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곳에서 살아내야 할 진리, 그것을 가르쳐주신 교수님께"를 포스팅하면서, 역시 오래된 편지 하나를 찾아서 올립니다. 요한 형제가 유학 떠나기 전에 형제에게 썼던 편지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섣부른, 서툰 조언들이 부끄럽습니다만, 그래도 서두의 "신학함"에 대한 저의 해석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이 글을 블로그에 옮겨놓습니다.
요한 형제,
제가 모셨던 스승께서는 신학의 모티브는 ‘저항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다분히 유대 신학의 '파토스' 개념에서 비롯한 접근이었지만, 나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신학을 하나님, 또는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라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삶, 또는 그것을 살아가는 그 자체를 통해 구현되는 까닭입니다(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라 정의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정의한 영성 신학 부분을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신학은, 아담 이후 타락한 세상과 사람들의 온갖 위선과 불의에 맞설 것을 요구하는 까닭입니다(하나님, 혹은 예언자들이 가졌던 파토스는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깊은 인식을 갖고자 한다면, 아브라함 헤셀의 <예언자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학에 대한 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신학에 대한 근거 없는 신화들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신화라 함은, 신학을 마치 어떤 성직을 위한 어떤 영적 부르심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런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결코 신학을 하기 위한 보편적 전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어떤 특별한 성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라는 직업이 성직이긴 하지만, 성직이 곧 목회자일 수는 없습니다. 숱한 성직 중의 하나이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모든 직업이 성직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떤 영적 소통의 방법으로만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다 보편적 소통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내적 확신, 공동체의 권면, 친밀한 동료들을 통한 제안, 환경의 변화 등뿐만 아니라, 합리적 추론, 냉철한 판단 등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소통이 우선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건강해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왜곡되지 않도록 해석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특별한 영적 부르심에 집착할 수록, 하나님의 뜻을 왜곡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요한 형제가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진대, 너무 서두가 길었습니다. 요한 형제가 질문한 것에 대해 간단하게, 저의 의견을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저는 형제가 꿈꾸는 비전을 위해, 신학 공부를 꼭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들이 차별 받지 않는 사회를 위해서도, 그들이 아무런 차별 없이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서, 신학은 형제에게 어떤 출발점, 전제를 굳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과정에서 흔들릴 수 있는 가치들에 대한 확신을 지켜줄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신학 공부는 제대로 해야 합니다. 가능한 제대권 내의 신학 공부를 하시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지만, 제도권 내의 신학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신학에 대한 극복해야 할 신화적 기대감들이, 유독 신학교 내에, 목회자들 사이에 팽배한 까닭입니다. 신학이 마치 목회자란 라이센스를 따내기 위한 과정으로 머무르지 않도록 무던히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신학대학원의 학문적 수준은 너무 떨어집니다(M.div). 그 과정 속에서 공부하더라도, 홀로 싸워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신학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형제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나서야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영어 전공을 하셨다고 했는데, 그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셨나요? 신학 공부를 하더라도, 딱 그 정도의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볼 때, 신학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보편적 소명에 근거합니다(스텐리 그랜츠의 <신학으로의 초대>에 잘 나와있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형제가 신학 공부를 정말 하고 싶은가 입니다. 신학 공부를 할 때,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 즐겁다면, 가능한 빨리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현재 요한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현실 판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학에 대한 소명, 그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확인하셨다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은 현실 판단입니다. 요한 형제가 지금 학부생이 아닌 어떤 직업을 가진 학사이기 때문에, 직장에서의 문제, 가정에서의 문제, 재정적인 문제 등을 고려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이 부분은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주님께 물어보셔야 하지만, 결정은 언제나 형제의 몫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형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요한 형제와 언제나 함께 합니다. 물론 요한 형제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전제 안에서이지만(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답장이 너무 늦었습니다. 사실 쓰고 나서도 만족스럽지 않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나서 나눌 이야기가 더 많을 듯 합니다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요.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해요. 그리고 요한 형제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2008.6.12(목)
김진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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