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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재개

Soli_ 2013. 2. 15. 18:05


[김규항] 재개

http://gyuhang.net/2613


한해 넘게, 좌판 인터뷰만 진행하며 내 글은 쓰지 않았다. 트위터도 대선 몇달 앞두고 그만두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유주의 재집권에 올인하는 현실엔 분명히 반대했지만, 대세를 돌이킬 수 없으면서 그렇게라도 희망을 가져보려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세는 자유주의 세력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이명박에 대한 반감이 만든 거라 쓰나미처럼 강력했다.


전에도 밝혔듯이 나는 자유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 자체를 반대한 건 아니다. 내가 반대한 건 ‘이명박 정권 교체’ 혹은 ‘박근혜 정권 저지’를 위한 선거연합이 실제로는 자유주의 세력으로 ‘흡수통합’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다. 진보정치의 거개가 자유주의로 넘어가거나 무너졌고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조직 노동운동 역시 상당 부분이 자유주의화하거나 무너졌다.


좌파 성향이면서 문재인을 찍은 사람들은 문재인 자체가 진보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래도 박근혜보다는 문재인이 진보적 견인이 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견인의 힘이 무너져버렸으니 설사 문재인이 되었다해도 크게 다를 건 없어진 것이다. 이번 대선이 최악의 패배인 건 박근혜가 당선되어서도 문재인이 낙선해서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이건희, 정몽구 등 재벌과 지배계급은 최선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박근혜가 되는가 문재인이 되는가가 아니다. 박근혜로 대변되는 보수정치든 문재인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든 그들의 관리 영역이니.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들의 관리 영역 밖의 혹은 관리를 거스르는 정치세력의 존재다. 진보정치와 조직 노동운동을 무력화함으로써 그들은 오랜 숙제를 해결했다.


재벌과 지배계급의 사회적 지배력은 한층 더 강화되고, 한국 정치는 미국식 양당제로 치달려가게 되었다. 부시는 우파, 오바마는 좌파인, 그래서 이놈이 되든 저놈이 되든 대다수 입장에선 별 차이가 없는, 그럼에도 그 차이 아닌 차이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하는 허망한 사회로 말이다. 앞으로 5년이 모든 걸 결정할 것이다. 5년을 또 다시 모든 문제를 박근혜에게 돌리며 자유주의 세력의 재집권에 올인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고, 현실을 직시하며 현명하게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흐름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수출 의존에 높은 금융개방도, 재벌의 하청계열화 구조인 현재의 한국경제가 기댈 곳은 노동계급의 희생뿐이다. 조직력이 강한 기존의 대공장 정규직은 중산층 생활을 가능하게 하여 체제내화하고 그외 모든 노동자와 청년들(새로운 노동자들)을 비정규화하는 것이다. 결국 대다수의 삶은 갈수록 더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구조는 박근혜는 물론 문재인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그 구조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인품, 진정성, 선의는 그 구조를 넘어 존재할 순 없다. 노무현이 사람이 나빠서 ‘삼성 공화국’을 만들고,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매각하여 오늘의 비극을 만든 건 아니었다.


그 구조를 뛰어넘는 급진적 흐름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달라질 게 없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가 있는 법이고, 지금 한국 사회가 딱 그렇다. 지나치게 막막해할 건 없다. ‘현실의 정직함’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미 ‘정권 교체’, 혹은 다른 어떤 기만적인 이름의 덮개로도 덮어둘 수 없을 만큼 깊고 심각하다.


이미 한국은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살아내기 힘든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꺾여가지만 그 절망과 낙심이 바깥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폭발적일 수밖에 없다. 폭동을 일으켜도 시원치 않은 처지에 있는 한국 청년들이 지금은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감동하고, 안철수의 책을 읽고 ‘하루 네 시간만’ 자야겠다 결심하지만 그런 뺑끼칠이 대체 얼마나 가겠는가. 결국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 폭발들이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고 사회적 반도을 만들거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자본과 지배계급은 이미 그런 현실의 흐름을 읽고 긴밀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를테면 대선 기간 동안 박근혜까지도 ‘경제 민주화’를 들고 나오게 한 건 바로 그 폭발의 위험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자유주의 세력과 이런저런 ‘진보인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문제를 이명박과 박근혜 탓으로 돌려 진실의 전모를 덮고 저항의 에너지를 희석시키는 자본과 지배계급의 든든한 우군이다. 그렇다면 좌파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은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세력을 비판, 폭로만 하고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자유주의 재집권이 현실적 최선'이라는 일반 정서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봄에 책을 내면 ‘좌파시민행동’이니 ‘정치학교’니 산발적이고 실험적으로 내비쳤던 활동들을 체계화할 것이다. 좌판 인터뷰는 30회로 마감하고 칼럼을 재개하기로 했다. 물론 규항넷도 서서히 활발해질 것이다. 정말이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