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나의 책 나의 저자
언제부턴가 좋은 사람보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좋았다. 그것이 잠시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좋은 사람이지만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생겨났다. 한때 좋은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공적 영역 혹은 사적 관계들의 교집합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돌출된다. 그에 합당한 기준이나 자격 따위는 그다음에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던 건 대개 내가 힘겨운 시절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책도 그러하다. 좋은 책보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나의 고독과 슬픔과 좌절을 위로한다. 내가 고독과 슬픔과 좌절을 지날 때 이 책들이 내 곁에 있어주었다. 좋은 책을 좋아할 때도 있지만 도무지 이 책이 왜 좋은 책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그저 좋은 책들이 생겨났다. 이 책들은 나로 하여금 울게 하고 웃게 하고 글을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난 이 책들을 좋은 책이라고 소개하는 대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그래서 나의 책과 나의 저자라고 소개할 뿐이다.
이 책들이 당신의 곁에도 있어주기를, 당신도 이 책들을 좋아할 수 있기를.
요약
12권의 책
진심의 공간
랩걸
당신이 계속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바깥은 여름
오늘은 잘 모르겠어
딸에 대하여
아픔이 길이 되려면
사피엔스의 마음
촛불혁명
웅크린 말들
너는 너로 살고 있니
나의 저자
김숨
존 버거
12권의 책
■■■ 출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
《진심의 공간》
나의 마음을 읽다 나의 삶을 그리다
김현진 지음 | 자음과모음 펴냄 | 2017년 2월
우리가 몰랐던 그토록 성실한 의미들
유형의 공간을 짓는 건축가이지만 그는 무형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다. 삶이 비루한데 공간이 아름다울 수 없다. 삶은 온갖 사소한 것들의 용도와 배치와 질서와 관습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온갖 사소한 것들이 저자에 이르러 ‘진심’으로 수렴되고 ‘공간’으로 발현된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의미’에 닿는다.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공간,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 성실한 의미들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렇게 체험되는 책은 드물다.
책을 읽으며 이 책의 편집자가 부러웠다. 나도 페이스북에서 저자를 발견하고 그의 글을 탐냈다. 그에게 정성 들여 편지를 쓰고 있을 때, 그가 출간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까웠지만 기쁘기도 했다. 곧 그의 책을 만날 수 있겠다는, 독자로서의 설렘이 편집자의 아쉬움을 넉넉히 이겼다. 저자의 페이스북을 통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엿보았는데 그는 편집자를 향해서도 진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이더라. 의외로 그런 저자는 드물다.
우리가 발견한 문, 계단, 창을 깊이 관찰하고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심성과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줄까?(42쪽)
사람에게 자의식이 생기는 순간부터, 공간은 존재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우리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공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되면 삶의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다. 건축의 기술과 복잡한 아름다움은 공간적 요소마다 집약되어 있다. 건축은 그저 우리를 보호하고 이동을 돕는 장치로서 끝나지 않는다. 더 숭고한 목표를 의식하게 한다. 건축을 건축이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과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심성을 어루만지고, 만들고 지키는 사람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아름답고 정교한 공간이다. 허투루 짓지 않고, 노련하게 설계하고 정교하게 만든 계단은 그 의도에 가장 가깝다.(58쪽)
《랩걸》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음 | 알마 펴냄 | 17년 2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랩걸의 세상
아름다운 책(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알마는 왜 이토록 책을 예쁘게 만드는 것인가). 그러나 이 책은 훌륭한 외양보다 조금 더 훌륭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문자들로 촘촘히 엮인 세밀화 같다. 세밀화의 대상은 나무와 씨앗과 꽃들이기도 하지만, 기실 여성이자 식물학자이자 작가인 호프 자런 자신이기도 하다.
