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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노트 008(2013/03/11),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서 「기독교적 숙고」까지_

Soli_ 2013. 3. 11. 01:55

★관련 포스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은수연 지음|이매진2012)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수잔 브라이슨 지음|여성주의번역모임'고픈' 옮기|인향2003)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이현주 지음|작은것이아름답다|2009)

기독교적 숙고(C. S. 루이스 지음|양혜원 옮김|홍성사|2013)







0. 두 주 만에 쓰는 독서노트인데, 책이 적다. 기고와 마감 때문에 많이 읽을 수도 없었지만, 특히 은수연과 수잔 브라이슨의 책이 나를 계속 사로잡았다. 두 책 모두 처음 읽는 책이 아닌데도 내겐 너무 버거웠다. 오마이뉴스 서평에 이렇게 썼다. 



사실 어떤 책은 어설픈 서평보다는, 내용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훨씬 좋을 수도 있겠다. 이번 독서노트의 책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책은 적은데 인용이 제법 많아 어느 때보다 노트가 길다. 




1.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친족 성폭력 생존자 수기이다. 마침 3·8 세계 여성의 날 '올해의 여성운동상'에 이 책의 저자인 은수연 씨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매체에 이 책을 소개하는 서평을 썼고, 조금 다른 버전으로 "오마이뉴스"에도 기고했다. 첫 번째 서평은 또다른 성폭력 피해자인 철학자 수잔 브라이슨의 책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와 비교하여 트라우마의 문제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고, "오마이뉴스" 서평은 우리나라 성평등 문제와 성폭력 현실을 최대한 부각시키고자 했다. "오마이뉴스" 서평은 메인에 올랐고, 다른 하나는 잡지가 발간된 다음 블로그에도 올려놓겠다.

실명으로 책을 내겠다고 하던 수연도 이것저것 고려하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수연'이라는 필명으로 독자들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의 추천 글, 8면)

우리는 피해자들을 생존자(survivor)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약하고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치유를 향한 용기와 지혜, 그리고 좌절과 희망을 반복하면서 누구보다 질긴 생명력과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8-9면)

견뎌내지 못할 아픔은 없고, 끝이 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을.(14면)

성폭력 피해자의 70~80퍼센트가 정신 질환에 걸린다고 떠들어대는 정신과 의사의 말도 상당히 불쾌하다. 소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폭력을 당한 여주인공들을 볼 때도 심기가 불편하다. 그 여자들은 엽기적이고, 침울하고, 어둡고, 우울하게 살면서 연쇄 살인을 하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다 극의 말미에 가서는 엄청난 비밀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그 여자는 어릴 적에 성폭력을 당했다'라는 이야기로 여주인공의 문제 행동을 이해시킨다.(19-20면)

그것도 겁이 났지만 그때 나를 집으로 돌려보낸 여자 교수가 한 말이 계속 생각났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지 않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그 오랜 시간 그렇게 지냈어요?" 나중에 나를 데리러 온 엄마에게는 "이 아이도 오랜 시간 그 일을 당해서 그걸 즐긴 게 아닐까요?"라고 했다던데, 진짜 그렇게 말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24면)

