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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위안의 책

Soli_ 2021. 6. 8. 01:31

《별것 아닌 선의》를 읽었습니다.

 

이소영 선생님,

간혹 우리는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세상이란 거대한 타자에 호기롭게 맞서던 소년 시절부터 부와 가난과 계급의 층위를 헤아리며 한낮의 분노로 휘몰아치던 청년 언저리를 지나, 어지간한 모순은 세상의 이치로 수렴하는 지경에 이른 지금까지, 저는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과 한결같은 사랑을 주는 이가 곁에 있었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고, 그 어쩔 수 없음으로 인해 저는 늘 죄인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책은 그런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듯했습니다.   

‘네가 바로 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 “내가 너야. 그래서 나는 알아본단다.”(《별것 아닌 선의》, 6~7쪽)

선생님의 책을 쉽게 읽을 수 없었어요. ‘프롤로그’에 적혀 있는 저 문장 때문에, 이 책이 저를 읽어버릴 것 같아서. 이유를 찾지 못한 외로움은 고착된 우울의 증상일까요, 혹은 부서진 마음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요. 상대가 불편할까 봐 말하지 못하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고백하지 못하고, 그도 힘겨울까 봐 저만의 비밀 속으로 스스로 고립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타적인 것 같아 보이는 저 명분들은 한낱 이기적인 경계심일지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소심한 속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의 닫힌 마음을 마술처럼 풀어놓더군요. 이를 테면, “나는 네게 좋은 상담자가 되어주지 못한 걸 미안해하지 않을 테니 너 또한 내게 한밤에 찾아온 걸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자”(35쪽) 한다거나 다짜고짜 “손윗사람의 표정과 자세로 아이처럼 울”(263쪽)어버리면서. 숙련된 조언 따위는 얼마든지 되받아칠 수 있지만, 상담자의 권위부터 서둘러 벗어버리곤 속절없는 울음을 선수 치는 이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실패담을 마치 유쾌한 성공담처럼 들려주고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써 상대의 아픔을 보듬”(117쪽)고야 마는 현란함이라니(‘현란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다’라는 뜻입니다).

진실을 쫓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진실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 신뢰하지 않습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 진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함을 아는 사람의 선의 앞에 종종 무너지곤 합니다. 선생님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렇습니다. ‘너일 수 없는 나’와 ‘나일 수 없는 너’를 명확하게 인지하는 까닭에 ‘내가 너’라고 말할 수 있으며, 결국 ‘우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급기야 책의 곳곳에 보석처럼 새겨져 있는 어여쁜 기도의 문장들이 ‘불가해한 위안’을 선사합니다.

다만 뭔가를 얻은 것 같으니 그거라도 꺼내주고픈 간절함을 옮겨보았을 따름이다. (…) 그리고 내가 그랬듯 누군가도 그렇게 하리라는 상상은, 불가해한 위안을 준다.(156쪽)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정밀아의 노래를 거듭거듭 들었습니다. 그의 앨범 <청파 소나타>에는 그가 사는 동네인 청파로에서 서울역 사이에 존재하는 온갖 소리들이 날것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배회하며 언젠가는 잊히고야 말 소리들을 채집합니다. 첫 번째 트랙인 <서시>에는 새벽녘 새소리가, <광장>이란 노래에는 도시의 백색소음이 깔려 있습니다. 새들의 지저귐과 도시의 백색소음이 어우러지고,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가 지극히 사회적인 맥락에 놓이는 그 지점에서 정밀아의 노래는 오롯한 아름다움을 성취해냅니다.

밤, 이 밤은 물러날지니 / 아침, 새 아침이 밝아오리라  / 어제, 어제를 살아낸 나는 / 지금, 다름 아닌 지금 이곳에 (정밀아, <서시> 부분)

텅 빈 광장의 바람 / 미지근한 여름비 / 젖은 마음을 내어 말릴 한 평 마음의 광장 (정밀아, <광장> 부분)

선생님의 글과 정밀아의 노래는 참 잘 어울렸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타자의 통증을, 그 신음소리를 가지런히 채집해놓은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내어주고픈 소망들의 원형”(156~157쪽)을 무수한 선의들로 풀어놓습니다. 독자들은 “젖은 마음을 내어 말릴 한 평 마음의 광장” 같은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이 밤은 물러날 것이고 새 아침은 밝아올 것이라는, 존 버거가 말한 ‘가녀린 희망’에 다다릅니다.

저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책에 회의하면서도 기어코 책을 만들고 있는 저에게, 슬픔과 기쁨은 동일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부서지던 순간에도 나는 내려놓지 못했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손에 쥔 것들을 한 번도 놓지 못했다”(217쪽)라는 선생님의 문장은, 제가 미처 고백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출판의 길에서 누군가의 악의에 몸서리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그의 악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제가 그토록 몸서리쳤던 그가, 어쩌면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의로 악의를 이겨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책의 마지막에, 처음부터 그 자리에 놓이기로 작정한 듯한 편지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잊히는 것이 편집자의 숙명이지만, 간혹 편집자는 저자들로부터 상처받기도 하지요. 환희 편집자를 소환해내는 선생님의 선의로 인해, 이 책을 읽는 모든 편집자들이 위로받을 겁니다. 덕분에 다시금 힘을 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래오래 그곳에 계시길, 계속 이야기해주시길, 늘 건강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파주에서, 김진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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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