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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나의 책 나의 저자

Soli_ 2015. 12. 30. 00:30

2015년 나의 책 나의 저자




독서의 편향에 대한 비판은 감수하겠다. 독서는 지향이며, 그것을 향한 편향의 삶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향은 있되 편향이 없는 삶을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나의 부끄러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나의 책들이 있었던 자리에서 슬픔을 더욱 오래도록 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목표로 한 것보다 책을 많이 사서, 더 느리게 읽지 못해서, 제대로 읽지 못해서 아쉬운 한 해가 저문다. '책은 모름지기 누군가의 사연이 되어야 한다'는 오랜 다짐으로 새해를 맞이한다. 




 요약 


 

인문·회 부문 10권의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

폭력 국가

심미주의 선언

사람, 장소, 환대

수전 손택의 말

글쓰기의 최전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읽는 인간

일탈

 

문학 부문 10권의 책


샴고로드의 재판

스토너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올 댓 이즈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파리의 우울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양의 노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나의 저자


서경식

안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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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출간된 책 중 제가 읽은 책을 대상으로 인문/사회와 문학 부문으로 나누어 

각 10권씩 선정했습니다. 출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인문·사회  10권의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창비 펴냄┃15년 1월



슬픔의 통증에 관한 기록 


감히 헤아릴 수 없을지라도 단호히 기억해야 하는 슬픔에 관한 책. 어떤 책은 오직 간직하기 위해 구입한다.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하고 가장 천천히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아프다. “천천히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습격하듯 찾아오는 통증”(김애란)의 책이다. 기억으로 퇴화하지 못한 슬픔의 통증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통증을 기록하는 자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토록 큰 슬픔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한 유가족의 말. “그냥 옆에 있는 거지. 뭔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등 두드려드리고 같이 밥 먹고 옆에서 자고 또 담배 같이 피우고 그렇게.” 슬픔의 무게가 두려워 망설였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264쪽) 


레비나스가 말했던가. “타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 그를 위해서 내가 책임을 떠맡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 나는 그에게 책임이 있다.” 얼굴을 마주하며 우리는 함께 ‘있다’.(341쪽)  





폭력 국가 

무능한 국가와 그 희생자들

게리 하우겐, 빅터 부트로스 지음┃최요한 옮김┃옐로브릭 펴냄┃15년 1월



이것은 가능한 싸움이다


폭력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강자에서 약자에게로, 가진 자들로부터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로 향한다. “빈곤사회에 폭력이 창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법과 경찰이 가난한 이들을, 그중에서도 힘없는 여성과 아동들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 수호자들이, 가난한 약자들로부터 부요한 강자들을 지킨다. 법은 시민이 아닌 정부를 보호한다. 법치의 왜곡이다. 


여덟 살 소녀 유리의 시신이 아침의 거리에서 발견되었다. 소녀는 성폭행을 당했고 다리가 부러졌고 머리가 짓이겨져 있었다. 전날 밤 유리가 갔던 부잣집에선 유리의 피 묻은 옷가지가 발견되었다. 목격자도 있었다. 하지만 시신에서 검출된 정액 샘플을 비롯한 모든 증거는 사라지고 증언은 묵살되고 진실은 은폐되었다. 부자의 변호사, 경찰, 검사, 병원장의 공모다. 유리의 나라 페루에서는 이러한 폭력과 진실의 은폐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페루의 여성 50퍼센트 이상이 폭력 피해자이고 47퍼센트가 강간 피해자다. 필리핀의 세부는 아동 인신매매 범죄세력의 온상지다. 우간다의 수감자 중 3분의 2는 재판을 받지 못한 채 갇혀 있다. 인도 어린이의 46퍼센트가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매년 500만 명이 폭력으로 집을 잃고 3000만 명이 노예로 전락한다. 2달러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극빈자의 수는 대략 25억 명 내외로, 이 수치는 지난 30년 간 큰 변동이 없다. 


빈곤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빈곤을 심화하며, 권력은 이 체제를 ‘합법적으로’ 강화한다. 이러한 악의 연대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저개발국들에서의 폭력에 맞선 인권보호단체 IJM(International Justice Mission)를 만들어 폭력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유리의 가족들 곁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페루의 형사사법제도에 맞서 싸우고 개혁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은 가능한 싸움”이라고, “희망의 프로젝트”라고 명명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효과적인 형사사법 제도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절망의 미신”을 타파하길 바란다. 