계속해서 주먹은 온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눈, 코, 입 가릴 것 없이 날아왔지만 그 어디보다도 진실을 말하는 입을 계속 쳤다.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다. 도와달라고 계속 외쳤다. 그런데 아무도, 정말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자신을 아빠라고 했고, 그 '아빠'라는 말 한마디에 머리채가 집힌 채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맞으며 끌려가는, 그것도 강간을 당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여자 아이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28면)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직업은 목사다. 그 사람은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수요 예배를 인도하려 나갔다.(31면)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내게 일어나는 일이 모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성폭력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나를 모든 위험에서 지켜줘야 하는 '아빠'라는 사람에게. 지진보다 더 큰 충격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지탱해주는 땅바닥이 흔들리는 지진은 사람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거대한 공포감을 준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살아갈 곳, 먹을 것, 입을 것 등 기본적인 생존 기반을 제공하고, 애정을 주고받는 인간관계를 처음 경험하게 하는 땅과 같은 존재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땅이고, 신이고,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모든 것이다. 그런 존재가 내게 성폭력이라는 짓을 할 때 나는 '이게 도대체 모슨 일이지?' 했다. 그러다 엄마와 가족들도 알게 됐지만, 그 사람의 주먹질과 칼을 든 협박에 다 입을 닫아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온 가족을 대신하는 희생양이 됐다. 그 사람의 폭력을 잠시 가라앉히는 도구로 이용도 됐다. 온 가족의 삶을 유지하려면 희생돼야 하는 그런 존재.(32-33면)

친족 성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있는 가정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거나, 너무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33면)

엄마는 늘 '너 때문에'라는 말을 했다.(45면)

그때 알았다. 나는 참 자유로움을 좋아하고,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53면)

가까운 친구들에게 내 삶에 관해 말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치유를 위한 첫걸음, 첫 호흡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54면)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동화 속에서 힘들게 살던 여주인공은 고통에서 벗어나면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로 끝이지만, 나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밝은 겉모습이 다 덮을 수 없는 것들이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그건 무서운 거다. 무엇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고, 없앨 수 없다. 보상받을 수는 더더욱 없다. 지금 내가 자유롭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몸, 내 마음, 내 영혼, 내 시간에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엷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56-57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괜찮은 척 하기를 멈췄다. 아파하고 슬퍼하는 대로 나를 내버려뒀다.(61면)

아침에 눈을 뜨니 이제까지 살던 것하고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아빠는 없어졌다. 내게 아빠라는 존재는 없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내 팬티 속에 손을 넣은 첫날. 나는 이제 그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65면)

당신의 연인이 나처럼 피해를 겪었다면 당신을 많이 힘들게 할 수 있다. 버텨줄 힘이 없다면 그 사랑 시작도 하지 마라.(75면)

세살이 돋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76면)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내가 '임신'이라는 것을 했단다. 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지울 일과 병원에서 어떻게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임신을 설명해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었다.(78면)

정말 '순수한 악'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말들이다.(85면)

아빠라는 사람이 내게 준 상처는 몸에 남은 상처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 영혼, 내 시간들에 입힌 상처에 견주면 몸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경험해야 하는 것들 중 내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 어디 풋사랑이나 첫사랑뿐이겠는가.(99면)

그 사람은 그때 나를 자기 손아귀에 완전히 가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무시하기'라는 나만의 방법을 통해 그 사람이 내게 저지르는 짓거리와 상관없이 내가 그 나이에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들, 누려야 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열심히 누렸다.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그때 나로서는 최선이었다.(104면)

거꾸로 처박힌 십자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예수님을 진짜로 믿기 시작한 건.(106면)

수치심은 가해자에게나 던져주고, 당신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먹어야 할 밥을 먹고, 자야 할 잠을 자기 바란다. 그러다 보면 당신이 겪은 일의 강도를 능가하는 당신 내면의 힘이 자연스럽게 일깨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오늘, 지금 당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116면)

"경험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 아니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이다."(올더스 헉슬리, 116면)

그 사람은 그때도 그런 것처럼, 지금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목사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 사람이 한 짓들이 내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기도하고, 울부짖으며, 숨쉬고, 결국은 탈출하고, 살아남았다.(135면)

그러나 간신히 살아남은 정도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나는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자연스럽게 죽을 수만 있으면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왜 그런 느낌이 내 속에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때부터 죽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그 이유를 확실히 알고, 치유의 길이 있다면 제대로 걸어보고 싶다.(135면)

아프다는 말밖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무슨 수식어를 붙이거나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때의 내 아픔이 가볍게 느껴질까봐 싫다.(146면)

