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는 언젠가 망구엘처럼, 독서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단다. 그런데 난 언젠가 로쟈처럼, 독서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다. 로쟈의 이 글과 책들도, 망구엘의 책도 읽어볼만 하다.
★로쟈, "독서의 가치"
http://blog.aladin.co.kr/mramor/5924594?start=we
고려대 세종캠퍼스의 소식지 쿠스진(KUSZINE)의 청탁을 받아 쓴 글을 오탈자를 바로잡아 옮겨놓는다(http://blog.naver.com/ks_enter?Redirect=Log&logNo=110150248950). '독서의 가치'가 제안받은 주제였다. 독서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중복되는 내용도 많지만 '종합'한다는 의미로 적었다. 언젠가는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교보문고, 2012) 정도의 규모로 써보고 싶다...
쿠스진(12. 10. 24) 독서의 가치
“네가 무얼 먹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있다. 독서의 경우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무얼 읽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나’가 된다. 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 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독서하는 인간’이 우리의 본질적 규정은 아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독서는 아주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일단 문자의 발명 자체가 5천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문자로 무얼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시대는 그 이전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더라도 극히 짧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짧은 기간’은 우리의 뇌가 책을 읽기에 적합한 구조와 능력을 갖게끔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 능력이며, 다른 용도로 진화된 뇌의 부위들이 서로 협조한 결과이다.
독서 능력 자체가 일반화돼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실상 그것은 매우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대부분 처음 글자를 익히며 더듬더듬 읽어가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 재주를 발휘하여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기기도 했으리라. 그렇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저마다 기적을 만들어낸 능력자라고 말해도 좋다. 아침마다 태양이 뜨는 것처럼 일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경탄에 값할 만한 기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이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구분하자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문해력’의 기적과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독서력’의 기적이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문해력과 독서력은 일치하지 않는다. 똑같이 책을 읽는 능력이지만 문해력이 초급에 해당한다면 독서력은 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고급능력이다. 가령 초등학생의 독서능력과 대학생의 독서능력을 비교해보아도 좋겠다. 책을 읽고 소화하는 수준에서 문해력과 독서력은 차이가 있다. 이유식을 먹던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충분한 영양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듯이 문해력이 독서력으로 질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선 일정량 이상의 독서 경험이 필요하다. 즉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이다.
문해력과 독서력의 간극을 잘 말해주는 것이 우리의 독서량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지만, 곧 문해율은 아주 높은 편이지만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권’ 꼴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꼴찌 수준을 못 면하고 있다. 성인의 연간 독서량이 2008년 12.1권에서 2011년 9.9권으로 떨어졌으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한 달에 한권’이라는 수치도 그나마 올려 잡아서 그렇다. 게다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4명꼴이라고 하니, 지표만 보자면 우리의 독서현실은 매우 참담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 수는 세계 최저 수준인데 반해서 독서 인구나 평균 독서량은 현저하게 적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해력이 곧 독서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독서력은 문해력만 있다면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 아니다. 문해력만 갖고는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해력에서 독서력으로 건너뛰기 위해선 그 보폭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독서량이 요구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서력이 부족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단지 안 읽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독서력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어렵지 않다. 먹으면 살이 찌는 것처럼 읽으면 독서력이 붙는다. 다만 우리 뇌가 독서에 적합한 ‘독서근육’을 갖기 위해서는 비교적 단기간에 일정량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운동을 어느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독서량이 필요한지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에 따르면 대략 150권 정도의 독서가 필요하다. 그 정도 책을 2-3년 동안 독파해나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뇌는 독서에 적합한 구조를 갖게 된다. 그것이 비유컨대 독서근육이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독서근육은 너무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독서를 한결 수월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단순히 ‘읽는 것’과 ‘읽어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독서력이다.
따라서 ‘독서하는 인간’을 달리 ‘독서력을 갖춘 인간’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다. 독서의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스스로를 독서력을 갖춘 인간으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흔히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우리 각자는 독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해나가면서 비로소 독서의 가치를 알게 된다. 우리의 지식이 늘어남과 함께 정신이 성장하고 사고가 깊어지며 세계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 그것이 독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 ‘나의 세계’를 새롭게 변형하고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라는 말은 그런 의미의 무게를 갖는다.
한편 독서의 가치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를 ‘독서하는 인간’에서 ‘독서하는 사회’로 확장해본다면 우리는 독서라는 프리즘으로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 역사는 ‘책을 읽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라는 범주에 의해 구획된 역사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책을 읽는 계급이 읽지 못하는 계급을 지배해온 역사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문맹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나머지 30퍼센트의 독서인구, 그리고 더 좁혀서 일본어 해독력까지 갖춘 10퍼센트의 조선인이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다. 반대로 글자를 모르고 책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그것은 예속의 근거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보통교육이 시행되면서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해력을 갖춘 인구가 문맹 인구보다 더 많은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소위 민주공화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때, 그 국민은 형식적인 자격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격, 균등한 능력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문해력은 그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1948년 최초로 총선거가 실시될 당시에는 이 기본 능력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표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후보자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써넣는 기재투표 방식이 아니라 작대기로 기호를 표시하는 기호투표 방식이었다. 문맹자가 다수였던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후에 이것은 후보자의 이름과 숫자가 나열된 공란에 붓 뚜껑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원시적인 방식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내는 기재투표를 하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독서능력을 그 수준의 척도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 종류의 정부, 혹은 세 단계의 정부를 가질 수 있다. 곧 ‘문맹자가 다수인 국가의 정부’, ‘문해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 ‘독서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가 그것이다. 독서능력의 여부가 국민의 수준을 결정하고 그 국민의 수준이 다시 정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독서의 사회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을 읽는 능력은 각자가 ‘나’를 만들어나가는 최상의 방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더 나은 정치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무얼 읽느냐에 따라서 한국의 미래가 달라진다. 독서는 우리 자신을 바꾸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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