국가 폭력은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은밀히 행사되고 치밀하게 은폐된다. 우리에게도 이 싸움이 여전히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그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깜짝 놀란 다급한 목소리로 되물어야 한다. 혹여 나는 그 악의 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가난한 사람의 문제는 전 세계에 편재한다. 최빈국이든 중소득국이든 지역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대륙에서 빈민은 폭력의 피해자다.(77쪽) 





심미주의 선언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김영사 펴냄┃15년 2월



‘불가능의 가능성’을 따라 걷는 심미주의의 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심미주의란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탐미(耽美) 혹은 유미주의(唯美主義)와는 다르다. 인문학자 문광훈에게 심미(審美)란 아름다움을 쫓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해 분별하고 판단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것이 실행되는 자리는 ‘지금 이곳의 삶’이다. 심미적 능력은 예술작품의 생산과 감상을 넘어 보다 넓은 지평으로 확장되고 실천된다. “이성으로의 길은 마음을 통해 열리고, 그 마음은 아름다움을 통해 쇄신된다.” 현실의 개혁은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개인의 쇄신은 심미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심미적 삶은 불평등과 불의, 부당함과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정치적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내가 염원하는 심미주의의 길도 인간의 현실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진선미의 좁고도 위태로운 길은 인간사를 지배하는 변덕스러운 느낌과 견해와 이해관계의 수천 가지 장애를 넘고 또 넘고 또 넘어야 한다. 결국 이 책은 소수의 독자 - 예술의 힘을 잊지 않고 고민하는 몇몇 독자를 위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행복의 약속보다는 그 실천이 더 소중하지만, 이 실천 속의 행복은 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먼 행복에 대한 지금의 그리움이 그 꿈을 적게 했고, 이 꿈을 적는 가운데 나는 그 기쁨의 한쪽을 미리 맛보았다. 삶의 어떤 기쁨은 상상적으로만, 오직 꿈속에서 체험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미주의가 만약 있다면, 그 기초는 이 현실에서 온전히 정립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대한 통절한 인정으로부터 하나하나씩 놓이기 시작할 것이다.(456쪽)


이 불가해한 삶의 총체성 앞에서 무지와 욕망을 줄여가는, 생각 없음의 당연하고도 평범한 악을 줄여가면서 인간다움을 입증해가는 하나의 고귀한 방식, 이것이 예술의 방법이다.(459쪽)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15년 3월 



놀라운 책이다 


탄생의 순간 자동적으로 승인되는 것이 인간이라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권리인 성원권을 갖는 자가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뜻”이며, 인간이기는 하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존재는 결국 장소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내주는 행위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이 사회는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도, 구조의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 배제와 낙인의 원리에 의해 모멸과 굴욕으로 배태된다. 약자의 굴욕감을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 책은 불평등의 음모를 추적하고 폭로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음모에 맞서 절대적 환대를 주장한다.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도 불가능하다고, 사회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노력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밑줄 친 부분만 합쳐도 한 권의 책이 될 것 같다. 놀라운 책이다.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204쪽)







수전 손택의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 조너선 콧 지음┃김선형 옮김┃마음산책 펴냄┃15년 4월  



손택이라는 작은 우주선


이 책은 마흔다섯,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던 손택의 인터뷰집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진에 관하여≫(1977)를 전해 출간하여 비평계에서 주목을 받았고,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 수년 간 투병하며 집필한 역작 ≪은유로서의 질병≫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내가 생각하는 손택 최고의 책은 ≪사진에 관하여≫≪은유로서의 질병≫≪타인의 고통≫이다). 죽음의 징후를 가까스로 모면했음에도 그의 말은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이 없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앎을 얻었지만, 또한 지금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면서도 “전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는 생각을 해요”라고 유쾌하게 말한다. 