나무는 오래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세상에 맞선다. 물러서지 않고 세월을 견딘다. 자런은 나무를 사랑하다가 나무의 사람이 되어간다. 과학의 세계는 엄밀함을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만 유독 여성들을 향해서는 그렇지 않다. 과학자의 실험실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불가능의 습속에 맞서는 공간이다. 과학자 자런의 삶이 그러하다. 조울증에 고통스러워 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나무는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며 또 다른 나무들을 돕는다. 숲은 연대하는 나무들의 세상이다. 우리의 세상도 그러하기를, 수많은 ‘랩걸’의 세상을 열망한다.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35쪽)
식물을 다루다 보면 자주 겪는 일이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식물은 반으로 갈라놔도 뿌리는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 위를 모두 잘라낸 나무의 둥치는 다시 온전한 나무로 자라기 위한 시도를 매년 하고 또 한다. 둥치의 안쪽은 잠든 싹으로 가득하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 거의 두 배나 되는 싹들이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싹은 줄기로, 줄기는 잔가지로, 그중 운이 좋은 잔가지는 굵은 가지로 크고, 건강한 굵은 가지는 몇 십 년을 버티면서 결국 이전만큼 녹음이 우거진 나무로 성장한다. 어쩌면 누군가가 베어버리려고 한 것 때문에 더 우거진 나무가 될지도 모른다.(383쪽)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하루가 밝고, 이번 주가 다음 주가 되고, 이번 달이 다음 달이 되는 동안 내내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숲과 푸르른 세상 위에 빛나는 어제와 같은 밝은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지만 마음속 깊이에서는 내가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개미에 가깝다. 단 한 개의 죽은 침엽수 이파리를 하나하나 찾아서 등에 지고 숲을 건너 거대한 더미에 보태는 개미 말이다. 그 더미는 너무도 커서 내가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작은 한구석밖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397쪽)
《당신이 계속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페미니즘 에세이
홍승은 지음 | 동녘 펴냄 | 2017년 4월
불편함의 연대
이 책을 굳이 ‘페미니즘 에세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홍승은은 단지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을 따랐을 뿐이므로. “만일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홍승은은 진실 앞에서 용감해지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나인 이유를 해명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기득권의 사람들은 불편하다. 기득권의 사람들 중 착한 사람들은 혜량을 베풀어 그 불편함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홍승은은 그 혜량을 받을 마음이 없다. 그저 자신이 존재함으로 당신이 계속 불편하기를 바란다. 당신을 계속 불편하게 하기 위해 그는 쉬지 않고 발언하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무수한 폭력에 맞서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의 숙명을 수행한다.
이 책을 굳이 ‘페미니즘 에세이’라고 불러야겠다. “나는 내가 속한 가족, 학교, 연인, 관계, 사회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이야기를 썼을 뿐인데 어느새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한때 나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고는 했다. 당신은 언제부터 자신이 페미니스트란 것을 각성하게 되었나요. 그런데 지금은 질문을 바꿨다. 당신은 당신의 사람들로부터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있나요. 당신으로 인해 당신의 사람들은 각성에 이르고 있나요.
그가 운영하는 카페 이름은 ‘인문학카페 36.5도’. ‘인문’은 사람다움을 지향하는 가치이며 ‘36.5도’는 사람의 체온이다. 36.5도의 체온을 가진 보편의 존재로서 그가 충만하기를 바란다. 책을 읽으며 그의 고독이, 울음이, 슬픔이 느껴져 자꾸만 멈칫하였다. 나도 그처럼 고독하고 울고 슬퍼할 수 있기를, 우리가 그렇게 연결되기를 바란다.
