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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빛나는 텍스트로 변주하다_한겨레출판 이기섭 대표 인터뷰(기획회의 391호)

Soli_ 2015. 5. 14. 01:29

기획회의 391호(2015.5.5)_ 한국의 출판기획자 2




‘행운’을 빛나는 텍스트로 변주하다

-한겨레출판 이기섭 대표



김진형 책담 편집장 soli0211@gmail.com  


2014년 4월 이후, 이 땅의 봄은 소멸했다. 소멸하였으므로, 우린 지독한 슬픔을 앓는다. 이제 무엇으로 출판의 소명을 찾아야 하나, 그런 고민들이 휘몰아치던 세월호 1주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한겨레출판 이기섭 대표를 만났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의 책상에 놓여 있던 한 권의 책을 보았다.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그림과 글로,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단원고 아이들을 박재동 화백이 그렸고 거기에 가족들의 편지를 함께 엮은 책이다. 막 출간된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책이었다. 


한겨레신문에서 이 연재가 시작할 때 무작정 신문사로 전화했었다. 담당 기자는 “한겨레출판에서 출간할 겁니다”라고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편집자로서 아쉬운 마음보다 독자로서 감사한 마음이 앞섰다. 다행이라 여겼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아이들의 얼굴과 그들을 향한 가족들의 연서를 읽던 이 먹먹한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망각이란 세월의 습속에 저항하는 ‘기억’의 텍스트, 그것이 책이어야 하니까.  


“이 기획은 한겨레신문이 한 것이지요. 언론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아주 훌륭한 기획이었죠. 저희는 다만 이것을 책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겸손한 답변처럼 들리지만, 이기섭 대표의 말 속에 신문의 텍스트와 책의 텍스트가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난다. 신문은 ‘지금, 여기’의 사건 속에서 진실을 탐사하여 기록하는 것이라면, 책은 그것을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로 확장시킨다. 거칠게 말해, 진실을, 혹은 그에 대한 질문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텍스트’로 남기는 것이 책의 소명이다. 


이 책이 세월호 1주기에 맞춰 출간한 것이냐는 질문에 이기섭 대표는 “희생당한 아이들의 얼굴과 사연을 마지막까지 넣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가 지금 출간하게 된 것이죠”라고 했다. ‘1주기’라는 상징보다 ‘마지막까지’라는 당위의 결과라는 것을 그는 강조했다. 어떤 상징을 놓치지 않는 것이 출판마케팅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면, 편집이란 행위는 ‘마지막까지’ 텍스트를 견고하고도 충실하게 보듬고 담아내는 것이므로, 이기섭 대표의 말은 적절하고도 옳았다. 


   



인문사회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이 인터뷰를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첫 인사를 시작한 이기섭 대표는 인터뷰 내내 한겨레출판의 책들을 ‘행운’이라고 말했다. 어떤 책들은 좋은 시기를 만났기 때문이고, 어떤 책들은 저자들이 훌륭했기 때문이고, 어떤 책들은 한겨레신문의 좋은 기획 때문이라고. 인터뷰를 거의 마칠 즈음에야 난 그 말들이 편집자의 소명과 관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집자 이기섭’에 관한 질문으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이 연재의 제목이 “한국의 출판기획자 2”이지만 간혹 ‘사장님 인터뷰’가 되는 것에 대한 사소한 불만 때문이었다. 


“80년대가 그렇듯이 노동운동을 좀 했어요. 그러다가 서른이 가까워지자 밥벌이를 찾아야 했지요. 호구지책으로 출판에 입문한 거죠. 다른 출판사에서 4~5년 정도 편집자로 일하다가 한겨레신문 출판팀에서 경력 편집자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옮겼죠.”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운동권의 우수한 인력들이 대거 인문사회 출판사로 유입되었고, 그들 중 한 명이 이기섭 대표였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출판인의 소명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그는 호구지책으로서의 밥벌이를 말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처연하고도 호기로운 말들을 운운하며 서른 무렵 출판사에 입사했으나, 십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호구지책으로서의 밥벌이’가 가장 중요한 가치란 걸 가까스로 깨닫고 있었으므로, 다소 실망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첫 사회생활 경험이었는데, 성취보단 좌절이 컸어요. 밖에서 보던 것과 안에서 실제 그 일을 하는 것은 많이 달랐어요. 특히, 운동권 출신의 사장이 운영하던 회사였지만 노동환경은 너무 열악했어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되면서 출판을 떠나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했죠. 그러다가 한겨레신문에서 본격적으로 출판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은 거죠.”  