몇 년 뒤 '치유하는 글쓰기'에 참여해 내가 그동안 말해온 내용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말하기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보여주는 과정이었다면 글쓰기는 나 자신에게 나를 보여주는 과정 같다.(189면)

상처를 노출하는 것은 단순히 상처를 열어 보이고, "마이 아파"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상처에 앉은 딱지와 이미 새살이 돋아 볼룩하게 솟아오른 내 일부를 보여주며 "이 약 써보세요. 이런 방법이 참 괜찮네요"라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글을 통한 노출이 나를 이런 단계로 건너가게 해줬다.(190면)

"잘 익은 상처에선/꽃향기가 난다."(복효근, 205면)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데이비드 그리피스, 227면)

수연, 이제 '용기'를 내기 위해 떠난다.(227면)

할아버지는 더는 자기 상처가 자신을 부끄럽게 할 수 없다고 했다.(234면)

끈질기다, 이것들. 지겹다. 이제 이것들과 이별하고 싶다.(236면)

아빠, 저는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힘입어 아빠를 용서합니다. 그렇지만 아빠를 만나는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빠. 18년 만에 불러봅니다. 건강하세요. 아빠의 하나밖에 없는 딸 수연 올림.(244면)

"누나 책 내려고 해"라고 했을 때, "이왕 쓰는 거 잘 써. 그리고 남자들이 많이 읽을 수 있게 써봐"라고 격려해준 내 동생. 자신들도 상처가 깊을 텐데 나를 더 배려해주는 내 형제들, 그대들도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247면)




2.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은수연의 책에 비해 상당히 절제된 언어로 쓰여졌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럽기는 이 책도 마찬가지다. 수잔 브라이슨은 철학자였지만, 철학적 사유와 근본적 믿음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트라우마는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과 동행하는 길을 찾는다. 이 책은 무엇보다 '이야기'와 '관계'로 규정되는 '나'의 존재론에 대해 또다른 성찰과 통찰을 갖게한다. 이제 난, 누군가의 고백을 들으며, '이제 그 트라우마에서 좀 벗어나렴'이란 말,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단순한 사실은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희망이기도 하다. 절대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성폭력 생존자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다. 인향이라는 출판사에게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다. 이 좋은 책이 어디선가 다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이 책이 한 권 더 있는데, 출간하기를 희망하는 출판사가 있다면 기꺼이 드리겠다. 나중에 잡지가 발간되면, 이 책의 서평도 블로그에 올려놓겠다. 

결국에 다다른 곳은 윤리가 미치지 못하는 땅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사태들과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곳에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8면)

실제로 내가 전혀 낯설고 역설적인 것과 마주하게 되자, 철학은 그런 세상 속에서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8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트라우마(Trauma,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인격의 붕괴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일컫는다. 또한 폭력이나 어떤 사건에서 비롯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나 상해를 뜻하기도 한다)가 내 의식과 무의식 속에 여전히 들러붙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는 내 몸의 감각 하나하나 속에도 숨어 있어서, 무엇이든 트라우마의 사건이 재현될 수 있도록 방아쇠를 당겨 주기만 하면, 언제든 또다시 악몽과 같은 트라우마의 기억이 내게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9면)

성폭력에서 회복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가장 어려웠던 일들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었다.다른 사람들은 내가 겪은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았고, 더군다나 그들은 습관적으로 내게도 그 일을 잊어버리라고 충고했다.(9면)

트라우마를 겪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트라우마로부터 회복하려면, 자신들과 공감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한다.(10면)

트라우마 사건을 증언하는 의사 소통의 행위는 트라우마 생존자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의 기억들을 변형시켜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그 이야기는 트라우마 생존가가 가지고 있는 자아 관년과 세계관 속으로 통합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 증언을 통해 생존자는 다른 사람들을 믿고 신뢰하는 유대관계를 다시 맺게 되며 공동체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된다.(11면)