나는 왜 책을 내려고 할까. 한참을 머물렀던 질문이다. 내 몸이 반응한 지난 새벽, 몸이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닿고 싶다. 이 '불편한 책'이 매번 자신을 의심하고 해명하려고 노력해왔던, 그러나 생각하고 말하고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당신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자신을 이해해줄 곳 없어 혼자 뒤척이며 긴 밤을 보낼 때, “네가 예민한 게 아니라 그들이 무심하고 게으른 거야”라고 말해주는 새벽녘 한 통의 통화이길 바란다. 너의 절망이 문을 닫으려는 시간에, 너의 것보다 더욱 캄캄한 절망 혹은 희망으로 문을 두드리고 싶다.(8-9쪽)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이고, 다만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것뿐이다. 점점 죽어가는 몸, 영원할 수 없는 관계, 불확실한 삶에서 어쩌면 눈물은 필수다. 독방에서 울 것인가, 광야에서 울 것인가. 어디에서든 울어야 한다면 나는 광야를 선택할 것이다. 적어도 나처럼 울고 있는 누군가가 보이는 곳에서 함께 울고 싶다. 그때 나는 인간이, 내 존재가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니까.(296쪽)
《불구의 삶 사랑의 말》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양효실 지음 | 현실문화 펴냄 | 2017년 4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부수는, 사랑의 말
‘어른’은 흔히 말하는 정상의 세계에서 보통의 사람들처럼 대개의 사람들이 거치는 과정을 거쳐 성장하여 밥벌이를 하며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시스템에 복무하는 것으로 자신의 안위를 확보하려 하지만, 언제나 위태롭다. 뒤쳐져도, 정상의 범위를 넘어서도, 자칫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거세당하는 시스템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양효실은 시스템으로부터 거부당한 존재들인 비행 청소년,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불행하고 비루한 자들과 함께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시스템이 규정한 그들 존재에 관한 통념의 습속을 뒤집는다. 예를 들어 ‘비행 청소년’은 “따듯하고 무사한 현실이란 베일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버리거나 삐죽 얼굴을 내미는 이중국자”로 새롭게 정의된다. 이들 ‘비정상’의 사람들이야말로 시를 제대로 읽고 마음껏 노래하고 힘껏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추락해야 한다. “더 철저히 추락하고 비천해지지 않으면 폭력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하다.”
어른이 되어버린 이의 슬픔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도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했다. 그제서야 실비아 플라스, 최승자, 김언희, 장 주네, 다자이 오사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도덕은 인간을 망가뜨린다. 단순히 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된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늙어버린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 어른은 도덕적 판단을 하느라 세계를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들은 자신의 미숙함을 ‘남성적’ 언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은폐한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자신은 틀릴 수가 없다는 듯,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듯. 어른들은 아이들의 입을 막은 채 그들에게 자신들의 두려움과 분노, 원한을 덮어씌운다.(22쪽)
사랑은 먼저 내려가고 그 다음에 올라가는 길이다. 환상이 환멸이 되는 길을, 올라가려다 추락하는 길을 거꾸로 밟아가는 중에 사랑은 기이한 긍정의 방법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사랑은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서 함께 밝은 곳을 찾거나 더 어두운 곳으로 함께 내려가는 용기다. 그러니 누군가가 어둡고 축축하고 더럽고 악취뿐인 세상에 있는 게 마음이 쓰인다면,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먼저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당신은 당신의 것을 잃거나 그들과 나눠야 한다. 아니면 그들의 것을 당신이 좀 얻거나. 그래야 당신이 올라올 때 그들도 함께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52쪽)
《바깥은 여름》
김애란 소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017년 6월
올해의 소설
김애란은 삶의 비애를 이토록 다정하게 풀어놓는다. 김애란은 사람의 ‘안’을 세심히 관찰하고, 경계의 ‘밖’에 거하는 타인의 안부를 묻는다. 그의 서사에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의 낯선 모습과 잘 알지 못한다고 여겼던 이의 각별한 모습이 교차한다.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멈칫한다. 웃거나 운다.
