃반비 펴냄┃2016년 7월
미지의 우주와 동행하는 법
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아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명한 사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이 책은 더 불편하다. 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 두 명이 총기를 난사해 학생과 교사 13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했다. 가해자들의 나이는 17살이었고, 17년 후 그들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이 책을 썼다.
수는 아동 발달과 아동 심리를 전공했고 언제나 좋은 엄마라는 자의식이 있었다. 딜런을 햇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햇살처럼 빛나던 아들이 괴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수는 알아채지 못했다. 사건 이후 아이의 시간들을 추적해내며, 실은 자신이 모르는 아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발견하며 자책한다.
만약 엄마가 아이의 우울과 자살 충동 징후를 미리 발견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 대목에서 수는 처절한 고통을 토로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이다. 내 아이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그의 결함을 인지하고 보완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내 자신의 세계도 온전히 파악해내지 못하는 존재들 아닌가. 내 아이지만, 그에게도 하나의 광활한 우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경외감, 그리고 그 존재에 닿지 못한 괴로움과 두려움이 아닐까.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
나머지 세상 전부가 딜런을 괴물이라고 비난할지라도, 내가 잃은 것은 내 아이였으니까.(113쪽)
문제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거다. 딜런이 한 행동이 괴물 같은 무시무시한 일이었긴 하지만, 이 극악무도한 참극의 배후에 있는 불편한 진실은 ‘좋은 가정’에서 걱정 없이 자란 수줍음 많고 호감 가는 젊은이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톰과 나는 아이들이 볼 영화를 골라주고 책을 읽어주고 기도를 하고 안아주면서 아이들을 재웠다. 딜런은 말 그대로 전형적인 착한 아이였다. 키우기도 쉬웠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언제나 대견한 아들이었다.(114쪽)
《불과 글》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윤병언 옮김┃책세상 펴냄┃2016년 11월
아감벤은 보물이다
언어는 존재를 규명한다. 불꽃을 잃어버린 언어는, 무위와 저항이라는 창조의 전위로서 복원이 가능하다. 문학과 철학의 융합을 추동하는 아감벤의 글은 번뜩이는 통찰로 가득하다. A에게 이 책을 추천했더니 그는 이 책이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쉽고 명징하다.
아감벤에 의하면, 우리는 길을 잃어야 한다. 완벽하게 해명된 현실 속에서 신비는 발견되지 않는 까닭이다. 언어의 심연 속에서 창조물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문학은 거짓이다. 삶의 의미는 신비의 영역 속에 감춰져 있다.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이 불을 지핀다. 불가능의 전복, 아감벤의 모략은 매혹적이다.
불과 글, 신비와 서사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한 요소의 실체가 다른 요소의 상실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하고 부재를 증언하면서 그것의 그림자와 추억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키는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20쪽)
문학의 자리에 삶을 넣어도 되겠다. 그렇다면 저 마지막 문장은 문학에 대한 탄식이자, 삶에 대한 요청으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신비가 누락된 우리 시대의 글쓰기를, 오늘의 삶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서 읽어내도 괜찮지 않을까. 문학은 신비에 관한 회상의 장르라는 아감벤의 언명도, 삶의 지평으로 확장되어야 마땅하다.
편집자들과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한마디 남기고 싶다. 여러분은 수치스러운 언사에 몰두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가장 많이 팔린 책, 결과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들의 순위라는 수치스러운 표현에 신경을 끄고 대신에 읽히기를 요구하는 책들의 순위를 머릿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이러한 요구를 토대로 하는 출판사만이 오늘날의 독서 문화가 겪고 있는 위기로부터 책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133쪽)
아감벤은 불꽃을 잃어버린 채 책을 만들고 있는 내게, 출판의 길을 잃어버렸다는 자책이야말로 오히려 희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에게 위로를 얻었다. 책 만들기의 지겨움에 허덕이는 내게, 아감벤은 보물이다.
+ 함께 소개하지 못해 속상한 책들
그리고 2016년 나의 저자
이서희
《유혹의 학교》(한겨레출판 펴냄┃2016년 5월)
서평 “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다운, 유혹으로의 초대” http://soli0211.tistory.com/574
관능의 순례자였던 그가, 유혹의 선생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선생은 매혹하는 자다. 첫여름의 빛깔을 가진 서사, 이른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언어를 가졌다. 성급하게 구원을 말하지 않으며, 사랑은 목적어에 의존하지 않는 동사의 행위라는 것을 곡진하게 설명해낸다. “살아가는 일은 도처에 굳은살을 키워가는 일”이라는 그의 고백은, 사랑하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것이다. 책이 아닌 저자를 꼽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그의 곁에서 그 고백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
김재수
《99%를 위한 경제학》(생각의힘 펴냄┃2016년 10월)
편집 후기 “한파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화톳불 같은 책” http://soli0211.tistory.com/577
“내가 만든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 것은 반칙이다. 그러나 이번엔 반칙을 해야겠다.” 두 해 전에 한 말인데, 또 해야겠다. 어쩔 수 없다. 책을 만들면서 저자에게 매혹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경제학의 언어로 사람을 울리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편집자보다 성실했다. 잔뜩 지친 일상에서도 그가 보내온 원고를 읽으며 힘을 내는 날들이 많았다. 그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에는 진심의 언어들이 뚝뚝 흘러넘쳤다. 감히 ‘99%’라는 제목을 붙였다. 책의 빛깔을 세월호의 노란색으로 선택했다. 그래도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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