손택은 스스로를 “정신 못 차리는 탐미주의자”이자 “강박적인 윤리주의자”라고 말한다. 거기에 더해 인터뷰어인 조너선 콧은 ‘타인의 고통’에 끊임없이 직면하고자 했던 손택을 이타주의자로 헤아린다(손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의 제목을 ≪타인의 고통≫이라고 지었다). “이타주의가 없이 참된 문화의 가능성은 없다”는 손택의 말은 하나의 강고한 신념이었다. 그의 지성주의는 문학과 예술, 그리고 타인에 대한 감수성으로 발현된다. 내게 손택은 하나의 이정표다. 이 책은 그 이정표가 하나의 인격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신비를 선사한다. 아무래도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66쪽) 







글쓰기의 최전선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메멘토 펴냄┃15년 4월  



삶의 최전선에서 수행하는 글쓰기


작가 ‘은유’를 발견한 건 2012년 겨울이었다. “나는 여전히 왕성하게 분열 중인 세포를 발견했다.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라는 문장, 그리고 첫 책 ≪올드걸의 시집≫(2012)을 읽고난 직후, 그의 글을 찾아 블로그까지 찾아갔었다.  


글쓰기에 대한 비법 같은 것을 알려준다고 말하는 책은 대개 허상과도 같다. 자기계발의 욕망과 글쓰기의 욕망에는 근원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무릇 “나 자신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씩 불편해지며 깨어있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수한 글쓰기 관련 책들을 감히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글쓰기 책들과 ≪글쓰기의 최전선≫이란 책. 이 책은 “견딜 수 없는 순간에 불쑥 뛰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을 글쓰기란 행위로 발휘되게끔 돕는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당장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 이전에, 내 삶의 최전선, 타자와 세상에 맞닿아 있는 그 경계선에 서게끔 만든다. 


글쓰기에서 문장을 바르게 쓰는 것과 글의 짜임을 배우고 주제를 담아내는 기술은 물론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글을 쓸 것인가’ 하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탄탄한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열심히 잘 쓰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 ‘열심’이 어떤 가치를 낳는가 물어야 한다. 밤이고 낮이고 온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은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수록 위험하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22-23쪽)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김희정 옮김┃부키 펴냄┃15년 5월



‘죽음’에 관한 최고의 책


친구의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이제 죽음이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여섯 살 예서는 자주 죽음이 궁금하다. 모든 생명은 결국 죽는다는 것을, 엄마도 아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서는 어서 ‘형아’가 되고 싶지만 ‘어른’이 되는 것은 싫다. 어른이 되면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니까. 할아버지는 곧 죽을 테니까. 내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그 나이 즈음을 지나고 있다. 죽음을 곰곰 생각하는 요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가장 강렬하고도 다급한 화두 중 하나다. 


이 책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무의미하고 고통스런 연명 치료에 매달리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죽음의 필연성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정직한 희망이란 무엇일까. 그 물음에 하나씩 답해나가는 것이 결국 삶이 아닐까. 기품 있는 문장과 감동적인 서사, ‘죽음’을 말하는 책 중 최고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335쪽)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 권정생 지음┃양철북 펴냄┃15년 5월



세상에는 이런 우정도 있다


1973년 마흔여덟의 이오덕이 서른여섯의 권정생을 찾아갔다. 이오덕은 모든 사람들이 권정생의 글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권정생은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아이들 곁에” 있겠다고 했다. 그들의 만남은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통속’을 경계하며 “모든 불순한 것들에 저항”하기를 다짐하였고, “가난한 사람만이 가장 착하게 살 수” 있다고 서로를 보듬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그들 삶의 결을 보여준다. 세상에는 이런 우정도 있다. 이오덕의 우리말이, 권정생의 동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사람, 잘 산다는 인간들, 선진국, 경제대국 이런 것 모두 야만족의 집단이지 어디 사람다운 사람 있습니까. 어쨌든 저는 앞으로도 슬픈 동화만 쓰겠습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눈물투성이입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죄짓지 않고는 목숨이 유지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311쪽) 







읽는 인간

우리는 왜 읽어야 하는가

오에 겐자부로 지음┃정수윤 옮김┃위즈덤하우스 펴냄┃15년 7월



투쟁과 구원의 서사를 위한 책읽기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던 허클베리는, 자유를 찾아 도망치던 흑인친구 짐과 동행한다. 그는 백인들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짐을 내주고 현상을 받을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생각을 돌이킨다. ‘검둥이’(nigger)와 벗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아홉 살 소년 오에 겐자부로를 사로잡았다. 이 소설은 그의 운명이 된다. 


