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_

존재의 이유

Soli_ 2001. 1. 5. 21:21

"존재의 이유" 
에스더 4:1-17



나.의.인.식.은.무.엇.에.근.거.하.고.있.는.가.?

신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계획들과 희망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청년회의 예배 가운데 설교자로 이 자리에 서면서 내가 결국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질문 한가지는 "우리의 인식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헨리나우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인식(view or vision)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해준다."라고 하였다. 

무엇에 근거하여 나의 계획들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신앙하고 있으며, 세상을 향해 그리고 우리 주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나는 믿음에 근거하여 인식한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은 실상, 그 말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일 경우일 때가 많다.)

이러한 질문은 어쩌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라는 믿음의 소유 여부 이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아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까지도) 사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그들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에서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에.스.더.에.게.당.면.한.도.전

억압받는 민족의 가난한 소녀이었던, 에스더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결국 왕후가 되고 에스더와 그의 사촌 모르드개는 총리로 등장한 하만과 대립하게 된다. 하만의 총리 행차 때 무릎 끓고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만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악한 마음을 품게 된다.(에스더 3:5-6) 하만은 왕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유대인들을 죽일 거사를 계획하고 이를 알아챈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통해 이 위기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된다. 오늘 본문이 있기까지의 과정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스더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에스더의 고백, "죽으면 죽으리로다"라는 고백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진정으로 우리가 우리의 '생명'(우리가 가진 모든 것, identity)을 걸어야할 오직 한가지 부르심을 말해준다. 

모르드개는 내시 하닥을 통애 에스더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또 유대인들을 진멸하려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8)

오직 너만이 민족을 구할 수 있다. 모르드개는 비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그러나 그는 상황과 현실 속에서,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그 비전을 포기하고 만다.(11) 이는 에스더만의 연약함이 아닌 우리 모든 인간의 연약함이 아닐까?

때로 몇몇 앞서나가는 리더들의 고충을 바라보고는 한다. 해야하는 당위성,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읽어내면서도 자꾸만 머뭇거리는 이들의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의욕을 잃어가는 리더들의 고충. 청년회도 마찬가지이다. 현실과 그들이 처한 상황 가운데 그들에게 비전을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회피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가? 

에스더가 그렇게 머뭇거리면서 마침내 모르드개의 제안을 거절할 때… 모르드개는 다시한번 도전한다. 14절의 말씀이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집은 멸망하리니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는냐

세가지를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정체성,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 

첫 번째, 유대인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이름만으로도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자이다. 모르드개가 강조하는 한가지는 만약 에스더가 그 소명을 저버릴 때, "오직 그 승리에 소외되는 것은 너 자신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더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승리하실 것이다. 승리에 대한 믿음이 모르드개에게는 있었다. 그 믿음은 유대인이라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직시할 때 가능한 것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그의 정체성에 목숨을 걸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은 '우연'이라는 상황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아닌 이방인들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잊을 때가 되었다. 
때로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하나님 없이도 잘풀리는 나의 삶이(또는 어떤 이의 삶이) 그것을 확증하는 것만 같다. 그러한 우리들의 삶은 우리의 신앙을 인식의 영역에만 머무르게 하고 만다. 그러할 때, 오늘 말씀의 도전은 의미심장하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헌신을 필요로 하느냐, 필요로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승리에,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할 수 있는가의 선택여부인 것이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르심,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두번째,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 앞에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매우 중요한 기로에 놓여있음을 또한 깨달아야 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과 승리에 내가 함께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대인의 정체성을 놓고 도전한다. 그리고, 에스더의 응답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집은 멸망하리니 (14)

유대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것이 그들이 갖는 유일무이한 자부심이요, 그들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때로 선민의식이라는 잘못된 개념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갖는 그들 정체성의 근거는 확고부동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매우 가치있는 발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지금 세상에서 어떤 형편과 상황 가운데 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때로 나그네처럼 방황하며, 유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우리는 결국 구원받으며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은 결국 구원받을 것을 이야기한다. 오직 그 구원에 제외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에스더와 그 집이다. 모르드개는 특별한 상황에서의 헌신, 그 이전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승리한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분명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협박 같지만, 사실이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도전한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이야기이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기까지의 과정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에스더서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와 곤고함, 고난에 대한 열쇠는 우리의 현실 가운데 있다. 왜냐면 우리의 현실이 있기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도전한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14)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언제 부흥할 수 있는가? 우리 청년회는 언제나 다시금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민족과 나라의 무너진 수많은 영역들은 언제쯤에야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이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를 분별한 이후 기꺼이 그들의 가진 모든 것들로 그것에 헌신한다. 그렇게 이 땅에 하나님의 부흥은 임한다. 

에스더서의 결말은 어떠한가. 에스더의 고백처럼, 죽으면 죽으리로다… 그는 목숨을 걸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존.재.의.이.유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으로 가능케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내가 단지 세상에서 종교로서, 교회 다니는 것으로 기독교인이라 말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몇몇 믿음 좋은 지체들이 하나님께 받은 꿈들로 인해 고민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고민하다 한때는 목소리 놓여 그것을 위해 기도했지만 결국 가슴속으로 그것에 상처만을 남긴채 감추는 그들의 꿈을 보았다.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 앞에 하나님은 우리의 앞서가는 꿈들에 앞서 너희들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은 바로 너희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신다. 부흥에 앞서, 우리의 아름다운 비전에 앞서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며 그 정체성으로 인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세상은 우리의 비전에 앞서 우리의 신분에 대해 공격한다. 우리는 그것에 먼저 목숨을 걸고 지켜 내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의 수많은 직분들. 그러나 그 이전에 교회 나오는 것에, 예배드리는 것에, 마음을 지켜 예배를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 앞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분 앞에 홀로 걸어나오는 것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수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나서기 이전에 그분 앞에 홀로서는 시간들에 먼저 생명 걸고 지켜야 한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정말 그 존재의 의미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비전은, 청년회의 부흥은 그 다음이다. 

2001.1.5. 신창동교회 청년회


-2004.1.22에 덧붙임. 

언제나 신년 첫 예배 때면 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에스더의 고백, 죽으면 죽으리로다.
그 고백이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가장 먼저 필요하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미래의 비전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계획들에 대한 도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로서의 도전입니다. 
즉 모르드개의 계획이 성공할 것인가 아닌가로서의 도전이 아니라,
에스더의 궁극적 존재의 의미를 확신하는가 확신하지 못한가의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의 자녀로서의 확신과 그 가치를 깊이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나 우리의 출발은 거기에서부터 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단순한 시작이 아닌, 우리의 생명을 거는 '결의'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신창동교회 청년회에서 세 번, 평화교회에서 한 번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지금은 사역을 하지 않는 까닭에, 이 말씀을 꺼내어 내 자신에게 전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것에 '죽으면 죽으리로다'라는 고백을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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