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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의 희망을 묻다 (오마이뉴스, 130323)

Soli_ 2013. 3. 23. 08:39





다시 책의 희망을 묻다
스러져 가는 숱한 나무들의 생명에, 우리는 무엇으로 답해야 하는가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종이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세계의 다국적 기업들은 싼 값으로 종이생산을 하기 위해 천연림을 마구 정복하여 나무 농장을 만들었다. 그 결과 2초마다 축구장 만한 면적의 원시림이 사라지고 세계 원시림의 1/5만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산업용으로 희생된 전체 나무의 42%가 종이를 생산하고, 그중 2/3는 펄프를 위해 희생당한다고 한다. 세계 출판업계의 95%가 천연펄프 종이로 인쇄를 한다(1999년 월드워치 보고서 기준). 

책은 무고한 나무들의 숱한 희생을 담보로 탄생하는 물질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희생당했을까. 책이라는 물질 위에 탄생한 사유(思惟)는, 과연 그로 인해 희생당한 뭇생명들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을까.

나는 책의 사람이었다


나는 평생 상당히 많은 책을 소비하였고, 지난 10년간, 그리고 지금도 책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취미와 특기가 책 읽기이고, 책으로 생업을 삼았으니 나도 어떤 면에선 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책이라는 오묘한 지의 존재 양식을 통해 나의 삶에 눈을 뜨고 세계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 언어의 이미지가 쌓이고 뿜어져 나오는 그 공간은 나의 정념과 세계인식의 타작(打作)의 장이다. 어린 시절 책 읽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겼다. 그것은 분명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었다.(<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 중에서)

이광주 교수가 명명한 책의 정의를 사랑한다. 내게도 정말 그랬다. 나의 정념이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나는, 거의 20년 가까이 다녔던 학교보다 책을 통해 배운 것이 훨씬 많았다(내게 학교는 책을 읽기에 가장 최적화된 공간이었으므로, 이 말은 모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책 읽는 시간은, 힘겨웠던 청소년 시절을 이겨내는 유일한 일탈의 공간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등록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들의 이름은 교실 게시판에 붙었고, 그들은 방과 후 청소를 했다. 처음엔 스무 명 가까이, 나중에 두세 명이 남을 때까지 그렇게 해야 했다. 나도 그들 중에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 우리 집은 점점 가난해졌다. 아버지의 유품 중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지금 유행하는 세계문학전집과는 질과 양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했지만, 당시 나에겐 지난한 현실을 견뎌내는 거의 유일한, 일탈의 공간이었다. 책을 읽으면, 상처받은 자존심은 위로받거나, 혹은 그것을 잊게 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는 현실을 딛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판타지가 되었다. 

책을 많이 살 수 있는 형편도 되지 못했고, 동네 도서관도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학급 문고 밖에 없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세계문학전집 30권 짜리를 읽고 또 읽었다. 일탈과 놀이였으나, 그것은 분명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이광주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수태의 성별된',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잉태하고 만들던 구별된 시공간이었다. 나는 책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 책의 사람들'의 위선과 독선

스무 살 즈음, 요한네스 휠스베르거의 <서양철학사>와 리영희 교수의 책을 읽었다. 군대에 가선 주로 소설에 심취했다. 신경숙의 <외딴방>을 노트에 옮겨 적었고, 언젠가는 불온서적이었던 <전태일 평전>을 읽다 걸려서 완전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수없이 돌아야 했다. 교회를, 심지어 신학대학을 다녔다. 숱한 신학서적을 읽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군 제대 3개월 앞두고 독파했고 그것이 스스로도 대견했다. 

기독교는 흔히 책의 종교라 불린다. 성서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유일한 가치로 여겼다. 하여 기독교인은 '그 책'의 사람이어야 마땅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상당히 행복했던 기억이 많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그랬다. 깊고 치열해야 닿을 수 있는 학문이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학부 졸업반 시절부터 대학원 1학년 때까지 한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때였던 것 같다. 숱한 상처에 넘어지기 시작한 나날들 말이다.  