마지막 단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명지는 제자를 구하다 죽은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사촌언니가 있는 에든버러로 떠난다. 명지는 그곳에서 유령처럼 떠돌다 혼자 남겨진 공간에서 아이폰의 시리와 대화한다. 자신의 존재마저 해명할 수 없는 시리에게 인간에 대해, 고통에 대해,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묻는다. 시리는 ‘멍청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답한다. 슬프다는 명지의 말에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라고 답하고, 심지어 명지의 침묵에 호응하여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라고 되묻는다. 자신을 세상에 남겨둔 채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러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고, 명지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남편의 마음에 닿는다. 후드득후드득 눈물을 쏟는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266쪽)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좋았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17년 7월
올해의 시집
《슬픔이 없는 심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에 이어 세 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 이르기까지 심보선은 한결같다(아니, 어쩌면 더 단호해진 것도 같다). 타협하지 않고 슬픔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간 후, 슬픔의 표정을 명민한 언어로 기록한다. 그러곤 멸절한 것만 같았던 희망을 상상해낸다. “비록 좋은 시가 어떤 고통을 제거해 주지는 못하지만, 놀라운 것은 공포로부터 아름다움을 분출한다는 것입니다.”(데릭 월콧)
우리 모두 타협 없이 그의 시를 읽어낼 수 있기를.
올해 읽은 시집 중 가장 좋았다.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의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 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마,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펴냄 | 2017년 9월
레인이 있어 다행이다
김신현경이 쓴 ‘작품 해설’의 제목처럼, 이 소설은 실은, 어머니에 대한 서사다. 퀴어 소설이자 어머니의 성장 소설이다. 퀴어 담론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도약한 후에야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확고하고 공고한지 미처 알지 못한다. 타자(퀴어뿐만 아니라 심지어 딸도 타자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신념을 기꺼이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우리는 타자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반복하자. 퀴어뿐만 아니라 딸도 타자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념을, 관습을, 본능을 무너뜨려야 가능하다. 소설 속 딸과 엄마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집이라는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마지막 공간에서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모녀 사이라서 서로를 이해하기 더 힘든지 모른다.
나는 소설이 엄마와 딸의 화해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섣부른 희망은 오히려 절망에 가깝다. 그들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지만 서로의 존엄이 훼손된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나는 너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고 읊조리면서도 그 자리에서 물러날 기색이 없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딸의 곁에, 딸과 엄마 사이에 ‘레인’이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 작가가 레인의 소설도 써주었으면 좋겠다. 작가 김혜진의 이름을 기억해두겠다.
어쩌자고 이 여자는 이렇게 오래 살아 있는 걸까.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91쪽)
왜 남편이나 자식만 가족이 되는 건데? 엄마, 레인은 내 가족이야. 친구가 아니고.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정말 가족처럼 지냈어. 가족이 뭔데? 힘이 되고 곁에 있고 그런 거 아냐? 왜 이건 가족이고 저건 가족이 아닌데? 그 사람들이 한 건 고작 그런 질문을 던진 것뿐이야. 수업 시간에 겨우 그런 말을 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학교가 그 사람들을 쫓아냈어. 한마디 말도 없이 파리 쫓듯 내쫓았다고!(105쪽)
딸애를 되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다.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바꿔놓을 수 없다.(107쪽)
그냥 우리는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고요. 그래, 너희가 여기 있구나, 그렇게 알아주는 것. 저희가 원하는 건 그뿐이에요.(168-169쪽)
《아픔이 길이 되려면》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펴냄 | 2017년 9월
함께 소낙비를 맞는 연구자
질병의 원인에는 원인이 있다. 사회역학은 그것을 추적하는 학문이다. 사회역학자는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질병의 원인’과 ‘질병의 원인의 원인’ 사이에는 그 어떤 불편함이 존재하는 데, 저자는 성실하고도 사려 깊은 언어와 태도로 그것을 거뜬히 물리친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모두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뽑아서 나라도 이 책을 뽑지 않고 싶었으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도무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뽑지 않을 수 없었으니 내가 이 책을 뽑은 이유는 그만 써도 되겠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22쪽)
그물망처럼 얽힌 여러 원인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아프다면, 그 그물망을 만든 거미는 무엇이고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 그물망을 엮어낸 역사와 권력과 정치에 대해 물어야 하고, 좀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질병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고 크리거 교수는 말합니다.(58쪽)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을 하고 자신이 왜 상처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그래서 희망은 항상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진짜에요.(305쪽)
《촛불혁명》
2016 겨울 그리고 2017 봄, 빛으로 쓴 역사
김예슬 지음 | 김재현 외 사진 | 박노해 감수 | 느린걸음 펴냄 | 2017년 10월
내 아이들의 혁명을 위해
김예슬의 귀환이 반갑다. 게다가 선물을 들고 왔다. 2016년과 2017년의 겨울 사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우리 모두를 위한 선물이다. 김예슬 등은 23주간 이어진 촛불혁명의 경과와 현장을 7개의 국면과 45개의 주제로 나눠 촘촘히 기록했다. 기록되는 기억만이 역사가 되고 혁명의 동력이 된다.