한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던 그는, 1994년 한겨레신문 소속 출판팀으로 자리를 옮긴다. 인문사회 출판사의 선배들은 그를 말렸다고 한다. 어떤 선배들은 한겨레신문이 시작하는 출판사업에 대해 ‘왜 우리들의 몫을 줄이느냐’고 경계했다.  


“뜻밖이었죠. 저는 도리어 그들에게 불만이 있었어요. 저는 진보운동이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인문사회 출판사들의 책은 너무 전문적이거나 학문적이고 경직되어 있었어요.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죠. 인문사회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90년대 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연쇄적으로 몰락했고, 우리나라도 최초의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비록 불완전하지만 민주세력으로의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민주주의는 대세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90년대 이르러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를 획득했지만 대중 속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90년대 대학가 운동권의 몰락과 진보정치 진영의 정체와 분열은 그것을 예표적으로 상징한다.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자유주의와 이후 이 사회를 장악하는 시장권력은 어쩌면 필연적인 역동(逆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기섭 대표는 대중적 진보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한겨레로 옮기도록 추동한 것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가진 조직,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의 대중화를 선도할 출판사. 하나의 가능성과 모험이었을 것이나, 결국 그곳이 지금의 한겨레출판이 되었다. 1994년 2월, 한겨레신문 소속 출판팀에서 시작하여 이이화 선생의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을 첫 책으로 펴냈다. 당시 편집자는 이기섭 대표 혼자였다. 이기섭 대표는 이후 주강현,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 등의 책들을 펴내며 독보적인 성과를 거둔다. 신문사 소속 출판부로서는 유례없는 성공이었다. 그리고 2006년 1월, 지금의 독립법인 한겨레출판으로 분사하게 된다. 


한겨레신문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다른 신문사처럼 오너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재정이 탄탄하지 못한 신문사 사정에, 그나마 제법 수익을 내던 출판부를 분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죠. 내부 반대도 상당히 많았어요. 그러나 저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출판에 맞는 인력을 뽑거나 기획과 출판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인사와 재정에서의 독립이 필요했어요. 당시 한겨레신문의 정태기 사장님의 결단이 결정적이었어요. 출판사를 경영한 경험이 있는 분이기도 하셨고 한겨레출판을 위해선 보다 자유롭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저로서는 좋은 시기에 좋은 분을 만난 거죠.” 



주강현,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2000년대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절정’


한겨레출판이 독립법인으로 분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기섭 대표가 편집자 시절에 펴냈던 책들의 눈부신 성공이 한몫했을 것이다. 거기다 한겨레신문의 전향적 결단이 더해져서 오늘의 한겨레출판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겨레신문 출판팀으로 시작한 지 21년, 그리고 한겨레출판으로 독립한 지 10년 만에 편집자 1명, 영업자 1명이었던 회사 규모는 27명으로 늘어났고 지금까지 800여 종의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최악의 불황’이라는 수사를 거듭 갱신하는 최근에도 한겨레출판은 법륜의 책들이 수년 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주강현 선생을 만난 건 95년 즈음이었을 거예요. 굉장히 우연적인 만남이었지요. 어떤 기획실 간부가 북한전문가라는 그를 데려왔어요. 당시 문화부에서 새롭게 연재할 기획아이템들을 찾고 있었고, 그걸 준비하던 기자의 이야기를 내가 우연히 듣고 주강현 선생이 여러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그리고 다음 날, 출판부 팩스로 주강현 선생의 기획안이 들어왔어요.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그다음 날 그 기획이 문화부에서 채택되었죠. 연재가 시작되자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당연히 저는 이 기획을 책으로 만들었죠.” 