이렇듯 책 읽기는 누군가에겐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고도 가장 적극적인 투쟁”(장정일)이 된다. 또한 그것은 구원이 되기도 한다. 죽마고우의 자살, 언어장애와 행동장애, 자폐증을 앓았던 첫째 아들과의 공존 등 삶의 주요 고비마다 오에의 곁에는 책이 있었다. 그에게 책은 구원이었다. ‘읽는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의 일치는 바로 그 두 가지, 투쟁과 구원의 서사를 동시에 살아낸다는 의미인 것이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 짐을 배신하지 않겠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이 한 줄입니다.(21쪽)







일탈

게일 루빈 선집 

게일 루빈 지음┃임옥희, 조혜영, 신혜수, 허윤 옮김┃현실문화 펴냄┃15년 9월 



절대적 자유를 향한 페미니스트의 투쟁


이 책을 읽으며 난 종종 얼굴이 불콰해지곤 했는데, 그것은 대개 나의 탄로난 무지 때문이었다. 한껏 저항하며 읽었지만, 한편으론 파격의 사유에 관한 낯선 즐거움을 누렸다. 900쪽이 넘는 책이지만, 이 책은 내게 ‘성은 언제나 정치적이다’라는 테제의 시작일 뿐이다. 


게일 루빈은 스스로 사도마조히스트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한 페미니스트 성 인류학자다. 사도마조히즘, 성 노동, 포르노그라피, 성 소수자 등이 그의 주 연구 분야다. 이 책은 그가 40년간 써온 주요 논문과 에세이를 엮은 선집이다. 안티테제로서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테제로서의 페미니즘을 다룬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성실한 연구자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제적 두 논문, 즉 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하여 명성을 선사한 <여성 거래>(1975, 1장)와 푸코의 ≪성의 역사≫에 비견되며 엄청난 논쟁을 일으킨 <성을 사유하기>(1982, 5장)(각 논문에 덧붙인 후기를 포함하면)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책의 주제나 두께에 막연한 부담감을 갖는다면, 우선 이 두 논문을 읽어보길 바란다. 오랜 전통과 관념이 아닌, 오직 사유의 대결을 펼치기 바란다. 


내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루빈은 자아에 직면하여 사유를 실천하고, 세상에 직면하여 사유로 저항한 페미니스트였다는 점이다. 그는 섹슈얼리티의 절대적 자유를 옹호하고 있지만, 난 자유의 관점에서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머물렀다. 그것은 나의 한계였을 것이다. 다만 나의 무식은 루빈의 실천과 저항에 대한 강렬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다. 앞으로도 치열하게 배우겠다. 그들의 자유가, 그 아득한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 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140쪽) 







 문학  10권의 책








샴고로드의 재판

엘리 위젤 지음┃박옥, 하진호 옮김┃포이에마 펴냄┃14년 12월



오직 역설로만 존재하는 신을 향한 물음


유대인 집단학살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1649년 2월, 동유럽 샴고로드의 한 여관에 세 명의 음유시인들이 방문한다. 그들은 유대인 음유시인들로 부림절 공연을 하러 유대인 마을에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을의 유대인들은 몰살당하고 이제 여관 주인과 그의 딸만 남았을 뿐이다. 학살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긴박함 속에서 여관에선 부림절 연극이 펼쳐진다. 집단학살을 방조한 혐의의 신을 피고로 한 모의재판이 펼쳐지는 것이다. 여관주인은 검사가 되고 음유시인들은 재판장이 된다.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한 나그네가 신의 변호인이 된다. 검사의 날카로운 공격에 맞선 변호인의 유려하고도 논리적인 변호가 빛을 발한다. 나그네의 신실한 신앙에 재판장들은 탄복한다. 변호인의 활약으로 학살에 대한 신의 혐의 없음이 거의 입증될 즈음, 그러나 학살자들이 그들 앞에 당도했을 때, 나그네의 정체가 극적으로 밝혀진다. 그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압도적인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의 논리는 궁박하다. 신의 사랑은 가난하고 정의는 구차하며, 신의 전능은 그 모진 악을 견디는 것으로만 발휘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은 오직 역설로만 가능하다. 악에 대한 신의 결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억울한 이들의 기소에 대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응답하는 것, 신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신은 오직 역설의 신비로 존재한다.  


