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_

生日有感_"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Soli_ 2013. 2. 15. 17:00

보통 생일은 무덤덤히 지나는 편이다. 아니, 그렇게 노력한다. 생일 때만 되면 급격히 우울해지는 까닭이다. 뭐랄까, 근원적 외로움 비슷한 것이 있다. 삶은 고통이라고,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인식했다. 꽤나 부자였던 논현동 시절이 있었다고 가족들은 종종 추억하나, 그땐 너무 어려 기억나지 않는다. 이사갈 때마다 집은 점점 작아졌고 마침내 지하 눅눅한 집, 곰팡이가 벽 안쪽을 채우던 가난한 시절의 기억만이 남아있다. 감수성 예민한 열다섯 살, 내 선생님은 등록금이 밀린 아이들을 모아 방과 후 청소를 시켰다. 거의 마지막 즈음엔 겨우 두세 명의 아이들만 남아 힘겨운 청소를 했다. 그중에 내가 있었다. 


대학 가서는 장학금도 받아야 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그러고도 한시간 넘게 걸어 학교에 걸어갔다. 예수를 믿고 가장 힘들었던 건 '아버지 하나님'이었다. 내게 아버지란 존재는 늘 부재했던 까닭이다. 어머니의 외로움이 몹시 안타까웠지만, 어머니의 연애는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내가 그토록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것은 그 때문일지 모른다. 오직 이야기만이 나를 지켰으니까. 생일이 되면 기쁘고 설레기보단, 이번에는 제발 그냥 지나갔으면 했다. 근원적 외로움에 질문을 던지지 말고, 그냥, 무덤덤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했다. 


결혼하고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내는 극진히 나를 챙겼다. 풍성한 식탁에, 정성스런 선물, 파티를 준비했다. 처음엔 당황했으나, 차츰 적응이 되었다. 그 적응을,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대한 극복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것은 트라우마가 아닐 것이다. 이번 생일이 그러했다. 이번 생일은 설날 다음날이었고, 마침 장모님의 음력 생신과 겹쳤다. 설날은 고달픈 날이다. 특히 십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것을 이제서야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했고, 처가 식구들은 아직도 직장에 다니는 줄 알았다. 연휴 내내 조마조마했고, 자칫 별 것 아닌 일에 자존심이 무너질 것만 같아 위태로웠다. 

연휴 마지막 날, 그리고 나의 생일날, 밤늦게까지 처가 식구들과 지내다 집에 오는 길, 그만 마음이 무너졌다. 더욱이 연휴 직후, 서평 마감이 두 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외로움에 한 주를 보냈다. 오늘까지 중요한 기획안 두 건을 써야했는데, 새벽까지 그 앞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방금전, 출판사와 의뢰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기한을 연기했다. 마감을 거의 어기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도서관에 앉아있다. 박형준의 시를 읽는다.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의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시인은 어린 송골매의 첫 비행을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라고, 그 찬란한 첫 비행의 위태로움을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라고 썼다. 하늘과 죽음 사이를 유영하는 어린 송골매는 절박했을 것이다. 어린 송골매의 절박함이 그에게 근원적 외로움이 되었을까, 나로선 알 길이 없으나 부디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다행히 마음속 파문은 잔잔해지고, Remedios의 "A Winter Story"를 찾아 들을 만큼 편안해진다. 그렇게, 나의 생일은 물러가고, 다시 나의 자리엔 익숙한 외로움이 위태롭던 외로움을 물리친다.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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