주강현의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1996)는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93년부터 출간된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가 독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이기섭 대표는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의 성공 요인을 ‘우연적 만남’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절’이라는 당시 정황을 꼽았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겸손처럼 보였다. 흔히 트랜드라고 불리는 독자들의 욕망을 출판기획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탁월한 기획자였던 주강현 선생이, 탁월한 저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는 당시 담당 기자와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컸다. 또한 한겨레출판은 초창기부터 신문 칼럼을 그대로 책으로 출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신문 텍스트를 그대로 출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저희 원칙이 그래요. 반드시 책으로서의 완성도를 확보하고 무엇보다 대중적인 언어로, 에세이로 풀어서 내려고 해요. 그 고집 때문에 종종 놓치는 저자와 책들이 있죠. 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요.(웃음)” 


   


이기섭 대표는 홍세화 선생과의 만남을 출판인으로서, 편집자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꼽는다. 홍세화 선생의 책으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언젠가 한겨레신문에 실린 홍세화 선생의 칼럼을 읽었어요. ‘내가 본 프랑스, 프랑스인’ 같은 컨셉으로 중국, 일본 등을 여러 해외 필자들이 쓴 거죠. 원고지 두 매 정도의 짧은 글이었어요. 그 글을 보자마자 ‘이거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바로 전화해서 ‘이걸 토대로 써 달라. 우리가 지향하는 형식은 에세이다. 에세이로 써 달라.’고 했죠. 프랑스에 계시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전화밖에 없었어요. 출간계약 이런 것도 없이 책을 내자고 했고 선생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어요. 그렇게 3년 간 프랑스로 전화만 했죠.(웃음) 그런데 99년 어느 날, 원고가 통째로 날아왔어요. 완성된 원고 형태로요. 그다음 날부터 달리기 시작하는 데, 손볼 데가 없었어요. 오자 하나 없었죠. 제목도 선생의 것이었죠. 제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저 ‘이거 합시다, 합시다!’라고만 했죠. 그렇게 출간된 책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1999)였어요. 처음으로 교보문고 베스트 1위에 올랐죠. 마침 홍세화 선생이 20년 만에 귀국하게 되어 전국 투어도 함께 다니며 매니저 역할을 했어요(웃음). 영광이었죠.” 


홍세화 선생을 이야기하며 이기섭 대표는 가장 환하게 웃었다. ‘자신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긍심이 묻어났다. 그 시기가 한겨레출판의 절정이었다고 했다. 그가 부러웠다. 홍세화 같은 저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편집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일 테니까. 또한 이 책의 시작이 원고지 2매짜리 칼럼에서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3년이란 시간의 구애와 기다림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진심으로 부러웠다. 결국, 좋은 책은 기획자의 밝은 눈과 편집자의 끈기로 탄생한다.  


“박노자 선생을 만난 것은 2001년 즈음이었어요. 박노자 선생은 대학의 러시아어 강사였는데, 그가 연세대 학보였던 연세춘추에 썼던 글들이 대학가에 크게 회자되었어요. 명문이었죠. 한겨레신문에서도 그의 칼럼을 실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아현동에 있는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성당에서 박노자 선생을 만나서 출간을 제안했죠. 그런데 그의 말이 걸작이었어요. 거의 ‘100여 개’ 출판사가 출간 제안을 했다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꽤나 진보적인 출판사들의 제안도 모두 거절했다는 거죠. 어디는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서 안 되고, 어디는 재벌자본으로 경영하는 곳이라서 안 되고···. 그래서 결국 저희랑 하기로 했죠. 


신문 칼럼을 그대로 책으로 내지는 않는다는 우리 원칙에 따라, 박노자 선생에게 다시 쓰게 했어요. 선생이 인물과사상에 썼던 글들이 있었는데 참 좋았거든요. 그런 결을 가진 책으로 써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되지는 않았어요. 자꾸 논문이 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결국엔 선생이 여러 매체에 썼던 글들을 중심으로, 새로 쓴 글들을 함께 묶어 출간하게 되었죠. ‘조중동’에서는 한겨레 책들을 거의 다루지 않는데, 이 책은 중앙일보〉에서 1면 머리기사로 소개했어요. 그만큼 반응이 좋았죠. 이 책이 출간될 당시 박노자 선생은 서른이 되기 전이었어요. 그는 1권의 인세 전부를 외국인 노동자 인권단체에 기부하였지요.”     


