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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유철, "서평 쓰기"

Soli_ 2012. 5. 9. 01:19

<서평 쓰기>

며칠 동안, 아니 족히 열흘 정도를 박홍규의 <마르틴 부버>를 붙들고 낑낑거렸습니다. 28매 짜리 서평 하나를 후딱 끝내지 못하는 자신이 참 한심했습니다. 확실히 저는 아직 초등학교 국어 시간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국어 숙제란 대개 주어진 글의 전체의 뜻을 요약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고, 문단을 나누고, 반대말, 비슷한 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늘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전체의 뜻을 몇 줄로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십년이 흘렀지만 저는 지금도 그 문제에 늘 어려움을 느낍니다. 원고지 10-20매짜리 칼럼이라면 모를까 책 한 권 분량이라면 누가보더라도 객관적인 전체의 줄거리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일 텐데, 저는 늘 그 문제로 낑낑거립니다. 물론 저도 서평이란 누가누가 책을 객관적으로 잘 요약했는지에 대한 컨테스트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압니다. 아니 종종 서평이란 누가누가 더 개성있게 그 책을 읽었느냐란 의미에 더 가깝다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더 정확하고 더 객관적인 전체의 줄거리를 파악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적입니다. 

저의 서평 쓰기는, 시간이 아주 촉박하지 않을 땐 우선 책을 편하게 한 번 읽습니다. 두번째 읽을 때는 밑줄을 치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나 나름의 문제의식을 책에 메모합니다. 다음 단계는 컴퓨터에 메모와 밑줄 친 내용을 정리를 합니다. 제가 청탁을 받고 쓰는 서평들이 거의 인문학이나 신앙서적이다 보니 한 권의 내용을 다 정리하고나면 얼추 A4 용지로 14-15매 쯤 됩니다. 다음 단계로는 책의 내용을 정리한 파일의 요약본을 만듭니다. 이 단계에서 꼭 인용해야 할 부분을 정하고, 끄적인 메모의 내용 중에서 쓸만 한 내용을 고릅니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도 첫 문장 내지 첫 문단을 놓고 씨름을 많이 합니다. 저는 머릿속에서 서론 본론 결론을 정해 놓고 글을 쓰는 스타일이 못 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야 비로소 두뇌 시스템이 작동을 하거든요. 30매 분량의 서평을 쓰는데 대략 15시간이 소요된다고 할때 원고지 5매 정도 분량의 첫 시작 부분을 놓고 7-8시간 정도를 사용하지 싶습니다. 그때 어떤 내용으로 시작할 것인지를 두고 주로 시간을 사용합니다만 한 자도 빼거나 더할 수 없을 때까지 첫 단락을 수십 번 고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 질문을 던진다면 시원스럽게 답을 하진 못하겠습니다만, 그 첫 단락의 내용을 정하고 문장을 다듬으면서 이 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템포, 그리고 내용의 적합성 등을 구성하고 검토하는 것 같습니다.

마감시간을 훌쩍 넘기고 어제 <마르틴 부버> 서평을 완성했습니다. 28매와 10매 짜리의 각기 다른 버전으로 말입니다. 어떤 서평보다 힘겹게 썼습니다.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형님이자 벗의 책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28매 짜리 서평은 그 매체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원고인지라 애를 썼습니다. 두 원고를 각기 보내고 퇴근을 해서는 아침까지 컴퓨터를 키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몇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입니다. 소진되었다는 느낌이 드니 아무 것도 못하겠더군요. 

이번 원고를 쓰면서 평범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우쳤습니다. 너무 원고가 써지지를 않아서 계속 이렇게 툴툴거렸거든요. 
"헐~서평 하나를 상큼하게 못 끝내고 며칠째 이렇게 낑낑거린단 말인가?"
그렇게 툴툴거리다가 잠깐, 하고 멈췄습니다. 이렇게 툴툴거리는 것 자체가 교만이고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엉망진창이었던 학교 생활이, 그리고 음악 한답시고 뭐 하나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실력은 있는데 이번 글만 잘 써지지 않는게 아니라 기초가 부족하다보니 늘 이렇게 허둥거린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겁니다. 배워야 할 시기에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배우긴 했으되 기초를 다지지 못했더니 조금만 눈이 와도 교통대란이 벌어지는 딱 그 꼴이네요. 

추신:
공적 사적 영역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페이스북이기에 기고한 서평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유철 닷컴이란 홈 페이지를 중심으로 놀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원고를 쓰자마자 지인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바로 올렸는데 이제는, 특히 페이스북에서는 민망해서 그 짓을 못하겠습니다. 너도 나도 그렇게 하는 걸보면서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라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