샴고로드에서 신의 자비 운운하는 건 모욕이요. 오히려 그의 잔인함에 대해 말해야지.(55쪽)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김승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 펴냄┃15년 1월 



죽음에 이를 때까지 최초의 질문을 잊지 말 것


셰익스피어의 일흔세 번째 소네트를 평생의 삶으로 살아낸 사람 스토너. 그래서 그의 삶은 잔잔한 물결로 거대한 파고를 일으킨다. 그는 학문도, 문학도, 우정도, 사랑도 무엇 하나 제대로 성취한 것이 없지만, 온전한 삶 그 자체를 성취해낸다. 


황량하고 단단한 고독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분노하거나 환호하지 말 것. 나의 땅을 주장하거나 타인의 땅에 침범하지 말 것. 허위와의 싸움에 물러서지 말고 오직 본질을 사수할 것. 열렬히 사랑하되 소유하지 말 것. 딸을 다스리지 말고 다만 사랑할 것. ‘한 길 가는 순례자’처럼 척박한 삶을 또박또박 걸을 것.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잊지 말 것. 죽음으로 수렴되는 삶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그는 최초의 질문을 거듭 묻는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는가? 그러자 그의 곁으로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 되었다. 삶이란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스토너의 삶을 열망한다.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This thou perceivest, which makes thy love more strong

To love that well which thou must leave ere long.)(윌리엄 셰익스피어, 21쪽)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160쪽)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변광배 옮김┃민음사 펴냄┃15년 2월 



불멸의 글쓰기에 관한 바르트의 마지막 욕망


2015년은 롤랑 바르트 탄생 100주년이고 이 책은 그의 유고작이다. 이 책의 원제는 “소설의 준비(La Preparation du roman, I, II)”로,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바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행했던 강의와 세미나의 녹취록을 나탈리 레제의 감수 아래 출판한 것이다. 


1977년 10월, 바르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바르트는 자신에게도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소설을 시도한다. “글 쓰는 사람, 글쓰기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란 새로운 글쓰기의 발견밖에 없다. 새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글쓰기를 실천해 과거의 지적 실천과 결별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는 바로 그 ‘새로운 삶(Vita Nova)’, 새로운 소설에의 시도를 담고 있다. 그것은 자기 존재 증명으로서의 글쓰기로, 그 이전까지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주장하며 저자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했던 그에게는 커다란 변화였던 셈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랑했던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욕망의 실천으로, 이 행위의 주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불멸에의 시도다. 


1980년 2월, 바르트는 마지막 수업 직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불멸의 사랑을 글쓰기로 이루려고 했던 이의 비통한 죽음이었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실패한 것인가. 불멸이란 지평은, 어쩌면, 죽음 따위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일반성에 맞서, 과학에 맞서 나의 내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그 소리를 듣게 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밀함입니다.(15쪽)


나는 소설을 하나의 직물(텍스트), 환영과 신기루, 고안된 것들, 또는 '허위'로 그려진 방대하고 긴 천으로 생각합니다. 빛나고, 채색된 천, 절대적으로 정당화된 진실의 순간들이 점철되고 흩어져 있는 돛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순간들은 드뭅니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죠. 내가 메모하기를 생산할 때, 그것은 모두 진실입니다.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소설에 이르지 못합니다. 소설은 허위에서 시작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소설은 예고 없이 진실과 허위가 혼합될 때 시작될 것입니다. 소리치고, 절대가 되는 진실과 욕망과 상상계에서 온 빛나고 다채로운 허위가 혼합될 때 말입니다.(194-195쪽)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김영준 옮김┃마음산책 펴냄┃15년 8월  



이해할 수 없지만 관조할 수 있는 인생의 기쁨에 관하여


유작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유작이 될 것을 짐작하여 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 책은 전자가 아닐까. 설터는 이 책이 자신의 유작이 될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유작으로 썼을 것이다. 