한겨레출판은 2001년 12월 당신들의 대학민국을 출간하였고, 독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박노자 선생은 이 책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면들을 ‘외부자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비평하고 있는데, 특히 진보진영에서도 기피하거나 회피했던 한국의 대학, 종교, 군대, 인종주의 등의 문제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반향이 매우 컸다. 홍세화는 박노자에 대해 “그는 이방인의 눈을 가졌으나 그의 가슴은 한국인의 것이다. 뛰어난 우리말 능력으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짚어내는 그의 글에 날카로움과 함께 항상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정서의 아우름, 그를 갖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복이다.”(당신들의 대한민국 뒤표지)라고 말했다. 박노자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문사회 독자들을 뜨겁게 달궜다. 


   


한편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성공요인에는 강렬하면서도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가진 제목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박노자는 처음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민족주의를 싫어하고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이 제목이 너무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기섭 대표는 박노자 선생을 설득하느라 한 달 넘게 애를 썼고, 결국 출판사의 안을 관철시켰다. 제목에 얽힌 또다른 사연을 가진 책으로는 한홍구 선생의 대한민국사를 꼽을 수 있다. 대한민국사는 2003년 2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총 4권이 출간되었다. 이기섭 대표는 이 책의 시작도 ‘행운’이라고 말한다. 


“한홍구 교수를 데뷔시킨 것은 고경태 기자였어요. 저와는 입사 동기인데요. 1994년에 시작한 한겨레21〉의 편집기자였죠. 고경태 기자는 매우 뛰어난 기자이면서도 매우 탁월한 에디터였어요. 고경태 기자가 한홍구 교수를 필자로 발굴한 거죠.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21〉에 2001년부터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였고, 저는 그것을 책으로 출간한 거지요. 이번에도 운이 좋았어요. 이 책도 제목 때문에 고민이 많았어요.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통통 튀는 역사이야기’ 뭐, 그런 제목들이 후보로 있었는데요.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고심 끝에 ‘대한민국사’라는 제목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저자가 심하게 반대했어요. 힘들었지만 결국 설득하여 우리 주장을 관철시켰죠.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어요. 정사 같으면서도, 정사가 아닌. 그러면서도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처럼 각인시킬 수 있었죠. 또 이 책의 디자인을 오진경 씨에게 맡겼던 것도 대성공이었어요. 오진경 씨는 문학 쪽 디자이너로 각광받고 있었는데, 저희가 과감히 이 책의 디자인을 맡긴 거지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었죠.”


1996년 주강현으로부터 2000년 중후반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 등의 책을 펴냈던 이 시기까지가 한겨레출판의 절정이었다. 특히, 한홍구, 박노자, 홍세화 등의 책들은 고종석, 강준만 등의 책들과 함께 ‘2000년대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절정’이기도 했다. 출판평론가 최성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2000년대판 인문사회과학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20대와 30대의 비판적 성향의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지만, 1980년대의 ‘의식화 교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 책들은 일반 교양서적에 가깝다. 또한 저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도 다채로워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43쪽) 홍세화, 박노자, 한홍구는 한겨레출판의 대표 저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이기섭 대표가 말한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대중화는 이렇게 결실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한겨레출판의 절정’이었던 그 시기를 회상하며 이기섭 대표는 잠시 추억에 젖는 듯했다. 경영자가 아니라 편집자로 그 책들을 발굴하고 편집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스쳤을 것이다. 



사회의 진보에서 마음의 진보로


이기섭 대표는 10년 전을 한겨레출판의 절정으로 회고했고, 이제 그런 시기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지만, 한겨레출판의 약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겨레출판의 책들 중 가장 많이 책은 팔린 법륜의 저작들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야 비로소 법륜 스님의 대표저작 스님의 주례사엄마수업인생수업이 한겨레출판의 책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들을 펴낸 ‘휴’는 한겨레출판이 2010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새로운 브랜드로 ‘참다운 휴식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를 주로 펴내고 있다. 


