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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곳에서 살아내야 할 진리, 그것을 가르쳐주신 교수님께(IVP 북뉴스 2006년 7-8월호)

Soli_ 2006. 6. 19. 22:52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IVP 북뉴스에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북뉴스는 사실 정체성이 모호했다. 자사 책을 소개하는 안내지이면서도 서평지의 역할을 일부 갖고 있었고, 나는 IVP 책을 중심으로 하되 다른 출판사 책을 일부 포함하여 소개하는 방식으로 썼다. 아무래도 IVP 책의 비중을 신경 쓸 수 밖에 없었고, 이 글 이후 연재를 그만 두었다(이후로 두 번 더 썼으나 IVP 30주년을 정리하는 글이었으므로, 원래 연재와는 다른 글로 생각했다. 연재를 그만 둔 이유는, IVP 북뉴스라는 매체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아무튼, 난 이 글을 연재의 결론으로 썼다. 그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본다. 글의 요지는, 신학을 그만 두고 문서사역을 선택한 나의 '변'이었다. 나에게 그토록 신학자의 길, 목회자의 길을 권면하셨던 은사님께 드리는 글이었고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지금도 유효한지, 난 지금 다시 묻고 있는 거다. 2012/12/14 




IVP 북뉴스(20067-8월호)_booker의 책 읽기 



오늘 이곳에서 살아내야 할 진리

그것을 가르쳐주신 교수님께 



올해 스승의 날에는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바쁘기도 했지만, 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은 이번에도 교수님이 원하는 바를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학, 그리고 사역에의 부름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교수님께, 지금의 제 모습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런 교수님을 만날 때마다, ‘목회자는 사역자이어야 하지만 사역자가 곧 목회자일 수는 없다’는 논리를 준비하고는 했었지만, 그 논리 속에 미처 준비되지 못한 저의 진정성은 늘 교수님과의 만남을 어렵고 힘든 일로 만들었습니다. 교수님을 뵐 때마다 들어야 했던 질책과 권면은 어느덧 제 가슴에도 그렇게 안타까움으로 맺혀있습니다. 