책의 종교, 책의 사람들은 위선적이고 독선적이었다. 목회는 그저 정치일 때가 많았고, 신학은 그 명분으로 차용될 때가 많았다. 전도사로 일하던 2002년, '미순이-효순이 사건'이 있었다. 중학교 여학생이었던 이들이 훈련 중이던 미군 제2사단 공병 대대 44공병대 소속 차량에 치어 압사 당한 사건이다. 미군은 그녀들의 확실한 죽음을 위해, 후진하여 다시 압살의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무죄로 풀려 났다.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하던 수많은 군중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나도 몇몇 청년들과 그곳에 함께 했고, 설교를 빌어 동참을 호소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교회에서 엄중한 경고를 받았고 무력함에 힘겨웠다. 교회들은 2002년 월드컵 응원을 위해 예배당을 기꺼이 개방하였으나, 이 사건에 대한 그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고 금지했다. 

이현우 교수는 이응준의 시 한 구절 "난 적어도 책 한 권에 인생이 변했노라고 말하는/비열한 인간은 되기 싫었던 것이다"를 인용하여 '인생은 책 한 권 따위로 변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정말 그렇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였으나, 지금 한국교회는 가치의 우위가 아니라, 독선과 위선의 우위에 있을 따름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 책'의 가치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 시급한 것 한 가지는 더 많은 책을 제대로 읽고 그 비열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이현우, <책을 읽을 권리> 중에서)

결국 난, 신학을 그만 하기로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을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출판사에 입사하였다. 서른한 살 때였다.  

희망과 슬픔의 책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거듭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내 인생의 책으로, 곁에 두고 간직하는 책이 있다. 성서와 파스칼의 <팡세>, 그리고 <서준식 옥중서한>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러하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유학 온 서준식은 1970년 북한을 다녀왔다. 그리고 1971년부터 1988년까지 사상 전향을 거부한 채 감옥에 갇힌다. 그는 수인(囚人)이었지만 양심에 따라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완곡한 희망의 언어로 썼다. <서준식 옥중서한>에는 세상의 거대한 폭력 앞에 저항하며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지켜냈던 한 자유인의 결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1976년 발표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아득한 슬픔의 책이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고, 다른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면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비롯한 12편의 단편 연작 소설이다. 작가는 이 '난장이 연작'을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에 대한 책이라고 요약했다. 거인의 폭력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숱한 난장이들의 시대 말이다. 나에겐 이 책이 세 권 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1986년판, 그리고 2000년판과 200쇄 기념 한정본인 2005년판이다. 2000년 판의 면지엔 이렇게 적었다. 

"십 년도 훨씬 전에 읽었고 오늘 또 다시 읽는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나면 또 흐르면 꺼내 읽으리라. 그 슬픔이 여전한지 확인하련다."(2002.5.19)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다시 이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왔다. 언젠가 작가는 이 책이 더이상 읽히지 않는 시대를 희망한다고 하였으나, 이 책은 여전히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난장이들의 절망이 여지껏 계속되고 있는 까닭이다. 


희망과 슬픔, 혹은 희망과 절망 사이 난 더욱 공고한 책의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였고, 서른한 살부터 서른아홉 살까지 나의 삼십 대를 출판사에서 일했다. 책을 열심히 만들고 홍보하고 팔았다. 특히 책 읽기 운동에 매진했다. 회사를 설득하여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타사의 책까지 아우르는 분야별 추천 도서목록을 만들어 배포했고, 책 읽기 강의도 제법 많이 다녔다. 세상엔 숱한 책들이 있지만 좋은 책은 드물었고, 좋은 책은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차츰 그 희망을 잃어갔다. 책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만드는 사람의 위선을 보았던 까닭이다. 이현우 의 제안 대로 엄청난 책들을 읽어내는 사람들을 만났으나 그들의 삶을 보고 좌절했다. 책 읽는 사람들의 위선과 폭력은 더욱 교묘했고 공고했다. 처음엔 분노하다가 나중엔 절망했다. 분노가 타자를 향한 것이었다면, 절망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위선이었고, 폭력이었고, 좌절이었다. 열악한 출판계에서 버티다가 결국 출판사를 그만 두었다. 물론 책과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나, 그것이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인 것만은 확실했다. 