이 책은 다음 세대를 위해 만들어졌다. 혁명은 무도한 대통령을 끌어내렸으나 아직 세상은 그대로인 까닭이다. 김예슬은 서문에서 이 책이 촛불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촛불의 아이들이 이 혁명의 기억과 함께 자라날 수 있는 책, 이 아래로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이걸 딛고 나아갈 반석과 같은 책, 그런 바람을 담아 이 책을 지었습니다.(9쪽)
감수를 맡은 박노해는 촛불혁명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은 가치관의 일대 혁신이고 우리 인격의 도야다.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이것을 체험했고 세상에 증명했다.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승리한 혁명의 경험은 공동체의 위대한 자산이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20쪽)
그러니 우리는 각 가정마다 이 책을 소장하여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혁명은 아이들의 세상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니까.
불의한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지.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항쟁, 그리고 그 현장의 진실과 사상을 담은 한 권의 책. 그 기록과 기억이 다음에 오는 혁명의 불꽃이기 때문이지.(박노해, 9쪽)
《사피엔스의 마음》
기만당하지 않고 어떻게 당신을 지킬 것인가
안희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펴냄 | 2017년 11월
안희경의 서사에 주목할 것
부제의 ‘당신’은 이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을 말하는 것인가, 독자로부터 ‘당신’으로 호명되는 타자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사소한 의문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은 다음엔 둘 다 해당되리라 생각했다. 《사피엔스의 마음》은 ‘나’와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 ‘나’가 배제되어도 안 되고 ‘당신’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책이다.
시대정신은 결국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한 사람의 마음과 한 사람의 마음이 연결되기 시작할 때 시작된다. 언뜻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한 사람을 옭아매고 길들이며 격리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차단한다(오직 가상의 공간에서만 연결될 뿐이다). 각자도생의 세계관은 이로부터 유래하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에도 안희경은 질문을 들고 현자들을 찾는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이 책을 읽던 무렵은 몸과 마음이 무너지던 시간들이었다. 특히 로버트 트리버스의 통찰이 도움이 되었다. 기만은 타인을 속이는 것이고, 자기기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사회의 시스템은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기만하고, 기만하게 하고, 기만하는 자들과 기만당하는 자들 모두가 자기기만에 이르게 한다. 트리버스는 말한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반드시 잠시 멈춘다. 다른 모든 일을 멈추고 인터넷도 끄고 그 일에 관한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고 명상을 한다. 나를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더 침착해지고 타인에게 덜 냉정하도록 기도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으로 잠시 구원에 이르렀다.
《사피엔스의 마음》은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2013), 《문명, 그 길을 묻다》 (2015)에 이어지는 ‘세계 지성들과의 인터뷰 3부작’의 완결판이라고 한다. 나는 거기에 두 권의 책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2014)와 《어크로스 페미니즘》(2017). 이 두 책은 모두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이 다섯 권의 책 사이를, 그 책들 사이의 시간과 공간을 유영하는 안희경을 주목한다.
