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수 선생님께,
처음 편지를 드린 것은 작년 11월, 첫겨울 무렵이었습니다. “경제학은 밥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라는 고故 정운영 선생님의 문장을 인용하였지요. ‘밥’은 세상사의 고달픔, ‘사람’은 그 고달픔을 살아내는 이들의 은유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사람은 결코 홀로 규정될 수 없으며, 결국 우정과 사랑, 고독과 연대 사이에서 그 본질을 규명해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무릇 경제학도 그 맥락에서 당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흘러 다니는 무수한 말들 속에서, 선생님의 글을 견고한 텍스트로 오래 간직해야겠다는 다짐도 거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출간 제안을 드린 다음 날, 선생님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첫눈이 내린 후 한파의 아침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다시 드린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지요. “슬픈 현실과 비관적인 전망들로 자못 우울한 날들이지만, 애써 날마다 희망의 단초를 찾으려 합니다. 아홉 살 딸이 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 아침까지 남아 있던 어젯밤 읽은 책의 한 문장, 10년 만에 다시 보았지만 여전한 감동의 〈이터널 선샤인〉, 쇠락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석양,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 저편 친구의 목소리, 열망했던 프러포즈에 대한 응답의 메일. 때론 그 단초들이 희망으로 도약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은 선생님의 답신이 그러했습니다.”
실은 경제학을 잘 모릅니다. 모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정운영 선생님의 글을 흠모하여 책상에 오려 붙여놓곤 했으나, 그것은 아마도 인문학적 소양이 깃든 유려한 문장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그분의 선집 《시선》을 만들면서야 비로소 깨달은 경제학의 이치들이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 이상헌 선생님의 책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도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경제학자의 글이 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김재수 선생님의 책을 만들면서, 이제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에 대한 편견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 책의 기획안에 썼던 저의 글엔 그 기대감이 한껏 깃들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저항의 결기를 다지며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의 통찰을 감성적인 언어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류 경제학의 언어와 방법을 준용하되, 그 메시지는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는 이들을 향할 것 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학문인 경제학의 언어를 통해, 승자독식사회의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날 선 시선을, 따뜻한 목소리로 전하는 따뜻한 책이 될 것입니다.”
처음 제안한 제목은 《을을 위한 경제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다시 제안하신 《99%를 위한 경제학》으로 결정되었지요. 시의성이나 미세한 어감의 차이에서도 더 나았고, 독자층을 폭넓게 포괄할 수 있다는 포지셔닝의 이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제목에 동의한 것은 책의 메시지를 적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99%를 위한 책입니다. 마치 ‘99%를 위한 경제학’이 소위 진보의 테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은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 성향의 독자들도, 주류 경제학뿐만 아니라 비주류 경제학도 아우르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경제학적 합리성과 효율성에 관한 문제 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순전한mere 경제학’에 근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계를 나누고, 편을 가르며, 서둘러 선악과 피아를 식별하려는 시도는 대개 무도한 권력자의 전략입니다. 경제학적 사고방식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거나 선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을 직선과 극단에 가두지 않고,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습니다. 한계적으로 사고하여 최적의 대안을 찾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선택에 따르는 기회비용을, 권력과 권위, 관습에 의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게도 잃고 있는 것을 찾아냅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반골 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배운 경제학의 정신을 오래도록 숙고할 것입니다. 경제학의 반골 정신, “좌우를 넘나드는 최적이라는 날 선 칼날 위에 서겠다는 용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없이 절실합니다.
‘99%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맥락은, 이 책이 딱딱하고 부담스런 경제학 서적들과는 달리 쉽고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헌 선생님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하지만 ‘99%의 경제학’을 만들려는 그의 시도는 전혀 ‘살벌하지’ 않다. 저자는 마치 옆집 아저씨마냥 세상일을 엮어 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지요. “읽지 않을 수 없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된다.”
그렇습니다. 이 책의 울타리는 낮습니다. 누구나 한번 읽으면 끝까지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단지 쉽고 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결국 가슴의 언어가 아닐지요. 날 선 논리가 따뜻한 가슴의 언어로 발현될 때에야 타자의 마음에 닿습니다. 가슴의 언어라는 것은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어휘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심의 언어입니다. 선생님의 글에 종종 등장하는 자기 고백의 서사는, 독자들의 경계를 허물어뜨립니다. 오죽하면 이 책의 표지를 작업했던 정계수 디자이너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울었을까요. 디자이너를 울리는 경제학자의 글이라니요.
편지가 너무 길었습니다.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은 지 거의 일 년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선생님의 책을 곁에 두고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첫 편지를 드렸던 무렵처럼, 지금 이 나라의 한파는 변함이 없습니다. 일 년 내내, 어쩌면 평생토록 추위를 앓아야 합니다. 모쪼록 이 책이 한파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화톳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모여 앉아 세상사를 이야기하며, ‘나’와 ‘너’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바로 99%의 세상을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파주에서,
김진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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