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_

옥명호 선배

Soli_ 2013. 2. 8. 00:56

그가 내가 다니던 출판사 편집장으로 왔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C. S. 루이스를 정성껏 만들던, 스스로를 'lewisist'로 칭하던 그와 많은 부분에서 통할 것 같았다. 문서학교를 다녀오던 길에, 그와 '잉클링즈'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기로 작당했고 실행에 옮겼으나, 곧 우리의 모임은 맥주 한잔에 수다 떠는 모임으로 전락했고 우리는 그 추락을 즐겼다. 홍대 교정에 올라 대학생들 사이에서 시를 읊던 그의 모습을 즐겁게 추억한다. 나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를 '옥 시인'으로 불렀다. 고결한 문학의 언어와 펜탁스 필름 카메라의 감성을 나누던 동료였고 선배였다. 한편, 우리는 일하는 방식이 달라 종종 다투기도 했다. 그는 무지 고집 센 편집장이었고, 나는 완벽주의 성향의 깐깐한 문서사역부장(그리고 마케팅부장)인 시절이었다. 주로 내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가장 오래 야근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였고, 그다음이 나였다(그의 퇴사 이후 가장 오래 야근하는 사람은 단연 나였다. 우린 일을 너무 잘했거나 너무 못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 한편에 앉아 책과 인생을 논하던 시간들이 많았다. 우린 가난하다는 점에서 닮았고 통했다(우린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딸아들 하나씩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당시 우리는 전세자금대출 정보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는 깊고 충만했다. 그가 부르던 김광석 노래 혹은 이름 모를 샹송을 들어보면 그 깊은 속내의 풍요를 알 수 있다. 간혹 만나면 나의 아내와 아이들의 안부를 먼저 묻고 걱정하는 그였다. 세심하고 자상하지만 아픈 소리도 에둘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아프다. 그가 회사를 떠날 때 슬퍼서 눈물이 찔끔 났다. 그리고 내가 회사를 떠날지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상의하던 선배였다. 보통 자리를 잃으면 대하는 태도가 슬쩍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자리를 잃으면 먼저 달려와 벗이 되는 사람이 있다. 벗이 되는 사람, 그가 그러하다. 나는 그가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옥 시인'이자 'lewisist', 무엇보다 글쟁이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타자와 인생에 대한 그의 맹목적 사랑이 새삼 고마운 오늘, 낯 뜨거운 연서를 용기 내어 고이 써서 바람결에 띄운다. 





2009년 문서학교 시절, 옥명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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