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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을 위한, 장발장의 위로 (오마이뉴스, 130104)

Soli_ 2013. 1. 4. 06:56


  1. 1. 제목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는 리 호이나키의 책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의 제목을 차용한 것입니다.

    2오마이뉴스와 뉴스앤조이에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을 위한 위로"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을 위한, 장발장의 위로

_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다




정의는 승리하는가? 


법이 기껏 가진 자들의 것들을 수호하는 것에 머무를 때, 그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법의 집행자이자 수호자였던 자베르가 그 확신을 잃었을 때, 그는 결국 흐르는 강물 위에 자신을 던졌다. 그렇다면 정의는 승리하였는가? 1832년 파리의 시민혁명군은 정작 시민에게조차 외면 받고 쓸쓸히, 그리고 처참한 실패에 좌절한다. 정의의 수호자였던 장발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평생 온몸으로 감당했지만, 한 수도원에서 아스라이 죽어간다. 그의 곁에는 자신의 진실을 알아준 오직 두 명, 의붓딸과 사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서 장발장의 죽음은 더욱 모질고 처절했다(장발장은 사위와 딸에게서마저 외면 받는다. 어쩌면 정의의 처한 운명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묻자. 정의는, 진실은 역사에서 승리하는가? 원작은 그 정의를 갈망하되 끝내 그 실현을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 <레 미제라블>이 그 꿈의 실현을 환상처럼 재현한다. 원작의 감동이 깊고 처연했다면, 영화의 감동은 높고 찬란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


영화의 감동은 높고 찬란하나, 원작의 감동은 깊고 처연하다. 장발장은 원작에서 더욱 초라하다. 그의 고뇌와 고통은 훨씬 힘겨운 것이었고, 그의 길은 더욱 거칠고 외롭고 좁았다. 장발장의 진실 앞에 사람들은(심지어 그의 딸 코베트도), 그리고 역사는 무심했다. 그럼에도 장발장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갔다. 정의는 현실에서 더욱 버겁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 영화를 보며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지상이 부른 탄탄오와 문정현이란 제목의 노랫말은 이러하다. 문정현은 길 위의 신부. 슬픔의 중심만을 걷는 사제. 평화는 평화 살게 놔두라고. 구럼비 발파가 대추리의 함성으로, 강정의 외침이 용산의 비명으로 하늘까지 닿는 죄악은 만대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네. 지울 수 없다네. 평화는 평화로 살게 놔두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다 181일간 옥살이를 했던 송강호 박사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정의가 불의에 의해 처형당하는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도, 1940년대 독일에서도, 그리고 지금 새 천 년의 벽두에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의를 위해서 핍박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배워야 한다. 삶은 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하는 데 있다. 나는 믿는다. 우리는 패배하고 신은 승리하며, 우리는 죽지만 신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다는 진실을.(<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168면) 


그리고 작년 이 맘 때, 한진중공업 35미터 크레인에 올랐던 소금꽃나무 김진숙은 207일째 되는 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저는 저들에게 요구합니다. 나를 내려오게 하려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206일을 버텼는지 그걸 먼저 헤아려라. 무엇이 나를 견디게 했고, 무엇이 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는지를 진심으로 생각해보라. 절망이 희망을 이길 수 없듯이, 돈에 대한 집착만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생에 아무런 집착이 없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 사심 없이 하나가 된 우리를, 저들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절망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승리에 대한 기대치가 기껏 48% 밖에 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48%의 사람들은 절망했고 그들의 자중지란은 현재진행 중이다. 그사이 노동자들이 차례로 죽어갔다. 자살하거나 돌연사 하거나, 그들의 사인은 절망이다. 대선 기간 내내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타당성 전면 검토 후 백지화 공약 카드를 만지작거렸던 민주당은 여야합의로 해군기지 건설 예산을 전액 통과시켰다. 70일간의 공사기간 유예기간을 두었지만, 정부는 보란 듯이 새해 첫날부터 공사를 강행한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착되고 연행된다. 정의의 길을 비틀거리며 가는 사람들은 다시 극심한 절망을 이겨내야 한다. 5년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도대체 희망은 기약이 없다. 


희망은 정의의 길을 걷는 이들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서 장발장은 코제트에게, 그가 평생 간직했던 은촛대를 물려준다. 벽난로 위에 있는 두 촛대는 꼬제뜨에게 유품으로 남긴다. 은촛대이지만 나에게는 황금 촛대, 다이아몬드 촛대 이상이다. 짐승의 비계로 만든 양초라도, 저 촛대에 꽂으면 성스러운 의식에 사용되는 밀랍 양초로 변한다. 저 촛대를 나에게 주신 분께서 지금 저 높은 곳에서 나에 대하여 흡족해하실지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였다만.(펭귄클래식코리아 역간, 5권 420면) 19년간 옥살이를 했던 장발장이 절망을 딛고 희망을 품게 된 것은 미리엘 신부가 준 은촛대였다. 용서의 은혜는 범죄자의 근원적 절망을 반전시켰고, 끊임없는 자기성찰(원작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을 통해 정의의 길을 걷게 했다. 불의에 저항하여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시민혁명군이, 그 세상에게 외면당하는 절망의 순간,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 한 소년의 결기가 그들에겐 희망이 되었다. 그 희망은 그들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의를 걷고 있으므로 좌절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각오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은 은촛대한 소년의 결기일지 모른다. 


‘괜찮다’는 위로


역사가 신의 것이라면, 

정의가 신을 따르는 자들의 것이라면, 

그리고 그 길을 따르다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에서 터진 눈물이 그것에 대한 그리움의 민낯이면 좋겠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상상했다. 딸을 위해 몸을 파는 창녀 판틴의 절규어린 노래, 마리우스와 그의 동지들이 부르는 혁명의 노래, 혁명군의 품속에서 죽어간 한 소년의 노래,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린 에포닌의 노래, 절벽 아래 몸을 던지기 전 절망하며 정의를 묻던 자베르의 노래, 다시 만난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찬란한 사랑의 노래, 자신의 진실을 알아준 딸과 사위 앞에서 최후의 독백을 읊조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발장의 노래, 죽은 장발장이 은촛대를 선사한 신부를 지나 죽은 혁명군이 부르는 승리의 찬가를 들으며… 진심으로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땅의 모든 비극에도 괜찮다고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의 이미지는 <레 미제라블> 공식 홈페이지

(http://www.lesmiserablesfilm.com/splashpage/)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