“2008년 즈음이었을 거예요. 인문사회 분야의 지형도가 많이 달라지고 있었고 변화를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했죠. 한겨레출판이 지향하는 사회의 진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에서 조금 벗어나, 또는 확장하여 ‘마음의 진보’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영성, 생태, 환경에 관한 책들을 만들고 싶었지요. 실은 제 자신은 훨씬 이전부터 그것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 다른 분야는 해당 본부장이나 팀장들에게 대부분 위임하고 있지만, 휴의 책들은 지금도 그가 직접 챙긴다고 한다. 휴에서 출간한 첫 번째 책이 법륜의 스님의 주례사다. 한겨레출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현재까지 5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에게 정보를 듣고 정토출판 관계자를 만났어요. 그곳에서 출간한 책들을 모두 싸들고 와서 테이블에 펼쳐 놓고 살펴봤어요. 그런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1년 정도 지났는데, 김영사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2009)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어요. 마치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죠.(웃음) 그래서 다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새로 영입한 담당 편집자가 발굴한 아이템이 스님의 주례사였어요. 김영사가 ‘즉문즉설’의 문답 형식으로 펴냈다면, 우리는 그냥 에세이로 푼 것이죠. 인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을 이야기하는 스님의 주례사와 엄마수업인생수업 등을 연작으로 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고자 했어요. 법륜스님의 책들로, 스님의 은덕으로 이 불황 속에서도 한겨레출판은 수년 간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어요.”


한겨레출판은 인문사회 분야와 문학 분야를 축으로, 영성, 생태, 환경 에세이를 펴내는 ‘휴’, 문화예술 실용 브랜드 ‘씨네21북스’, 어린이와 청소년 분야의 책들을 펴내는 ‘한겨레 아이들’과 ‘한겨레 틴틴’ 등의 브랜드로 확장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했어야 했는데, 저도 아쉬워요.”


이제 독자의 입장에서 아쉬운 점들을 물었다. 먼저 문학 분야. 한겨레출판의 문학 분야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96년부터 시작하여 20회째 이어가고 있는 한겨레문학상의 성과와 과제는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1994년 해방 50년 기념으로 한겨레신문 차원에서 장편소설을 공모했어요. 상금이 3천만 원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그리고 한겨레신문으로서는 꽤 큰 돈이었죠. 1년간의 공모와 심사를 거쳐 당선작 권현숙 장편소설 인샬라가 95년 8월에 출간되었어요. 책은 성공적이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장편소설 공모전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듬해부터 정식으로 한겨레문학상이 시작된 거죠. 한겨레문학상은 가장 공정하고 작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우리가 심사위원을 위촉하지만, 그 이후엔 심사위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개입하지 않아요. 그리고 매해 한겨레문학상을 거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진행하려고 하죠. 사업적 판단을 가급적 지양하고 문학을 위한 순수한 투자를 하려고 해요. 올해도 진행 중인데, 300여 편 정도가 응모했어요. 역대 수상작 중 박민규, 심윤경 작품 외에는 대부분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했어요. 그렇더라도 사업적 판단은 배제하고 한겨레문학상은 문학을 위한 순수한 뜻을 계속 지켜 가고자 해요. 작가들이 한겨레문학상을 통해 등단을 해도 타사 문학전문 출판사에서 후속작들을 내죠. 어쩔 수 없잖아요.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문학전문잡지를 준비하고자 온라인 문학웹진 ‘한판’도 2년 정도 운영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겨레출판도 지속적으로 문학 쪽을 계속 강화하려고 해요. 저자 개발과 관리도 강화하고요. 해외문학도 준비 중에 있지요.”   


    


한겨레출판의 여러 기획 중 독자로서 아쉬웠던 점은 또 있다. 2010년 5월 첫 책 기후 변화의 정치경제학부터 2011년 10월 인종주의는 본성인가》까지 총 아홉 권까지 출간된 ‘한겨레지식문고 시리즈’가 특히 그랬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성찰하는 지식인의 필독서”라는 모토 속에서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의 VSI(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에서 엄선된 1차분이 출간된 것이다. 내용과 구성, 디자인 면에서 발군의 기획으로 호평을 받았고, 한국인 저자들의 책들로 계속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1차분 출간 이후 현재까지 이 시리즈는 소식이 끊겼다. 독자로서 이 시리즈에 환호했던 것만큼, 아쉬움은 그만큼 컸다. 아쉬움을 토로하는 내게 이기섭 대표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답변을 이어갔다. 


