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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김영하-조영일 논쟁: 다시 불거진 문학 논쟁에의 관심

Soli_ 2013. 2. 1. 04:13

최근 김영하의 소설 <옥수수와 나>(2012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를 읽은 김에, 2011년에 있었던 '김영하-조영일의 문학 논쟁' 관련 두 개의 글을 스크랩해둔다. 나의 글은 아니고, 내가 종종 방문했던 블로그의 글들이다. 나는 이들의 문학 논쟁을 매우 관심있게 관전하였고, 그들의 품격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김영하는 소설가의 존재론적 측면을 주로 말했다면, 조영일은 문학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였다. 존재론적이건, 현실 참여적이건 그들의 관심은 어떤 문학적 소명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논쟁이, 당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과 맞물리면서 일방적인 '김영하 비토'로 이어졌고, SNS 상에서 그는 치욕에 가까운 모멸을 겪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논쟁은 정점에 미처 오르기 전에, 서로의 감정만 상한채 마무리되었다. 아무튼 논쟁은 조영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듯 보였으나(주류 소설가인 김영하가 재야의 문학평론가인 조영일의 내공을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난 되려 이 논쟁 이후 김영하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 <옥수수와 나>는 두 번째 읽었다. 이상문학상, 받을만 했다. 

 

김영하-조영일(소조) 논쟁 관련 글





[雨香] 김영하-조영일 논쟁: 다시 불거진 문학 논쟁에의 관심

http://blog.daum.net/rainaroma/16098394



사실 얼마전 문학계에 흥미진진한 논쟁이 하나 있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대변되는 소셜네트워크(SNS) 사회 답게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를 통해 논쟁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카페, 블로그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다. 물론 이런 논쟁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끝나버렸지만,  논쟁이 끝나고 열흘이 넘어서야 이 논쟁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논쟁의 주역은 소설가 김영하와 비평가 조영일이다. 김영하는 2000년대 주목받던 신인작가였고, 지금은 중견작가라 할 만큼 자신의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조영일의 이름은 덜 알려져 있지만 고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비평고원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소조라는 닉네임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독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적인 독자들에게는 김영하가 인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에게는 소조가 더 친근할 것이다.

 

논쟁의 시작은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김영하의 신춘문예 비판에서 발단이 되었다. 김영하는 작가란 '타인이 아닌 자기자신의 긍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조영일은 작가세계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신춘문예에 목메기 보다 차라리 영민한 한 명의 독자가 되라고 권한다. 그리고 현 문학권력 제도내에서의 작가로써의 긍지는 불가능하다가 말한다. http://cafe.daum.net/9876/ExU/10234

 

이런 논쟁 와중에 최고은씨 사건이 불거지면서 둘의 논쟁은 조금 더 구체화된다. 본격적인 작가론, 작가와 세계와의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 김영하는 '작가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조영일은 예술가들의 실제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김영하는 조영일을 '예술을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삼으라고 선동하는 비평가'라고, 조영일은 김영하를 '낭만적 예술론에 빠져 배부른 소리'라고 비판한다.

http://cafe.daum.net/9876/ExU/10264

 

결국 김영하가 트위터와 블로그를 그만두고 집필에 전념하겠다며 이 논쟁은 끝났다. http://cafe.daum.net/9876/ExU/10265

 

 - 논쟁의 과정을 아주 잘 설명한 한국일보 기사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02/h2011021418362284210.htm  )

 - 트위터리안과 조영일의 인터뷰 : http://cafe.daum.net/9876/ExU/10271

 - 기타 기사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3516.html

 

이번 논쟁은 어떻게 애초부터 성립하기 힘들었다. 모호한 언어를 쓰는 작가와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비평가의 싸움은 언제나 비평가가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작가와 비평가의 논쟁이라는 점에서 작가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다.  작가는 언제나 꿈을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대중 독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쟁의 주제이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예술론에 입각했던 낭만주의 문학론과 한국문학권력 비판에서 시작한 현실주의 예술론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 문제는 사실 많은 문인들이 달려들만한 논제였다. 그러나 문학논쟁은 곧 막을 내렸고 내노라 하는 작가, 비평가들은 그 논쟁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에는 21세기 소셜네트워트 사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기존 문인(비평가 포함)들은 트위터나 블로그에 취약했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이번 논쟁은 의미가 있었다. 20세기 후반 불었던 문학권력 논쟁이후 처음 문학에 대한 논쟁 다운 논쟁이었으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문학권력 논쟁 당시 문학권력 비판이 문학 밖에서 이루어졌던 점이고(강준만에서 시작) 이후 비주류 비평가들의 참여(이명원 등)가 있었을 뿐이다. 주류 문단에서 김정란이 유일하게 참여했었는데 김정란에 대한 사이버폭력까지 이루어졌었다.

 

비평가 조영일은 한국문학비판을 계속 해 오고 있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그의 비평을 손에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게 될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목표 중에 하나가 신인작가들의 소설집(혹은 시집)을 매월 한 권씩 사는 것이었다. 이는 독서보다는 독자로써 한국문학의 발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실천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못했다. 항상 몰려드는 독서목록 때문이었다.


한국문인들의 년간 평균 인세수입은 300만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일의 분석을 빌리지만 문학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 내외라는 것이다. 하루키의 IQ84의 선인세가 10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문학에 대한 한국출판사는 너무 인색하다.  이런 현실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독서 이외의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