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화이트데이', 순일에게…
오래 전,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부르심'을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단다.
가슴을 온통 그분을 향한, 그분으로 인한 설렘과 소망으로 채우던 고요한 열정….
성경 한 모퉁이 눈물과 함께 적어놓았던 "Live in Truth", 그리고 가슴에 조아리던 기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잠 못 이루는 밤마다 꺼내어 마주하는 그 다짐과 기도, 소망들이 있다.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는 것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언저리를
찾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때로 그 기억해내는 것에의 곤고함에 너무 아프기도 하고 지치기도 한다.
"Live in Truth"
진리란 무엇일까. 나의 삶 속에 부여잡아야할 진실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향해 살아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파머J.파커는 이렇게 말한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그리고 이렇게 조언한다.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아라(Let your life speak).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현재 나의 고민은 여기까지 와 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나의 구원을 담보하는 믿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순종과 받아들임, 그분의 요구에 대한 정서적, 의지적, 지적 받아들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그분께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 여기에서 믿음은 시작된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분의 뜻은 삶의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 ‘모호함’ 속에 있음을 본다. 늘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모호함 속에 믿음으로 뛰어드는 것을 믿음으로 정의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계산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욥은 그의 삶을 휩싸고 있는 고통 속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를 위해, 난 믿음을 위한 훈련을 먼저 해야 한다.
어떤 계획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내 삶의 소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구원을 담보하는 믿음을 위해서.
둘째, 나는 하나님께 ‘정직’해야 했다.
성경에서 ‘진실’은 ‘정직함’을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은 진실하시다. 고로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을 향한 우리의 모든 고백도 진실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을 인한 진리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이 부분에 관한 오래 고민들이 있었고, 그 고민들을 제럴드 싯처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럴드 싯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놀라운 자유가 생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 미래에 대해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앞으로, 내가 원하는 곳’에서의 삶을 향한 계획마저도 일단은 내려놓아야 한다. 여기에서 다시 첫째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그분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그 온전한 믿음에 최소한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면, 이제 그분을 향한 우리의 고백을 정직하게 아뢸 수 있다. 시편 37은 이렇게 도전한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의 소원 가운데 두고 일하신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정직한 소원을 기뻐하신다.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 원하신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길 기뻐하신다!
셋째, 우리의 소원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간직해왔던 소망이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 유학 가는 것. 사역자가 되는 것.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그런데, 때로 이러한 소원들이 왜곡되기도 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소원 대신, 교수가 되는 조건을 따지는 것.
유학을 가는 것에도, 교수가 되는 조건에 맞춰 계산하는 것.
사역자가 되는 본질적인 소망을 저버린 채, 사역의 본질을 목회자의 울타리로 제한하는 것.
아름다운 사람을 향한 사랑을, 세상의 조건들에 대한 두려움에 움추려 드는 것.
이렇게 왜곡되어진 나의 정직한 소원들에 대해, 이제 다시 건강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교수가 안되어도 좋다. 목회자가 안되어도 좋다.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그러나 나의 소원, 내 마음이, 내 ‘속사람’이 정말로 기뻐하는 소원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분께 열심히 아뢸 것이다. 그분을 기뻐하는 나의 믿음 속에서 나의 소원이 다시 다듬어지리라 기대한다. 로렌 커닝헴이 말했듯이, 우리가 가능한 것을 하면 그분은 불가능한 것을 이루실 것이다.
현재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듯이, 지금부터의 불가능도 그분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고백되어지길 기대한다.
넷째,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해 나의 고민은 여기까지 왔다. 더 이상 진전이 안돼는 것은 아마, 첫째 출발점에 아직 서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아마 가능한 여러 가지 일이 있을 것이다.
새벽기도를 나가고, 등록하고 봉사할 교회를 찾고, 영어학원을 다니고… 등등.
그러나 첫째 출발점에 서지 않은 채 세워지는 계획들의 공허감을 알고 있기에 서두르고 싶지 않다.
첫째 출발점에 설 수 있다면, 그래서 온전한 믿음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하고 싶다.
‘내 삶의 가장 큰 기쁨 ’ 순일에게…
순일이가 걱정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기대하는 것…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힘겨움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곤고함을 나눈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경험한다.
그러나 노력하고 있단다.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 고백하는 나의 정직한 소원, 순일은 나의 첫 번째 소원이다.
장황한 편지 속에 결국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들을 말해주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난 언젠가 순일과 함께 만들어갈 아름다운 행복을 그려보며 기뻐한다. 그 기쁨을 헤아리는 것이 오늘의 힘겨움에 위로가 된다.
나의 소원을, 순일의 소원을 ‘함께’ 이루고 싶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가정을 순일과 함께 이루고 싶다.
아직 가야할 길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지만, 함께 묵묵히 그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다다를,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우리의 소원이 아름답게 펼쳐지리니.
사랑해.
2004.3.14 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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