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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노회찬을 부탁해 (오마이뉴스, 130216)

Soli_ 2013. 2. 16. 00:05

오마이뉴스 "노회찬, 부디 그의 겨울이 따뜻하기를"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부디, 노회찬을 부탁해

<진보의 재탄생_노회찬과의 대화>

(노회찬, 홍세화, 김어준, 진중권, 한윤형 외꾸리에2010)



2013년 2월 14일, 노회찬의 좌절

"저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로 10개월만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다시 광야에 서게 되었습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뜨거운 지지로 당선시켜주신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2013년 2월 14일, 노회찬은 대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유죄가 확정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05년 8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검사 7인의 이름이 담긴 소위 '삼성 X파일'을 인터넷에 올렸다. 대법원의 유죄 선고 논리는, 'X파일'에 실린 검사들의 이름을 보도자료를 통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면책 특권에 해당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알게 하는 건 불법이란 것이다. 대법원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지닌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하여 판결했다. 

새누리당을 포함한 국회의원 159명이 노회찬 의원에 대한 대법원 선고를,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이후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대법원은 이를 간단히 무시했다. 노회찬이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한 이날은 마침, 떡값 검사 7인 중 한 명이 박근혜정부의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받은 날이고, 오래전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한 날이기도 하다. 





숨죽여 분노하며, 다시 그의 책을 꺼내 읽다

정의담론을 말하면서도 사소한 이기심과 집착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내는, 기독교인으로 그 잘난 허영심을 붙들고 사는, 한 줌 소낙비에 흩어질 나 같은 깜냥들은 그저 숨죽여 분노할 뿐이다. 이날도 그랬다. 늦은 밤, 2010년 2월에 발간된 그의 책 <진보의 재탄생_노회찬과의 대화>을 꺼냈다. 이 책 어딘가에서 인용한 그의 말이, 책의 면지에 적혀 있었다.   

"여전히 아픈 가슴과 뜨거운 열정으로 꿈을 간직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진보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 까닭에."

이 책은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펴낸 노회찬과 진보 논객들 간의 대화록이다. 당시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져 나왔고, 노회찬은 2008년 노원구에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홍정욱에서 석패했다. 그의 진보신당도 참패했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한다. 이 책은 서울시장 선거 출마의 변, 노회찬이 진보의 꿈, 진보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보통 선거철을 앞두고 펴내는 여타 정치인들의 책과는 결이 달랐다. 홍세화, 김어준, 진중권, 홍기빈, 변영주, 김정진, 한윤형 등이 그와 진보 담론과 현실 정치를 화두로 치열하게 논쟁했다. 때로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반대편의 적보다, 날카롭고 까다로운 우리 편 논객과 함께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진보진영은 대체로 그러하고, 노회찬과 대화한 상대들이 더욱 그러했다.

소설가 조세희의 말처럼, "그는 단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본 말과는 '다른 말'을 하는 정치인"이었다. 노회찬의 부모는, 아들이 그저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아닌 아름다운 감성을 가지길 바랐다. 단칸방 하나에 다섯 식구가 모여 살던 가난에도, 그의 부모는 중학교에 입학했던 아들에게 첼로를 사주었다. 그의 예술가적 면모는, 종종 깊고 풍부한 언어적 감수성으로 발휘된다. 김어준은 그런 노회찬을 "진보적 결의와 인문학적 소양의 절묘한 동거"(120쪽)라고 추켜세운다. '예술가란 세상에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방법으로 실패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사무엘 베케트의 아포리즘처럼, 그는 예술가였고 또한 늘 실패하는 사람이었다. 