주인공 필립 보먼은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 기자를 거쳐 평생 출판사 편집자로 살았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결혼에 실패하였으나 이후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사랑과 연애, 일과 성공은 공허와 기쁨의 사이에서 플롯이 아닌 우연의 원리로 보먼의 삶을 구축한다. 소설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나 그들의 이름을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다. 단지 우연과 인연이란 두 단어를 곱씹으며 보먼의 뒤를 쫓으면 된다. 


모든 만남에는 수만 가지의 우연이 작동하고, 모든 이별에는 수만 가지 이유가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 우연을 해석하지 않는다. 굽이치는 격랑의 서사 대신, 단조롭게 흐르고 잊히는 세월의 습속을 담담히 관조할 뿐이다. 인생은 “다 그런 것(All that is)”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먼이 아니라 설터가, 보먼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유언처럼 말이다. 그가 새삼 고마운 이유다. 잘가요, 설터. 


아내와 같이 바에 앉아 있는 상상을 했어. 이런 바 말고 좀더 근사한 데.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있는 그런 바에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특별한 거 말고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방금 들어온 손님에 대해서, 아니면 나중에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일상에서 스치는 일들 있잖아. 아내는 예쁜 드레스로 멋지게 차려입고. 아, 사람들 옷차림도 얘깃거리겠네. 난 옷을 좀 잘 입고 다니고 싶더라. 어쨌든 같이 얘기하면서 한 시간 정도 재밌게 보내는 거야. 그러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면, 그사이 바텐더가 아내 잔이 빈 걸 보고 나한테 묻겠지. 아내 분이 한 잔 더 하실 거냐고. 그럼 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내 아내는 자리로 돌아와도 잔이 새로 채워진 걸 모를 거야. 그냥 들고 한 모금 마시겠지. 그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도 모르고.(330쪽)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문학동네 펴냄┃15년 8월  



서늘한 울음을 아득한 물음으로 푸는 서사


정용준의 세 번째 소설집으로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미드윈터-오늘 죽는 사람처럼>을 제외하면 모두 ‘혈육’이라는 모티프가 서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혈연으로 맺어진 몸의 운명이다. 어떤 이는 그 운명으로 회귀하고, 어떤 이는 그 운명을 부인하고(하지만 결국 귀속된다), 어떤 이는 그 운명을 살해하고(입양된 아들이었기에 가능했을까), 어떤 이는 운명의 저주를 자신의 죄값으로 수용하고, 어떤 이는 그 운명을 평생의 숙명으로 짊어지고 산다.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므로 이해는 불가하다. 도망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다. “삶(生)은 명(命)이다”라는 전제는, 정용준의 소설에서 비참한 현실을 살아내는 이들의 서사에서도 유효하다. 혹독한 슬픔이지만 서둘러 위로하거나 응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러서거나 회피하지도 않는다. 운명의 사슬 속에서도 그들은 총기를 잃지 않는다. 단단한 문장이 또렷한 상징의 어휘를 들고 육박해올 때, 소설 속 화자가 서늘한 울음을 터뜨릴 때, 우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묻게 된다. 슬픔의 이유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아득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음으로부터, 그들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나의 일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단지 그 일을 생각하면 쓸쓸해집니다. 그뿐이에요. 저는 제 삶의 가장 큰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삶이 나름의 방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운명이고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제가 피하고 싶은 운명이겠지요. 제가 피할 수 없었듯 그들도 피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34쪽)







리의 우울 

샤를 피에르 보를레르 지음┃황현산 옮김┃문학동네 펴냄┃15년 9월 



‘용산’에서 ‘파리’의 우울을 읊다


정기수, 윤영애, 박철화에 이어 이번엔 황현산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황현산의 번역이라서가 아니라 황현산의 주해가 탐이 나서 구입하였다(민음사 번역본을 가지고 있고 윤영애의 번역도 좋아한다. 이번 문학동네 번역본은 절반 이상이 황현산의 주해다). 


보들레르는 19세기의 파리를 거닐면서 “산문적인 현실에서 발견한 시적인 것”(황현산 주해)으로부터 “어떤 시적인 산문의 기적”(아르센 우세에게 보낸 보들레르의 편지, 이 책의 서문)을 바랐다. 또다른 산책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이광호는 “제국주의의 각축장이었고 일제의 반도 침략의 통로였으며 150년간 외세가 주둔한 군사지역(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인 용산에 관한 에세이의 제목을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라고 붙였다. 


