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소금 5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빛과소금〉 2016년 1월호 '미안해, 하지 못한 말'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열다섯, 혹은 스물아홉 현지에게 내가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스물아홉 신학대학원생이었고, 너는 열다섯 중학생이었다. 나는 청년부와 중등부 담당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고, 너는 나의 제자였다. 교회 청년들과 보냈던 광장의 기억들이 아직도 선연하다. 뜨겁던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 펼쳐졌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였고, 찬바람이 불어오던 가을 끝 무렵에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효순, 미선이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을 들면서, 나는 너희들을 생각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미군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압사당하며 참혹하게 죽었다. 미군은 아이들의 확실..

엄혹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빛과소금, 131112)

빛과소금 2013년 12월호 엄혹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스무 살 예지에게,[각주:1] 1979년 4월 3일, 아버지가 암으로 소천(召天)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 그대의 할아버지였지요. 저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으니, 지금의 그대보다 한 살 어렸을 때입니다. 아버지가 투병하시던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우는 누나를 달래곤 하셨지요. 전 아버지의 냄새가, 가래 끓는 소리로 탁하게 갈라진 낮고 굵은 목소리가 싫었습니다. 담배 냄새 절은 삼촌들이 얼굴을 비비대는 것도 싫었습니다. 집 앞 골목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빛나는 모험에 대하여 (빛과소금, 130805)

★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지’는 지금 일곱 살인 저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훗날 ‘청년 예지’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영성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사랑이라는 빛나는 모험에 대하여 스무 살 예지에게, 오로지 ‘함께’가 아니면 의미 없음을 깨닫는 순간, 그녀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녀는 ‘남자’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를 가지고 있었고, 저는 ‘다른 존재’와 함께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꽤나 구체적인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선 저의 두려움만 얘기하지요.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가난의 숙명을 온몸으로 익혔던 까닭에 다른 누군가와 더불어 공동의 운명을 모색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저의 인생만으로도 벅찼으니까요. 함께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도 꽤나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만약 그..

"하루는 귀한 일생입니다" (빛과소금, 130605)

★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지’는 지금 일곱 살인 저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훗날 ‘청년 예지’에게 전하고 싶은 일상 영성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정, 사랑, 상처, 교회, 공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하루는 귀한 일생입니다" 스무 살 예지에게, 몇 해 전, 아내에게 장미선인장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조금씩 시들더니 목숨을 다했지요. 아니, 그렇게 보였어요. 그런데 올해 봄이 시작하던 즈음, 아내가 베란다 창틀에서 새끼손가락 손톱 만한 장미선인장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장미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던 자리, 어미에게서 떨궈진 생명이었을 것입니다. 일 년 넘게, 겨우내 겨울바람에 맞서 살아난 생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조그마한 유리 찻잔에..

또박또박 쓴 나의 진심 (빛과소금, 130409)

★빛과소금 5월호에 기고한 글이며, "거듭난 남자, 아내의 자리를 생각하다"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또박또박 쓴 나의 진심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과 폭행을 당해온 시절에도 먹이를 찾아 아이를 양육하며 가정을 이끌고 삶을 이어오면서 평화를 지킨 중심이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는 본성을 아직도 많이 가진 존재가 여성이죠. 그 여성이 남성에게 군국주의적, 산업적 탐욕을 멈추라고 명령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로버트 서먼이 안희경과의 대담에서 한 이야기다(, 76쪽). 평화의 근원은 늘 여성의 자리였다. 남자는 탐하고 모략하고 침탈하지만, 결국엔 여성의 품을 그리워하고 굴복한다. 어머니의 자리, 아내의 자리에서야 그 깊은 안식을 누린다. 언젠가 여성의 시대가 도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충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