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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슬픔의 책들 사이에서(기획회의 395호)

Soli_ 2015. 7. 6. 08:48

기획회의 395호(2015년 6월 30일)


희망과 슬픔의 책들 사이에서 


김진형(생각의힘 편집장)



명멸하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었고, 길을 잃어야만 닿을 수 있는 삶의 진실이 있었다. 간혹 이곳은 하나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같다는 생각이다(또는 여러 가상현실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페르소나의 욕망들이 발현하여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진실을 요구하지만, 정작 세상은 지독한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슬픔의 사람들을 포위하고 겁박한다. 세상의 슬픔은 굳건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평온하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둘러싼 수많은 층위의 말들이 전위를 호령하지만, 가부장적 폭력을 일삼는 우리의 내면과 일상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을 거듭 입증할 뿐이다. 이곳에서 사사로이 발휘되는 언명이란 얼마나 헛헛한 것인가. 그렇더라도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지만 근본적일 수는 없다”고,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던가. 과연 그러한가. 무력한 질문만이 위태롭게 너울거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는 표절로, 그의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들은 문화권력이라는 비판으로, 그런가 하면 청춘들이 가장 선호하던 대표적인 진보 논객은 데이트 폭력으로 추문에 휩싸였다. 문학 혹은 진보에 대하여 오래전 체험되거나 각성된 열망들이, 사실은 왜곡된 텍스트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길을 잃는다. 수전 손택은 “문학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어떤 문학의 신화는 그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으며 ‘반대 진술’로 도태된다. 


확신에 찬 수많은 말들이 존재를 둘러쌀 때, 난 종종 길을 잃던 청춘의 시간들을 그리워했다. 막연한 죽음을 갈망하던 스무 살 언저리에는 신경숙의 <외딴방>을, 신경숙처럼 필사하며, 신경숙처럼 ‘다른 존재’를 꿈꿨다.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과 전태일, 함석헌과 김교신을 만나 각성과 구원에 이르렀다. 책을 소개하고 만들던 나의 삼십대는 고요했으나 뜨겁던 시절이었다. 희망과 슬픔의 책들 사이에서 환호했으나, 텍스트의 본위를 잃고 독선과 오만에 휩싸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청춘은 사위어 갔고 “울음이 목울대까지 차올랐지만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이동하). 책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만들던 사람들의 위선은 더욱 교묘했고 견고했다. 분노로 시작했으나 언제나 절망으로 마무리 되었던 것은, 그것이 결국 나의 위선이었고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심보선은 <그을린 예술>(민음사, 2013)이라는 책에서 위기에 처한 예술을 말한다.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려는 자기도취적 존재 증명”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편승해 성공을 욕망했지만, 과도한 경쟁 논리에 휘말려 낙오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 본인이건, 그의 작품을 위탁한 어떤 자본 세력이건, 누군가에게 독점된 예술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에 심보선은 “예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라고, 불온한 희망을 선동한다.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을린 예술’은 타인과의 우정을 통해 공존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용산 남일당과 홍대 두리반, 강정마을과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등의 현장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동물화, 노예화, 속물화’에 저항하는 ‘의지의 거점’에서, 예술은 가장 남루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진실의 실체를 규명하였다. 비참한 현실은 죽은 예술을 각성시켰고, 마침내 되살아난 예술은 그 현실을 축제의 장으로 비약시켰다. 기어코 사수하였던 두리반은 숱한 투쟁에 있어 하나의 전범으로 유효하지만, 보편적 희망으론 주어지지 않는다. 예술가들이 연대한 한반도 강토 곳곳의 투쟁은 여전히 비관적 전망과 싸우고 있는 까닭이다. 이 책도 희망의 증거를 채득하여 서술할 뿐, 섣부른 승리를 예견하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그을린 예술’일 뿐. 그런 까닭에, 심보선은 예술의 꿈의 정체를, 예술이 가야 할 길을 거듭거듭 집요하게 질문할 뿐이다. 오직 그 질문만이 유효하다.  


일본의 현자 사사키 아타루는 텍스트가 혁명의 본질이라고 언명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2012)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저항은 사유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통찰한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정치적으로 구조화된 악에 대한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나니아 연대기의 창조자 C. S. 루이스는 당면한 악과 맞서 싸우되, 실패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성찰하며 전진하는 것이 진보라고 말한다. “진보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원하는 곳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진보입니다.”(<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서른 살부터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왔다. 10년을, 다시 2년을 버텨 세 번째 출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책을 에워싼 온갖 슬픔과 분노, 좌절과 절망의 추문이 이곳을 에워싸더라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나의 고백이 있다. 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왔다. 지도로는 찾지 못할 곳이다. 간혹 책의 무용과 무위가 휘몰아칠 때면 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스스로의 욕망을 감금한 채 그저 앓았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견뎌온 시간이 하나의 길이 되고 한 권의 책이 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대가 끝내 좌절할지도 모르겠다. 앞선 길 너머엔 안개만 가득한 길이다. 되돌아 보듬는 시선으로만 새겨져 있던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심보선의 질문, 사사키 아타루의 텍스트, 한나 아렌트의 사유, C. S. 루이스의 진보를 적어둔다. 그러고는 행동하는 삶vita activa과 성찰하는 삶vita contemplativa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사유의 책을 꿈꾸는 것이다. 다시,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