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추도예배를, 이번엔 천안 누나네 집에서 드렸다. 먼길 오가느라 몸은 지쳤는데, 가슴은 더욱 생생히 그날을 추억한다. 아니, 정신은 지쳤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79년 4월 3일, 아버지는 소천(召天)하셨다. 아버지는 암을 앓으셨고, 죽음 직전 예수를 영접하셨다고 한다.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우는 누나를 달래곤 하셨다. 난 아버지의 냄새가, 가래 끓는 소리로 탁하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싫었다. 담배 냄새 절은 삼촌들이 얼굴을 부벼대는 것도 싫었다. 집앞 골목에서 세발 자전거를 타다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다. 난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뻤던 것 같다. 아, 무서운 아버지께 불려가 그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구나, 저 친척들도 이제 우리집을 떠나겠구나 생각했다. 주정하던 삼촌들 몰래 실실 웃기도 했던 것 같다. 훗날 지독한 가난을 만날 때마다, 밤새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때 내가 버릇없이 웃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래서 우리집이 벌받는 것이라고 자책했다.
아무튼 난, '두려움'이란 것을 그때 처음 만났다. 어머니의 곡소리,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힘겨워 하던 두 살 터울 형의 슬픈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낯선' 두려움이다. 비포장 도로를 두어 시간 달려 장지에 가기까지, 난 몇 번 토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기까지 멀미를 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마다 그 막막한 슬픔을 생각했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차를 타면 언제나 잠을 청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며, 천안을 오가며, 특히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정 넘어 도착하여 곤히 잠든 예지를 안아 옮기면서 그때의 시간들을 복기한다. 스치듯 재연되는 회색빛 골목, 우리집 담장 밑으로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난 아침마다 일어나 그 민들레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마치 내 딸 예지가 그러는 것처럼. 그런데,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그 민들레는 잊기로 했다. 잊기로 했던 그때의 다짐이 생각났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첫째딸 예지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겪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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