트라우마의 경험을 말하기에 앞서 트라우마를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문제는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이 보여주는 역설들을 우리의 이성으로는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11면)

트라우마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들을 어떤 식으로 산산이 부수는지를 보여주겠다.(13면)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어떻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 깨달을 수 없다.(15면)

내가 그 어떤 잘못된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21면)

성폭력이 많은 이들에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폭력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22면)

나를 포함해서 철학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목소리로 글을 쓰도록 훈련받아왔고, 자신의 이야기는 한쪽에 치우친, 학문적 담론에는 부적당한 것이기에 멀리하도록 훈련받았다.(26면)

그러나 나의 경우, 이러한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했다.(31면)

지금껏 배워왔던 방식을 거부하기로 한 결심은 상처받지 않은 관찰자의 세계관을 버리고 상처받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폭력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31-32면)

몇몇 신앙심 깊은 친지들은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빴으나, 내가 견뎌야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다.(34-35면)


내가 가해자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내게 존재하는 두려움 때문에 분노하기가 불가능했던 것 같았다.(39면)

트라우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한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43면)

성폭력은 그것을 직접 경험한 여성들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겪어보지 않은 모든 여성들에게도 고통을 준다.(47면)

성폭력이 파괴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지어 성폭력 당시에는 전혀 가능해보이지 않았지만, 성폭력 이후에 더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50면)

지금 나는 시간이 오래 흐르면 고통은 결국 상처내기를 멈춘다고 말할 수 있다.(50면)

"과거의 일이 그대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일이 기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다듬어져야 한다."(안드레아스 후이센, 73면)

트라우마의 기억과 이야기 속의 기억으로 구분해서 보려고 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기억은 피해자의 몸에 변화를 일으키고, 단편화되어 있고, 감각적이고, 갑자기 떠오르고, 주기적이고, 생존자의 통제 범위 밖에서 있으며, 반면 이야기 속의 기억은 언어 형식으로 나타나고, 보다 일관적이며, 트라우마의 기억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존자가 통제하기 쉬운 것으로 보인다.(74면)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기억을 만들어간다.(75면)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그녀 자신으로서 말하기를 고집한" 오드리 로드를 따르려 노력할 것이다.(83면)

"기억이란 하나의 행동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는 행동이다."(피에르 자네,153면)

오직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서 살아남기를 원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은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해야만 했었다.(154면)

자신들이 겪은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다시 말함으로써 미래의 가능성들을 열게 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라는 것이다.(230면)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통제력을 되찾기를 포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250면)

트라우마에서 회복된다는 것은, 일관된 자아란 (또는 그 의미가 변치 않는 사건이란) 처음부터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일이다.(251면)


3.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곁에 두고 읽는 책들이 있다. 주로 마음이 무너지거나, 마음을 곧게 해야 할 때 찾아 읽는 책들이다. 물론 성경이 있고, 피터슨의 메시지가 있다. 김예슬의 작은책 <김예슬 선언>과 헤세의 <삶을 견뎌내기>, 심보선, 문태준의 시집이 있다. 그리고 이 책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가 있다. 이 책도 한 매체에 소개하기로 했다. 이 서평도 잡지가 발간된 다음, 블로그에 올려놓기로 한다.





그나저나 이 책은 내용도 좋지만 참 예쁘다!


끊임없이 바쁘게 돌아가되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기계들과 함께 살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연구하고 그 길을 찾아보는 것이 바로 너희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우리 세대가 이른바 좌.우 이데올로기(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의 갈등과 싸움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 것인가, 그 길을 찾으며 살아왔듯이.(29면)

그러니 이제 너는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조급한 걸까?’를 묻는 대신,‘어떻게 하면 기계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기계를 쓰되 기계처럼 살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좋겠구나. 알아두렴. 사람은 어떤 과제를 안고 살아가느냐가 그 과제를 풀었느냐 풀지 못했느냐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36면)