“제 꿈이 그거였어요. 대중성을 확보하면서도 논쟁적 이슈를 다루는 일본의 신서들이 부럽기도 했고요. 한겨레문고를 두 번에 걸쳐 시도했었죠. 첫 번째는 한겨레신문 출판부 시절이었어요. 시장조사까지 마쳤는데 막판에 접었지요. 두 번째가 지식문고 시리즈였죠. 처음엔 번역서로 출간하고 그다음엔 국내 필진으로 계속 이어가려고 했어요. 20~30권 정도까지 낼 수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 현실에서 교수들은 학술서가 아닌 문고판은 잘 쓰려고 하지 않아요. 옥스퍼드 VSI 시리즈도 많이 계약했는데 다 내지는 못했고, 국내서 기획은 시간이 너무 걸리고 있죠. 저희가 한겨레역사인물평전 등의 다른 시리즈에 집중하느라 지식문고에 상대적으로 소홀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계속했어야 했는데 저도 아쉬워요.(웃음)”

 

한겨레역사인물평전 시리즈는 한겨레출판이 부산대 점필재연구소와 함께 시작한 것으로, 국내의 역사적 인물들을 국내의 연구자들이 새롭게 조명하는 것으로 총 100권으로 기획되었다. 2011년 5월 ‘근대를 바라보는 3인의 스펙트럼’이라는 주제로 안중근, 이완용, 최남선 평전 등 3권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6권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 외에도 한겨레출판은 인천문화재단과 손잡고 문화의 길 총서를 10권 펴냈다. 인천은 근대의 관문으로 시작해 다양한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도시다. 지금까지 출간된 책들은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새롭게 발견한 인천의 가치를 담고 있다. 이기섭 대표는 특히 이 시리즈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문화의 길 총서는 한겨레출판이 지역사회와 만들어내는 대중서죠. 지역사회의 독특한 테마를 하나의 보편적인 메시지로 만드는 것이죠. 지자체에서 개발비를 부담하고 수익은 나누는 방식으로, 인천문화재단과 4~5년 걸쳐 만들었어요. 다른 지역, 다른 지자체로도 확장시킬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경영자 이기섭 vs. 편집자 이기섭






이기섭 대표는 자신은 경영자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경영자의 배포보다는 편집자의 ‘쪼잔함’이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경영자 이기섭’보단 ‘편집자 이기섭’을 말할 때 더 행복해 보였다. 경영에 있어선 시스템과 호흡을 강조했다. 그는 오너도 아니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평등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한 한겨레의 조직 문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동료를 신뢰했다. 특히 한겨레출판의 시작부터 거의 20여 년간 함께했던 김수영 콘텐츠개발본부장과 조재성 마케팅본부장에게 편집과 마케팅의 상당 부분을 위임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동지적 관계’로 설명했다. 편집자나 마케터 충원은 가급적 신입을 뽑는다고 한다. 경력자를 뽑기보단 신입직원을 뽑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잘 양성하여 길게 함께 가는 것을 원한다고 했다.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과 소양, 그리고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과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거의 다 소진되었을 때,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최근 모 출판사에서 비롯된 노동 문제를 예로 들며) 한국에서 출판편집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편집자로서의 존재방식과 노동자로서의 존재방식은 어떻게 병치될 수 있는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편집자의 출판기획 성과를 기대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가? 이에 대해 이기섭 대표는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의 출판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시스템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갈수록 출판환경이 악화되고 있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좋은 뜻을 가지고 일해도 경영자이건 편집자이건 쉽지 않은 상황이지요. 딴 곳은 몰라도 여기에선 정년퇴직하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쉽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죠. 일본 출판사들이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40대 중후반이 되면 왜 모두 관리자가 되고 경영자가 되어야 하죠? 관리자가 되던가, 출판사를 차리던가 하잖아요. 그냥 편집자로, 실무자로 남을 수는 없는 건가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편집자, 정년퇴직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죠. 그런 고민을 하며, 관리자가 되기보단 특정 분야의 시리즈를 전담하는 전문 편집위원제도 등을 구상하고 있어요. 쉽지 않지만 계속 고민해야죠.”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부디, ‘경영자 이기섭’의 고민이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행운’이라 불렀던 시간들과 그 행운을 빛나는 텍스트로 변주해낸 그의 책들과 ‘편집자 이기섭’에 대한 풍요로운 회고를 품고 그의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