진보의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노회찬은 '10월 유신' 세대로 자랐다. 고등학생 시절,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사회과학 공부모임을 조직했던 그는, 로맨티스트였으나 연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청춘을 보냈다. 1983년 고려대학교 졸업식 날, 그는 노동자가 되어 살기로 결심한다.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다 1989년 공안당국에 의해 구속되어 1992년 만기 출소한다. 그렇게 '정치인 노회찬'의 삶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다. 불가능해 보였던 진보진영의 꿈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된 것이다.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을 살아생전에 목격하게 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6쪽)

노회찬은 늘 꿈꾸는 사람이었지만, 꿈의 낭만은 믿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4년 만에 20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했지만, 불과 3년 뒤에 벌어진 대선에서 3퍼센트 지지율로 추락했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열되고 만다. 꿈의 낭만은 산산조각 났지만 노회찬의 꿈은 더욱 강고해졌다. 

"이제까지 적지 않은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든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8쪽)

김어준과의 대화가 가장 재밌고 노회찬의 인간다운 면모를 잘 보여준다면, 진중권과의 대화는 정치인 노회찬의 꿈 "진보의 봄"을 보다 명확히 제시한다. 그가 꿈꾸는 진보는 대학 서열과 학력 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당연한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대담자 중 가장 어린 논객인 한윤형과의 대화와 가장 나이 많은 홍세화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윤형과의 대화 속에서 도리어 노회찬의 젊음은 돋보였고, 홍세화의 대화 속에 도리어 노회찬의 진중함이 돋보였다. 특히 홍세화와의 대화 속에 깃든 성찰의 무게는 매우 아프고 속상한 것이었다. 

"진보정치의 목적이 소수의 자기만족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진보하는 진보의식이 없이는 '지금, 여기서'의 삶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진보의식의 진지전은 어떻게 확장해 가야 할 것인가. 우리들의 고민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429쪽)

진보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닫는 글은, 노회찬보다 열두 살 어리지만 그를 '친구'라 부르는 우석훈이 썼다. 우석훈은 노회찬을 위한 이 책에서, 2012년 대선 전망에 있어 뜬금없이 '박원순의 시민대연정' 카드를 내비친다(만약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이 나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의 전망이 성사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덧붙이길, '대통령 노회찬'의 가능성은 0%에 가까울 것이라고 단언한다. 

미안하지만, 책을 읽은 나도 당시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다. 이 책을 통해 노회찬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지만, 도무지 그의 승리에 나의 소중한 한 표를 '허비'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회찬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떨어졌고, 심지어 한명숙도 오세훈에게 0.6%의 차이로 석패한다. 마치 한명숙이 노회찬 때문에 떨어진 것처럼, 노회찬은 여론의 숱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 책의 주요 정치적 전망도 대부분 좌절되었다. 진보신당은 다시 분열되었고, 노회찬은 스스로의 말을 거스르고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 손을 잡고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허망하게도 통합진보당은 기껏 선거 한번 치르고 또다시 분열했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노회찬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0개월 만에 국회의원직마저 박탈당한다. 그의 실패는 반복된다. 

실패한 노회찬의 책을 다시 읽는다. 이 책은 '삼성 X파일 사건'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에 쓰여진 것이다.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노회찬은 무죄를 자신했다. 정치적 전망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안위에 대한 전망도 무참히 좌절된 것이다. 진보의 봄을 기다리는 한겨울은 끝은 보이지 않고 더욱 매섭다. 노회찬을 비롯한 진보의 길을 걷는 이들이, '차마 자신에게 묻기 두려운 질문을 자신과 똑같은 상대에게 물으며'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노회찬은 이 책에서 그들과의 만남이 있으므로, '우리들의 겨울이 더없이 따뜻했다'고 적었다. 




그의 겨울이 따뜻하기를

2013년 2월, 노회찬의 좌절이 슬프고 분하다. 하지만 웃으며 떠나는 그를 보며, 그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다짐이기도 하다.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의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고. 언젠가 '정치인 노회찬'이 거뜬히 재기하는 날, 진보의 봄은 우리 곁에 성큼 와 있을 것이라고,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그때까지 노회찬을 고이 간직하여 지켜내자고 벗들에게 청한다. 부디, 노회찬을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