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무장공비침투사건 49일간은 인간의 비참함과 한계에 이른 인간존재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외로움을 너무도 처절히 느끼게끔 해준 시간들이었다. 이를 쉽게 얘기할 수 있을까? 아니, 결코 그렇지 못하리라. 96년 가을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그들과의 전쟁…. 여기에 그 49일간의 일기 중 일부를 옮겨본다.
1996.9.28 십일 일째.
반복되는 짜증….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서로가 비참하기는 별다를바 없다면, 그렇게 말한다면 모순일까? 아무런 상황도 모른채 군장을 꾸리고 실탄을 불출하던 정신없던 첫째 날, 우리는 전쟁이 나는줄만 알았다. 그런 긴장감이 우리를 짓눌렀고 결국 “무장공비“의 상황이 전해져 대관령을 넘어 첫번째 매복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매복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낮에는 수색정찰을 하고 밤에는 매복을 하는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동료가 쏜 K-2 소총 실탄이 옆을 스쳐 지나는 위기도, 새벽에 우리 매복지에서 불과 1km 남짓 떨어진 곳에서 조명탄이 수십발 터지고 총격전의 교전을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던 긴장감. 아침이 되면 온몸에 흠뻑 젖는 새벽이슬을 오늘도 잡지못한 무장공비에 대한 집념과 허탈을 함께 떨쳐버려야 했다.
격려차 나왔다는 목사님의 웃으면서 하시는 얘기는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했다. “한마리 잡아봐?” 한마디? 저들이 비록 무장공비 일지라도 저들의 생명에, 삶에 관한 인식과 가치판단에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人들은 달라야 하지않습니까? 혹 저들 중에 구원받을 영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식기도도 잊은채 밥을 먹던 때가 많았다. 나는 그리스도人인데…. 동료들의 유일한 위안은 저들 무장고비의 목에 달린 포상금. 그 포상금만이 이 일 때문에 휴가도 못간, 전역도 불투명한, 추석도 잊어버린 이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난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가? 난 여기에서 무엇을 기대하여야 하는가?
사살했다는 공비 3명의 시체를 보았다. 한사람은 얼굴 반이 날아가 버렸고, 또 한사람의 주변엔 그의 일부분들로 보이는 손가락이며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그날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토해내 버렸다.
이데올로기. 이미 흘러간 시대의 산물에, 우리는 아직도 그것에 집착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하다가 저들은 죽어간 것이겠지. 우리가 “한 마리”로 표현하는 저들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아무도 판단치 못하리라. 난 오늘밤도 총을 움켜진 채 저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밤을 지샐 것이다.
다만 소원하기는 내가 그리스도人임을 잊지 않기를.
10.2 십오 일째.
참호 밖에는 비가 조용히 산을 적시고 있다. 이곳 강릉 조금 밑에 자리잡은 이 호 뒤에는 민가들이, 왼쪽에는 호수가, 그 호수 뒤로는 멀리 동해의 바닷가가 보이고 나머지 둘레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위엔 온통 밤나무. 가끔씩 동료들의 손에 잡히는 다람쥐는 잠깐이나마 웃을 수 있는 위안거리다.
연이틀 내린 비는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했다. 밤에 갑작스레 쏟아진 비에 서로 언성을 높여야 했고 진흙탕에 이리저리 넘어지며 간신히 호 위로 지붕을 만들며 서로 얼굴을 붉혀야 했으며 때로 멱살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내리던 비가 이제는 부슬비로 바뀌고 그렇게 밤을 내내 지새우던 우린 지쳐있었다. 갈등.
10.17 삼십 일째.
새벽이면 침낭위로 부서지는 서리를 떨치며 일어서는,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인내가 있어야 하긴 하지만 가을은 가을이다. 한 이틀… 먹구름이 뿌린 비를 맞긴 했지만 오늘의 하늘은 그렇게 날 설레이게 만들던 가을의 하늘이다.
모처럼 냇가에서 세면을 했다. 문득 발견한 물가에 비친 얼굴. 무척이나 늙어버린.
이제는 모든 상황에 웬만큼 익숙해져 가슴을 서늘케 하던 한밤의 긴장도, 삶 그 본질을 귀찮게 하던 인간관계의 갈등도, 밤하늘의 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도, 이렇게 저무는 시월도… 이젠 아무 미련없이 그냥 가슴에 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성숙이라는 것일까. 혜현누나가 얘기하던 바로 그런.
짜증나는 “무장공비“ 얘기만 없으면 이 생활도 할만하단 생각. 요즘 드는 생각이다.
마음을 다 옮겨놓을 수 있는 편지 한 장 쓸 수 있었으면.
보고싶은 얼굴—. 오늘은 주일이다.
10.24 삼십칠 일째.
허리정도 밖에 안돼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꼽추 아주머니와 얼굴에 주름이 가득 잡힌 아저씨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적전지역 내의 배추밭이 저들의 전부인 까닭이다. 그들의 하소연에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지만, 결국 그들을 통제해야 했던 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슬픔이었다.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계속되는 정신교육이 있었지만 작전은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우리 중대 출동인원 97명중에 옴환자만 11명이다. 살이 썩어가는 봉와직염 환자도 여럿 발생했고 그들 중 일부는 후송 준비중이다. 옆 중대에서는 이등병이 야삽으로 분대장의 머리를 내리찍어 그는 구속되고 분대장은 후송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며칠 전에 있었다. 정신력의 한계.
싸움에의 준비… 여기서 영적전쟁의 한 단면을 배운다.
적개념의 신념화, 싸움에의 긴장감— 필수적인 요건임을.
10.28 사십일 일째.
기도 부탁하는 편지를 여러 통 부쳤다.
기도만이 쓰러질 듯한 몸둥아리의 살 길. 꺼져가는 촛불의… 몹시 아프다.
몸도 영혼도.
10.30 사십이 일째.
여섯번째의 이동. 해발 1400고지의 오대산 중턱 상왕사 암자로 새로 이동했다.
복귀한다는 떠도는 얘기들은 우리를 들뜨게 했지만 결국 우리는 높은 고지에 숨을 몰아쉬며 이곳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올 것 같다. 검은 구름이 하늘에 잔뜩 걸쳐있다.
11.7 사십팔 일째.
군장을 꾸리고 부대시설을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분출된 실탄들이 거두어졌다.
기름기 빠진 얼굴들에 까맣게 위장했던 크림들이 피부병으로 번졌다.
무엇을 얻었는가… 아무도 묻는 자가 없다. 치열한 싸움의 흔적들은 결국 우리의 정체성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속아간다. 17명의 무장공비 중에 11명은 자살했고, 4명은 사살했고, 한 명은 투항했으며 나머지 한 명은 포위망을 뚫고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복귀한다는 공문을 손에 쥐고 들떠있는 후임병의 모습에 오히려 허탈해지는 마음의 공허함은 왜일까… 우리는 과연 승리한 것일까.
이제 겨울이 시작되려 한다.
_그리고 2006년 2월 2일에 덧붙임.
96년에 쓴 일기니까 22살 때다. 오랜만에 끄집어낸 일기가 낯설다. 순수함을 유치함으로 비난하고픈 욕구만 빼고는 가끔 그때를 꺼내어 마주하는 것도 유익하다.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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