안희경의 여정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 그 오랜 여정이 마침내 마음의 문제까지 도달한 것은, 뭔가 극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안희경의 서사가 궁금하다.
‘다수의 약자들은 왜 강자를 위한 선택을 할까?’라는 물음을 떨칠 수 없었다. 답은 ‘내 마음을 흔드는 힘의 실체를 살피지 못해서가 아닐까’로 모아졌다. ‘나’의 뜻, ‘나’의 이익을 알아차리는 힘을 기를 수 있다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리라 여긴다. ‘나’의 삶이 가능한 조건을 보다 깊이 살핀다면 ‘나’는 세상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보살핌을 받는 존재라는 자각도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나’의 안녕을 위해 지구 전체가 안녕해야 한다는 각성은 공존의 미래를 건설하는 진전이리라.(6쪽)
《웅크린 말들》
말해지지 않은 말들의 한恨국어사전
이문영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 2017년 11월
올해의 책을 한 권만 뽑아야 한다면 바로 이 책
이문영은 세상의 슬픔에 속박당한 자다. 그리하여 그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기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멈춰야 했다. 울어야 했다. 이 책을 소개하는 마땅한 글을 쓴다는 것은 부질없다. 이문영의 서문과 조세희의 추천사로 족하다.
두 세계를 구성하는 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한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임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한恨국어가 된다. 한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한恨국에 산다.(7쪽)
‘난쏘공’의 난장이들이 자기 시대에 다 죽지 못하고 그때 그 모습으로 이문영의 글에 살고 있다.(조세희의 추천사)
세월호를 삼킨 맹렬한 물살이 신발을 해체하며 지산면으로 몰아붙였을 것이었다. 파도에 찢기고 갉아먹힌 시간의 공포가 신발의 형상에 압축돼 있었다. 너덜너덜한 신발이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을 사진으로 찍은 듯했다.(416-417쪽)
《너는 너로 살고 있니》
김숨 편지소설
김숨 지음 | 임수진 그림 | 마음산책 펴냄 | 2017년 12월
‘여인’과 ‘나’와 ‘노인’은 모두 나 혹은 당신
2017년 마지막으로 구입하고 2018년 첫 번째로 읽은 책. 덕분에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렸다.
십오 년간 연극을 했던 ‘나’는 무대에서 발작을 일으킨 후 연극계에서 퇴출당한다. ‘나’는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경주에 와서 식물인간이 된 여인의 간병인으로 일한다. 둘은 같은 나이다. ‘나’는 ‘여인’을 돌보며 자신의 결여와 결핍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결여와 결핍으로 여인에게, 그러나 그에게 결코 닿을 수 없는 편지를 쓴다.
교통사고로 몸이 부서져 걸음마부터 다시 익히는 노인이 있다. 그는 한때 경주를 대표하는 유도선수였다. 노인은 재활실에서, 그리고 무구한 세월을 견뎌낸 오랜 무덤이 풍경으로 자리 잡은 잔디밭에서 걸음마를 연습한다. 한 발짝, 한 발짝, 노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호흡을 고른다. 마른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내린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진다. 그러나 노인은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고스란히 버티고 서 있다.
‘나’는 “무대로 걸어 나가는 심정으로” 노인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나’는 노인에게 손을 내민다. 손이 닿으려면 한 발짝 더 내디뎌야 한다. 그 순간 ‘나’는 노인이 어쩌면 자신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십일 년째 잠들어 있는 여인과 ‘나’는, 그리고 ‘나’와 걸음마를 연습하는 ‘노인’은, 어쩌면 모두 나였다. ‘나’가 ‘노인’의 슬픔을 곡진히 위무하는 것처럼, 이 소설은 내게로 한 발짝 더 다가와 곁을 지켜주었다.