그렇다면 ‘산문적인 현실’ ‘산문적인 거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보들레르에겐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적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그 무엇을, 이광호에겐 “애써 지우고 싶은 식민과 이식의 역사와 모욕과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인 개발을 호출하는 기이한 장소”를 의미한다. 나는 ‘용산’에서 ‘파리’의 우울을 읽는다. 군중 속에서 이방인으로 방랑했던 보들레르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그의 시를 읊조리는 것이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취하라>, 99쪽)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창문들>, 102쪽)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안희연 지음┃창비 펴냄┃15년 9월 



당신도 오래 아팠으면 좋겠다


시인은 “영원을 기록하기 위해/세상 모든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당분간 영원>)이다. 그것은 오직 슬픔의 사람들을 애써 간직하기 위해서만 허락된 영원이다.


시인은 소멸하는 존재들의 곁에서,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파트너>)의 차이를 구분하는 섬세함으로 그들의 절박한 슬픔을 기록한다. 시인은 그들의 곁에서, 그들과 더불어 아프다. “눈을 감았다 떠도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월요일에 죽은 아이들>) 그리하여 시집에는 통증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눈에다 못을 박아 넣고 싶은 날들”(<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을 기록하는 것이다. 시인의 곁으로 원혼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시인은 “테두리를 버리려는 구름의 습관”(<벽>)으로 그들을 위해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백색공간>) 부지런히 만든다. 그들의 슬픔이 시인의 삶을 지배한다.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잘 자라는 시인의 화분처럼 은밀한 공범들인 우리들에게, 시인은 아픔을 권한다. 당신도 오래오래 아팠으면 좋겠다고. ‘고트호브’는 그린란드의 수도로 영토의 85퍼센트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고트호브’의 뜻은 ‘바람직한 희망’이다. 이 슬픔의 시집이, 도리어 내게 하나의 희망으로 읽혔던 건 우연이 아니다. 


간신히 안간힘으로 흘러왔다. 그러니까 당신도 오래 아팠으면 좋겠다. 그 먹먹함의 힘으로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주기만 한다면, 서늘했던 당신의 눈빛이 사랑으로 기울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 아파도 좋다. 더 허물어질 수 있다.(시인의 말, 158쪽)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자서전 

가토 슈이치 지음┃이목 옮김┃글항아리 펴냄┃15년 9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서정의 지식인


이 책을 읽은 건 서경식 선생의 추천 때문이었다(2014년 12월 4일자 한겨레). 서경식 선생에 의하면, 이 책은 “일본에는 드문 ‘저항하는 휴머니즘’이 어떻게 태어나 자라났는지 이야기해주고 있다”. 가토 슈이치는 20대에 태평양전쟁과 히로시마 폭격을 겪었다. 프랑스로 유학하여 의학을 전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문학을 탐닉하였고, 1958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참석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문학평론가의 길을 걸으며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참여지식인으로 살았다(그는 일본 헌법 9조를 지지하는 일본 지식인 그룹인 ‘9조 모임’을 결성하여 평화 이상 실현에 앞장섰다). 