욕망에 제압당한 책의 현실

지난 3월 21일, 청어람 독서출판컨퍼런스가 열렸다. 교보문고의 허영진 씨는 "출판계의 메가트랜드와 마이크로트랜드"라는 발제에서 지난 15년 간의 베스트셀러를 분석하며 독자들의 욕구(needs)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매년 키워드는 달라지는데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한다는 것이다. "위로"가 "힐링"으로 바뀌는 것처럼, 용어는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그는 "위로/힐링", "심리", "자기계발", "스님", "영어" 등을 반복되는 키워드로 꼽았고, 특이한 현상으로는 2011년과 2012년에 등장한 정의 담론을 꼽았다. 아마 이는 이명박 정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야기된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needs)을 반영한다고 볼 때,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 읽기라는 행위는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 베스트셀러는 시대의 욕망을 반영한다. 나의 서가에 꽂힌 책들은 나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합당한 것이다. 다만 그 욕망이 책을 통하여 더욱 견고한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소명을 '당신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배고픔이 만나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이광주 식으로 다시 말하면, '나의 정념과 세상인식의 타작의 장'이 만나는 지점이다. 책 읽기는 나의 욕망이되, 세상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위로와 힐링, 자기계발 등에서 멈추지 말고 타자를 향한 정의의 실현을 욕망해야 한다. 인문학마저 자기계발 방식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본다. 하지만 인문학은 인간다움의 실현이며,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정의로운 방식으로 해방시키는 단호한 실천이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밀리언셀러가 되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암울하다. 정의를 집행하는 최고 기관인 법무부의 차관은 성접대 의혹을 받고 사퇴하였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는 삼성 협찬 의혹 등을 받고 결국 후보를 사퇴하였다. 정치인들은 나의 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편일 때가 많았다. 

정의를 진리로 믿는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강남의 어떤 교회는 편법을 동원하여 초대형 건물을 짓고,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논문을 표절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사역으로 급성장하는 주목받던 교회의 목사였던 어떤 이는 성추행을 일삼다 발각되어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인근에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들은 여전히 수많은 성도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그들은 숱한 베스트셀러를 쓴 저자들이다. 기독교가 시대의 주류가 되었을 때, 패악의 길을 걸었다. 그들 중 한 교회는 박근혜 정부의 주요 인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수상한 소문도 들린다. 성서는 시대에 맞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저항할 것을 강조하였지만, 교회는 그저 거대한 예배당 따위로 그 독선적 권력의 위용을 자랑하려고만 한다. 

욕망에 제압당한 책은 더욱 위험하다. 대중이나 어떤 지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세웠다. 우리의 욕망이 삼성을 비판하면서도 삼성에 입사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지식인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지식인의 허위는 결국 지식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지적 욕망은 숱한 책을 정복하지만, 정복당한 텍스트는 오만한 권력이 될 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책의 텍스트가 우리의 '혈관으로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텍스트가 나의 혈관을 타고 들어와 마침내 나를 정복해야 한다.  

책은 과연 유효한가

출판계를 떠나야만 책을 제대로 사랑할 것만 같았다. 허나 밥벌이의 문제 앞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프리랜서로 책을 만든다. 문장을 고치고 입혀서 담론을 견고하게 한다. 심지어 책 읽기 강의도 다시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회의하고 갈등한다. 책은 과연 유효한가, 라는 질문 앞에 아직 답을 찾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지난 연말, 김지하 시인에 대한 절망감을 겪은 후, 다시 그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 읽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토해내던 눈부신 탄원은 아직 그대로였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안도했다. 시인은 변절할 수 있으나 그때 그 텍스트는 건재하였다. 어쩌면 나의 희망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도 스러져가는 숱한 나무들의 생명에, 책은 과연 어떤 가치로 답하고 있는 것일까. 애꿎은 책 대신, 책을 만들고 읽는 사람들로 답하게 하자. 궁색한 변명 대신, 가슴속 깊은 슬픔으로 답했으면 좋겠다. 깊은 슬픔만이 희망에 닿을 수 있다. 그래야만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고 고백했던 시인의 텍스트는 오늘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