‘마음에서, 또다시 마음으로 가리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것은, 파도에서 파도로 가는 것만큼 아슬아슬하고 황홀한 일입니다.(39쪽)
‘우리가 삶을 믿으면 삶은 보다 높은 삶으로 보답한다.’ 그 문장을 나는 어디서 읽었을까요. 삶도 계단처럼 단계가 있는 걸까요. 그런데 높다는 건 뭘까요. 높은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낮은 삶 또한. 오직 삶만이 있는 게 아닐까요.(122-123쪽)
그리고 2017년 나의 저자
김숨
2016년의 김숨은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2017년의 김숨은 또 달라진 느낌이다.
2016년 이전의 그는 존재의 내면을 촘촘히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재구성된 존재의 내면은 거대한 도시 같았다. 온갖 것들의 환상들이, 질서와 무질서가 오래도록 감춰놓았던 감정들로 고요히 흘렀다. 그의 탁월함은 집요하다고 해야 할 성실함이었다.
2016년의 그는 진실의 수행자처럼 보였다. 나는 《L의 운동화》를 읽고 “김숨의 문제는 고요하되 단단하다. 절제된 문장들은 바지런하고 성실하다. 간혹 몸의 언어처럼 보이는 것은, 서사를 밀고 나가는 힘 때문이다. 진실의 수행자로서, 김숨은 독보적이다”라고 썼다(http://soli0211.tistory.com/584).
2017년의 김숨은 지금 여기에 돌출된 문제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2016년 이전의 김숨’과 닮았지만, 현실을 에두르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타자들에게 맞선다는 점에서(“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당신의 신>) 조금 더 강고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 강고함은 여성의 것이다. 보듬고 품고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의 강고함.
수백 년 전에 내가 낳은, 혹은 수백 년 뒤에 내가 낳을 아이가 아닐까 하는.
수백 년 뒤에 내가 낳을 아이가 지금 걸음마를 떼려 하고 있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더. (《너는 너로 살고 있는》, 271쪽)
2018년의 김숨을 기대하는 것은 독자로서의 마땅한 의무다.
+
존 버거
2017년 출판계는 송인서적의 부도 소식으로 시작하였다. 내가 속한 출판사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들의 힘겨운 모습을 보며 가슴이 많이 아팠다. 가치에 물성을 입혀 펴내나 정작 자신들은 그 가치를 구현해내지 못하는, 생존에 급급해 연대를 상실한 출판의 현실을 보며 자괴감이 들었다. 독자로서의 슬픔은 존 버거의 부고 소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월 2일 월요일, 그의 부고를 들었다. 나는 그가 없는 세상이 벌써부터 막막해졌다. 연대가 무망한 세상에서 오랜 우정마저 잃은 느낌이랄까. 내게 2017년은 존 버거를 다시 읽는 시간이었다.
존 버거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였다. 그림과 사진의 예술 영역에서부터 사회와 정치 분야까지 아우르는 비평가로 활약했다. 무엇보다 그는 고통받은 존재들과 연대하는 예술가였다. 미학과 품위의 명분 속에 감춰진 권력의 욕망을 폭로하며 고통받은 존재들이 잊히기 않기를 바랐다.
세계화의 위기는 정작 존재들을 그 시스템 속에 가둬버린다는 점에 있다. 그는 끊임없이 시스템에 저항했다. 그리고 갇히지 않은 존재들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싸웠다. 그가 우리에게 당부한 것은 ‘가냘픈 희망’이다.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여러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냘픈 희망이지요. 하지만 살찐 희망은 헛소리입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한국어판 서문)
존 버거의 단 한 권의 책을 꼽는 것은 섣부르다. 존 버거는 오직 존 버거라는 이유로 그의 어떤 책이라도 소중하다. 다만 이번에는 그의 오랜 친구 장 모르가 담아낸 존 버거의 초상을 선택하겠다. 이 책의 부제는 ‘장 모르가 찍은 오십 년 우정의 풍경’이다. 당신의 우정에 깊이 감사한다. 안녕, 존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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