이 책은 90세까지 살았던 가토 슈이치가 49세에 쓴, 자신의 반평생을 담은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나 전기의 본래 목적이 한 인물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라면, 이 책의 가치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발견된다. 즉 ‘저항하는 휴머니즘’으로 살았던 한 인물의 기원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다(그는 이 책의 두 번째 후기에서 “≪양의 노래≫는 오늘날 나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 패전 이후에도 군국주의가 격동하던 시절, 가토 슈이치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야만이 아닌 이성을, 국가가 아닌 이웃을 갈구했다. 서경식 선생에 의하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서경식, ≪내 서재 속 고전≫, 141쪽)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쩌면 대개의 열렬한 애국주의자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다.(132쪽)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감동했으며 또 비탈길 아래로 굴러 내려가기 시작한 자동차처럼 끝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사회를 곁에서 바라보며, 결국엔 어떤 파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192쪽)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를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박은정 옮김┃문학동네 펴냄┃15년 10월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목소리는 저마다 다른 고유성을 가졌으며 그것은 개별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고통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증언될 때, 전쟁이란 참화는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체현된다. 제2차세계대전에 100만 명이 넘는 여성이 동원되었고 이 책은 그중 200여 명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책들을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장르의 이름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야말로 진실의 본질에 닿고자 하는 문학의 소명과 관련 있다. 200여 명의 여성이 놓여 있던 과거와 현실의 장소에서, 저자는 개별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처음 사람을 죽이고 엉엉 울어버린 소녀, 첫 생리가 있던 날, 적의 총탄에 다리가 불구가 돼버린 소녀, 전장에서 열아홉 살에 머리가 백발이 된 소녀, 전쟁에 나가기 위해 자원 입대하는 날 천연덕스럽게 가진 돈 다 털어 사탕을 사는 소녀, 전쟁이 끝나고도 붉은색은 볼 수가 없어 꽃집 앞을 지나지 못하는 여인, 전장에서 돌아온 딸을 몰라보고 손님 대접하는 엄마, 딸의 전사통지서를 받아들고도 밤낮으로 딸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늙은 어머니…(옮긴이의 말, 556-557쪽) 


전쟁에 동원된 여자들은 모두 패자다. 이데올로기, 승전의 환호, 전쟁영웅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전쟁의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저자는 이 이야기들에게 “영혼에 대한 이해”라고 이름 붙인다. 자칫 잊힐 뻔했던 그들의 역사는, 여성에 대한, 인간에 대한 민낯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이나 한 나라의 역사, 영웅들의 인생역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를 쓴다.(90쪽)


전쟁, 그건 끊임없는 장례식이야.(487쪽)







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 지음┃삼인 펴냄┃15년 11월 



슬픔의 형식을 넘어서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혹은 시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가졌다면 황현산을 찾아야 한다. 참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면서도 마땅한 울음을 감내하고 있지 못하다면, 혹은 울음의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황현산이 소개하는 시인들을 만나야 한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애의 극한이 잊힐”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인들은 속절없이 시를 썼다”. 속절없음의 숙명으로 시인은 참화의 시대를 산다. 참화의 시대에 “이 죄악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시를 읽는다.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현산에게 시는 단지 ‘슬픔의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현실의 비참함이, 우리들의 죄악이 너무 크고 완고하기 때문에, 시는 형식을 넘어 하나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우리를 한껏 추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황현산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슬픔은 잊혀도 이 슬픔의 형식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문학이 늘 그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부적이다. 그러나 이 부재의 형식조차도 지금 우리에게는 사치가 아닌가. 형식을 말하기에 우리의 현실이 너무 비천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마주한 것은 죽음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악이기 때문이다. […] 

숨쉴 때마다 들여다보는 핸드폰이 우리를 연결해주지 않으며,힐링이 우리의 골병까지 치료해줄 수 없으며,품팔이 인문학도 막장드라마도 우리의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실천은 지금 이 자리의 실천일 때만 실천이다. 진정한 삶이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 모양으로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다.(97-98쪽)








그리고 2015년  나의 저자 







ⓒ박대성



서경식


“서경식에게 진정한 시란 패배할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운명적인 정서,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도 보이지 않지만 그대로 갈 수밖에 없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시의 힘≫(현암사, 2015)에 붙인 문학평론가 권성우의 글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덧붙여 그것이 곧 서경식이란 존재의 태도이자 양태라고 생각한다. 서경식의 책은 언제나 ‘올해의 책’이다. 






ⓒ최재웅



안희경


그는 질문하는 사람, 세상의 구원을 열망하는 구도자, 마음의 좌표를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다. 올해 출간된 ≪문명, 그 길을 걷다_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이야기가있는집, 2015)는 그의 두 번째 대담집으로, 세계 지성 11인과의 만남을 위해 떠났던 22만 리 길의 여정이 담겼다. 그리고 세 번째 대담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_‘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로 이어졌다. 이 대담은 내년에 책으로 만날 수 있겠다. 세계 지성의 혜안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그로부터 촉발된 질문의 궤적이 소중했다. ‘미래’를 묻고 ‘현재’로 답한다. ‘나’에게서 시작하여 ‘당신’에게로 흐른다. 그렇게 그 궤적을 따라 걸을 때, 거기서부터 우리도 구원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