내가 보기에 넌 참 바람직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래, 그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렴. 그것이 너를 훌륭한 사람으로 이끌 테니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그가 찾은 ‘대답’이 아니라 그의 가슴에 묻혀 있는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해.(41-42면)

무엇보다도, 화는 불이고 그 불을 타오르게 하는 땔감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네 '생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두는 게 좋겠다.(84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은 정반대로 다른 일이야.(114면)

말을 하는 쪽과 듣는 쪽이 마주 앉아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이지. 말을 하는 쪽과 말을 듣는 쪽이 고정돼 있어서, 한쪽은 말을 하기만 하고 다른 쪽은 듣기만 한다면 그건 ‘대화(對話, 주고받는 말)’가 아니거든.(130면)

뭐든지 노력하면 된다는 헛소리에 더 이상 속지 마라. 그보다는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정말 노력하면 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일인지, 그걸 잘 가려서, 노력으로 되는 일이면 열심히 해보고,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면 빨리 손을 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 아니겠니?(179면)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네 속도가 있으니 네 속도로 살아가렴. 저 나무늘보가 원숭이들 틈에서 끄떡없이 제 삶을 즐기며 살아가듯이.(199면)

새만금에서 벌어지는 '돈 놀이' 때문에 죽어가는 갯벌한테도 미안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어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후배인 너희들한테 정말로 미안하다. 네 말대로, 새만금 사업(어른들이 말하는 '사업'이란, 그것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을 뜻한다)은 그동안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공사를 계속해서 설계한 대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아서,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구나.(215면)

아마도 이 일로 해서 너희가 배우게 될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하다가 잘못된 줄 알았으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그만두는 것이, 잘못을 얼버무리고 다른 구실을 만들어서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옳다는 그런 교훈일 게다. 제발 부탁한다. 너희는 일이 잘못된 줄 알았으면 돈이 얼마 들었든 간에 당장 그만둘 줄 아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다오!(216면)

세계에 속한 모든 나라들이 저마자 제 모습을 유지하고 제 색깔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만 해.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정치로 문화로 경제로 독립하여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건강한 세계화는 이루어지는 거란다.(223면)

과학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도 못하고 더 나쁘게 만들지도 못해. 세상을 지금보다 나쁘게 만들거나 좋게 만드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람이거든. 사람이 세상을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나쁘게 만들 수도 있어. 아니, 실은 사람만이 그럴 수 있지.(235면)

틱 낫한이라는 베트남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사람들 가슴에 두려움이 남아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또 인도의 간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네가 먼저 네 가까운 이웃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는 얘기지.(272면)


 4. 기독교적 숙고  루이스의 신간이고 "뉴스앤조이"에 서평을 썼다.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 늘 즐거웠다. 삶이 힘들 때, 좌절과 고통 속에 있을 때, 갈등과 번민에 휩싸일 때 유독 그의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고, 그때마다 루이스는 나를 편안한 안식의 자리로 초대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용기를 갖게 하였고, 그러면서도 너무 진지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은수연과 수잔 브라이슨의 책에 휩싸여 고통스런 며칠을 보내기도 했고, 진로 문제로 번민하는 나나들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 내게 다가온 루이스가 새삼 고맙다. 





책이 좀 비싸다. 허나 참 잘 만들었다. '홍성사'스럽고 '홍성사'답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문학'이라는 것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고유한 문학적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7면)

기독교 문학의 성공 여부는 기독교적인 원칙을 따랐느냐 따르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와 결코 관련이 없습니다.(8면)

현대 비평에서 사용되는 핵심 용어가 무엇입니까? '파생적'에 반대되는 '독창성', '관례'에 반대되는 '즉흥성', '규칙'에 반대되는 '자유'입니다. 위대한 저자들은 혁신가, 선구자, 탐험가들이며, 형편없는 저자들은 학파를 이루고 전형을 따릅니다. 혹은 일류 저자들은 언제나 '족쇄를 부수고' '속박을 깹니다.' 그들에게는 개성이 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입니다.(10-11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12면)

