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와 예지를 사로잡은 어린이성경
《하나님의 아이들_이야기 성경》
데스몬드 투투 지음|박총, 박해민 번역|옐로브릭 펴냄|2015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가 인간의 삶과 관계 맺는 방식은, 숱한 기억들을 연결하고 삶의 영속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또다른 진폭과 파장으로 확장되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는 근접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성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여러 개의 이야기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성서가 필요했습니다. 여러 ‘어린이성경'을 구해 읽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어린이성경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정 신학적 전통에 치우쳐 있으나 정작 성서의 확고한 신념은 소홀히 여길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권위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림은 품위가 없었습니다. 자칫 우리 아이들이 똥고집 무례한 기독교인이 되거나, 기독교를 미적 감각을 상실한 촌스런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아닐까 우려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에 쏙 드는 어린이성경을 발견했습니다. 옐로브릭에서 펴낸 《하나님의 아이들_이야기 성경》입니다. 저자 데스몬드 투투는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대주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책을 주도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의는 평등의 가치를 위한 투쟁을, 사랑은 용서와 화해의 용기를 수행하지요. 그것은 투투 주교가 믿는 성서의 확고한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도 정의와 평화의 정신이 잘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먹이는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슬픈 이를 위로하는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품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76쪽)
매력적인 책입니다. 투투 주교의 글은 ‘이야기 재간꾼' 아들 예서를, 스무 명의 화가가 참여한 그림들은 ‘탐미주의자' 딸 예지를 단박에 사로잡았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직후 “손뼉을 치시며 웃으시”고 압제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로 인하여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당연히' 경어를 사용합니다(이 당연한 것을 제대로 반영한 거의 유일한 어린이성경입니다). ‘하나님의 꿈’이란 일관된 관점은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냅니다. 박총, 박해민 부자의 번역은 우리말의 리듬과 호흡까지 세심하게 배려합니다.
이 책의 또다른 탁월한 점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스무 명의 화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테파노 비탈레도 있어요. 로르 푸르니에, 캐시 앤 존슨, 마리케 텐 카테의 그림도 참 좋군요!) 그들은 주어진 이야기를 자신만의 스타일과 관점이 담긴 아름다운 그림으로 구현했습니다.
이 책에 초대받은 화가들은 전 세계 아이들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자신들의 독특하고 풍성한 문화적 유산을 사용하여 성경 이야기를 그림에 담았습니다. 이 그림들은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는지를 경이롭게 드러내 줍니다. _ 데스몬드 투투
화가들은 성서의 행간을 오래도록 묵상한 후에야 이 그림들을 그렸을 것입니다. 다양한 피부색의 아이들과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수님도 때로는 백인으로, 아랍인으로, 흑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서른 언저리 젊음이 느껴집니다. 묘사는 세밀하고 색감은 조화롭게 반짝입니다. 배경도 쉬이 허비하지 않습니다. 지구별에 대한 애틋한 손길이 곡진히 닿아 있습니다. 그림만으로도 독자들은 충분히 배려받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도 종종 제 자신이 그림에 사로잡혀 호흡을 놓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참 좋은 어린이성경이라고 생각했는데, 큰일입니다. 제가 더 반해버렸어요. 아무래도 아이들 잠자리에서 책 읽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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