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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예지를 씻기면서

퇴근하고 돌아와서 나의 역할은 보통, 아이들과 한바탕 놀기와 아이들 씻기는 일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씻기기 시작하면 아내는 청소를 하고 잘 준비를 한다. 아내가 인정하는 바, 청소는 내가 더 잘한다. 아이들 씻기는 일은 아내가 더 잘한다. 솔직히 난 대충 씻긴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내가 씻기는 이유는, 아내가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좀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종일 밖에서 보낸 아빠는 아이들과의 스킨십이 절실한 까닭이다. 여섯 살 예지를 씻기면서, 언제까지 이 아이를 씻기는 이 호사스런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종종 생각했다. 아이는 어린이가 되고 소녀로 자란다. 조금 있으면 아빠랑 목욕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겠지, 그런 상상을 하면 서글펐다. 다 씻은 후에 예지의 머리를 드라이한다. 이 때..

霓至園_/rainbow_ 2012.12.01

장 지글러,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갈라파고스, 2012)

"기아 문제를 다룬 저자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결정판." 출판사 카피가 맞다. 허나 그 담론의 아우라는 첫 번째 책에 미치지 못한다. 후속작으로 갈수록 보다 정교해졌고 풍부한 자료와 사례로 구체화되었으나, 그만큼 독자의 수요는 줄어들 것이다. 아마 이 책은 그의 전작들에 비해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단지 판촉 측면에서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늘 이런 책들의 진정한 가치는 무관심한 대중을 우리의 편으로 만드는 것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수 지성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으나, 그들은 더디다. 너무 더디다. 그들은 변화되기에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글러의 책을 계속 번역해 왔던 양영란 씨의 글 속에 있다. "지글러는, 이제까지 ..

view_/책_ 2012.11.29

"잡설" 북콘서트 후기

"잡설" 북콘서트 후기 1. 한종호 대표님이 "난장"(亂場)이란 표현으로 여셨다. 진짜 그러했다(사족이지만 한종호 대표님이 모 잡지에서 쫓겨나신 것은, 나같은 독자에게 한마디로 "대박"이다!). 2. 이지상 님의 노래는 저번 송강호 북콘서트 이후 두 번째 듣는다. 마지막 곡 "탄탄오와 문정현"은 마음을 소란케, 심장을 요동케 했다. "탄탄오는 밀라이 사람. 슬픔을 슬픔으로 엮는 시인.""문정현은 길 위의 신부. 슬픔의 중심만을 걷는 사제." 그리고 후렴구는 이러했다. "평화는 평화 살게 놔두라고. 구럼비 발파가 대추리의 함성으로, 강정의 외침이 용산의 비명으로 하늘까지 닿는 죄악은 만대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네 지울 수 없다네. 평화는 평화로 살게 놔두라." 3. 김민웅 교수님은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view_/책_ 2012.11.28

순일의 마음

백수되면 내 사치품들을 내다 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가난하게 살아야 할테니까. 모짜르트와 베토벤, DG111 전집도, 박스채 놓인 책들도, 아이패드도, 카메라며 렌즈도... 그런데 아내가 며칠 전부터 무언가 만든다. 형체를 그리고 짓는 사이, 어느새 나의 닉네임도 그 위에 반듯하게 새겨져 있다. 그래, 카메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겠다. 아내 순일의 마음, 그 깊이와 넓이는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다.

霓至園_/soon_ 2012.11.22

가을의 마지막 날

가장 순수했던 자리에 함께했던 벗과의 점심 식사부터, 나의 밥벌이부터 걱정하며 마음 한 자락까지 세심히 챙겨주시는 '거래처' 분들과 작별하며 보낸 오후를 지나, '이곳'에서 함께 고민하며 치열하게 일했던, 그러나 다들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오랜 동료들과의 저녁 뒷풀이까지 하루가 길고도 깊었다. 마음은 이제 겨울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 그래, 오늘이 가을 마지막 날인거다.

窓_ 201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