교수님과의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은, 아브라함 혜셀의 『예언자들(삼인)이라는 책에서부터였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슴의 열망이 미처 무엇으로 풀어내야 할지를 몰라 헤매고 있을 때,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마, 그때 교수님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전 지금쯤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나실지 모르지만, 아직 채 가시지 않는 겨우내 한기가 가득했던 강의실에서 교수님을 만난 것은 지난 95년 3월의 이른 봄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날 교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언급하시면서 격정적인 몸짓과 목소리로 불의한 세상, 무기력한 교회, 그리고 온갖 비겁함으로 세상 속에 함몰되어가던 우리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patos, 정념)를 교수님을 통해 보았습니다. 제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수업 후 찾아간 저에게 교수님은 혜셀을 권하셨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유대 신학자로 불리는 혜셀은, 그 자신이 속했던 시대의 불의에 맞서 싸웠던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이현주 목사에 의하면 그는, 고대의 예언자들을 연구하다가 당대의 예언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현존하는 오늘의 불의에 맞선 하나님의 파토스였습니다. 혜셀은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파토스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속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인간을 강력하게 휘어잡는 격정’이며 세상과 인간을 향한 ‘살아 움직이는 돌봄’으로 ‘뜨겁게 세상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는 예언자들을 통해, 때로는 강력하고 격정적인 분노로, 동시에 깊고 깊은 긍휼로 백성에게 호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언은 중지되었지만 예언자들은 살아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상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혜셀의 단호한 외침에 사로잡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교수님을 통해 충격적으로 마주했던 하나님의 파토스는, 이 책을 통해 저를 사로 잡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교수님을 멘토로 섬기기 시작했었습니다(절판되었던 이 책이 최근 삼인에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다행히 유려한 이현주의 번역 그대로 살아 났습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내내 그렇게 뜨겁게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만나던, 교수님을 만나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 배운 것은 신학이었고, 그것은 곧 삶의 자세이자 의지였습니다. 교수님이 종종 신학에의 입문서로 사용하기를 좋아하시는 스텐리 그랜츠와 로저 올슨이 쓴 신학에로의 초대(IVP)가 신학의 첫걸음을 내딨던 제게도 아주 유용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곧 신학자임을 지적하는 이 책은,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무의식적이며 무비판적으로 품고 있는 신앙적 생각을 의식적이며 겸손하게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책의 7장에서 소개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통합적 주제(integrative motif)를 활용하여 전개하는 방법은 신학을 삶에 접목시킬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용했습니다. 신학은 곧 삶이 시작되는 곳이었고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신학은 ‘나’의 존재를 하나님 안에서 규정 짓는 작업이며 매력적인 학문에의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꿈꿔왔던 것은 사역자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수님을 떠난 지금도 신학은 제 삶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청교도 신학자였던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에의 가르침”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오늘 우리가 속해있는 시대 속에서의 적실성을 근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눈에 띄는, 최근 정체되어있던 세계관 논의에 진일보한 의미 있는 저작이 번역되었는데, 낸시 피어스가 쓴 『완전한 진리(복있는사람)라는 책입니다. 개혁주의적 세계관 논의의 정점에서, 독선적이지 않은 언어로 그간의 논의를 통합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관념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영성과 참된 제자도로 모든 논의를 귀결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매우 돋보입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소명의 문제를 화두로 던집니다. ‘그리스도인은 각 시대마다 성경의 영원한 진리를 참신한 방식으로 전파할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진리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에서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제가 깊이 심취된 또 다른 작가가 있습니다. 시인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며, 문명 비평가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라는 작가입니다. 국내에는 소설 포트 윌리엄의 이발사(산해)를 비롯해 희망의 뿌리(산해), 나에게는 컴퓨터는 필요 없다(양문), 생활의 조건(산해),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 등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가 웬델 베리에게서 받는 깊은 감동은, 진리를 살아내는 단호함입니다. 그는 온갖 문명의 이기와 구조적 악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면서도, 그가 발견한 진리, 주어진 소명에 대하여 책임감 있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삶은 기적이다는 그 중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입니다. 이 책은 환원주의적 과학주의 세계관에 관한 이슈를 제기함으로 인문학 부분의 베스트셀러가 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에 대한 반박서입니다. 이 책에는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신은 환원주의적 자연과학이 지향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모아서 입증 가능한 법칙과 원리들로 압축시키는 조직화되고 체계적인 작업’을 근거로 한 윌슨의 세계관이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까지 다다릅니다. 그러나 웬델 베리는, 이러한 윌슨의 시도를 통렬하게 반박합니다. 사실 이 책은, 단순히 윌슨의 책만을 상대로 반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입니다. 웬델 베리가 강조했듯이, 우리는 ‘신비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세계와 또 우리 삶이 지니고 있는 ‘알 수 없음’, 신비의 영역을 지키는 데 무척이나 강경합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제가 지켜내야 할 소명은 무엇인지를 내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 지금 저의 고민들은 아마도, 교수님과의 첫 만남 이래도 계속된 것들일 것입니다. 신학과 소명의 문제 말입니다. 사역자로 살아가는 것, 바로 삶의 문제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교수님께서 제게 던지신 오래된 과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수님을 떠난 후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교수님의 강경한 질책에 가슴이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제 손을, 어깨를 감싸며, 내가 너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라고 말씀하시던 교수님의 마음을 애써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교수님은 지금도 제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시지요? 신학을, 제도권 교육의 테두리 내에서 계속하기를, 그래서 학위를 받아내기를 원하시겠죠. 하지만 교수님, 지금 전 비록 목회자도 아니고 학교에서 신학공부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또 부족하지만, 그때 주셨던 가르침을 지금도 살아내고 있음을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뜨거운 눈물과 강렬한 열망을 가졌던 그때, 교수님의 가르침에 굳게 다짐했던 사역자로의 삶,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지금 이곳에서 제가 가진 진리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말입니다. 

교수님과 함께 읽었던 또 하나의 책, 소명」(IVP)에서 저자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교수님, 제가 언젠가 다시 신학 공부를 위해 학교를 다니고, 또 언젠가 다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저에게 주어진 소명, 그 소명을 살아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것이라고. 소명은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라고. 그것은 진리를 오늘 이곳에서 살아내는 문제일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수님께서 제가 주셨던 가장 귀한 가르침이었다고. 

교수님이 종종, 가슴 깊이 그립습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결혼식 주례를 해주시던 김은호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