시인 존 던은 예수님이 웃었다는 얘기를 우리가 들어 보지 못했지만, 복음서를 읽으면서 그분이 미소 지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란 어려우며 그러한 믿음에 전율한다고 말합니다.(12면)

단지 피조물에게 해당하는 최고선은 피조물다운, 즉 파생되거나 반사된 선일 것이라는 점입니다.(17면)

문화가 그토록 보잘것없는 것이라면, 당신이 삶에서 그렇게 많은 부분을 문화에 할애하는 현실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26-27면)

어느 정도 영적인 자만심을 느끼며 저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춘 상태로부터 아슬아슬하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회심하기를 거부했던 커다란 이유가 많은 찬송가에 나타나는 '감상적이고 값싼 느낌'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그 저급한 찬송가들이 감사하기까지 했습니다.(29면)

사람이 겸손을 가장할 때만큼 교만한 때가 없습니다.(30면)

후커는 양극단을 피하고 성경이 단순 명백하게 말할 때는 그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만, 침묵을 지키거나 모호하게 말할 때는 교회의 전승에 자문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경과 전승 모두 명쾌한 해설이 필요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답하지 못할 경우는 마지막 세 번째 권위인 인간 이성에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옮긴이 주, 32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비극은 일종의 상처였습니다. 관객은 비극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고통을 즐깁니다. 이는 '가련한 미친 짓'입니다.(33면)

따라서 어떠한 직업이든 돈이 필요해서 일한다는 것은 결코 근사하지는 않더라도 소박하고도 순수한 동기입니다.(41면)

저는 여기서 '선하다'(엡 4:28)라는 말이 '무해하다'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특별히 고상한 무엇을 암시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41면)

개인적으로 문화가 제가 무엇을 해주었는지 자문해 볼 때, 그 대답으로 가장 명백한 진실은 상당한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은 그 자체로 서나고 고통은 그 자체로 악하다는 사실을 저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43면)

저는 갈망을 기꺼이 '흘러넘친 종교'라 부르겠습니다.(47면)

어떤 사람에게 모방은 좋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문화는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는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47-48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는 않아도 그 행위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금 바라는 바처럼 문화적인 활동이 무죄하고 심지어 유용하기까지 하다면, (허버트의 시에 나오는 방을 청소하는 일처럼) 주께 바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49면)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도덕을 발견했다고 선포하지 않습니다.(88면)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하늘에 새로운 태양을 띄울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99면)

선이란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라고 믿는 한 우리는 지도자들에게 '비전', '역동성', '창조성'과 같은 자질을 요구합니다. 만약 우리가 객관적 견해로 돌아간다면 덕, 지식, 부지런함, 노련함처럼 훨씬 드물면서도 훨씬 유익한 자질을 지도자들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비전을 사라고, 비전을 판다고 사방에서 난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루하루 정당한 소득을 위해 일할 사람, 뇌물을 거절할 사람, 없는 사실을 지어 내지 않을 사람, 자기 일에 숙달한 사람이 아쉽습니다.(149면)

1929년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C. S. 루이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기독교의 분열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한다 해도 (그리고 그 말들이 사실이라 해도), 하나님의 자비로 기독교 안에는 방대한 공통 기반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루이스는 믿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섬김은, 어느 시대건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되었던 신앙-그가 종종 '순전한(mere)' 기독교라고 표현한 '방대한 공통 기반'-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편집자의 말, 325면)

그는 상당히 다채롭게 '순전한' 기독교를 변호했는데, 변호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가장 취약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변호했고, 청중에 맞게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다소 이질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이 기독교인의 '숙고'에서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했다.(편집자의 말, 325-326면)


5. 그리고 다음 순서. 빌린 책, 구입한 책, 선물/증정받은 책.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