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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숙명,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큐티진, 131105)

Soli_ 2013. 11. 22. 16:55

큐티진 2013년 12월호


거부할 수 없는 숙명,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잊혀진 제자도>(달라스 윌라드 지음윤종석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07)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쉐인 클레어본 지음배응준 옮김아바서원 펴냄2013)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슴 벅찬 감격의 순간도 있지만, 수치를 감당하거나 슬픔이 압도할 때가 더 많다. 교회는 더 이상 시대의 희망이 되지 못한 채, 저잣거리에서 값싼 능욕을 감당해야 하는 처치로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라는 압도적인 확신 때문이다. 


'거대한 누락'을 극복하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것


이 모든 안타까움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소명의 부조화에서 비롯되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 부조화를 “거대한 누락”(Great Omission, <잊혀진 제자도>의 원제)이라고 설명한다. ‘모순’은 결국 ‘다름’으로 귀결된다. 하여, 세상에는 그리스도인과 ‘유사 그리스도인’이 있다. 윌라드는 우리의 내면과 일상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소명이라고 강조한다. 부조화의 극복은 <영성훈련>(은성)에서, 총체적 제자도의 구현은 <하나님의 모략>과 <잊혀진 제자도>(이상, 복있는사람)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절대 쉽지 않으나 곁에 두고 곱씹어 볼만한 탁월한 책들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인문학자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신학과 인문학의 부조화는, 학문의 본질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의 삶의 양태로 드러난다. 그 모순을 온전히 극복할 수 있다면, 신학과 인문학의 길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많은 책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얼마 안 되는 저작들은 단연 돋보인다. 윌라드의 신학은 철학적 사유로 수행되고, 그의 철학은 신학적 가치로 귀결된다. 인문학은 ‘인간다움’의 실현에 있다.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는, 기독교적 영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예리함과 세심함으로 발휘된다. 글을 썩 잘 쓰는 사람은 아니나(혹은 번역 문제일까?), ‘좋은 글’을 쓰는 학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잊혀진 제자도>를 특히 추천하고 싶다(제자도에 관한 좋은 책이면서 달라스 윌라드 입문서로도 제격이다. 반면, 제목만 봐선 제일 쉬울 것으로 예상되는 <하나님의 음성>이 개인적으론 제일 힘겨웠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다. 그 단순한 숙명을 수행하는 것이 소명이다. 단순함은 총체적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감정과 생각, 뜻과 의지, 몸과 영혼을 아우르는 삶 전체’(이를 간단히 번역하면 ‘일상’이다)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매뉴얼이나 프로그램이 아닌 삶의 자리가 중요하다. 


제자는 ‘거대한 누락’을 극복하고, 타자에게로 나아간다.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의 명령은,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돌봄의 신학은 가난한 이웃들뿐만 아니라 고통받고 신음하는 피조 세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다르지 않듯이, ‘제자가 된다는 것’과 ‘제자를 삼으라’는 당위도 다르지 않다. 홀로 살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뜨거운 숙명이다. 


그분은 불온하셨다


한편, 제자로의 부름은 단순하지만 결코 온건하지는 않다. 모든 제자의 표상인 예수께서 그러하셨다. 예수는 제국의 권력, 폭력, 전통, 가치, 논리, 통념에 맞섰으며,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그분은 불온하셨다.  


C. S. 루이스는 청년 시절,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논쟁했다. 쉐인 클레어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 인생이 완전히 난파당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의(혹은 교회의) 모순과 부조리 때문이다. 하나님은 적당한 선행을 품위 있게 향유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로마제국에 맞선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호명되었다. 그 자체로 본질을 규명하는, 여타의 다른 수식어를 허용하지 않는 호명이었다. 결국 ‘괜찮은 그리스도인’은 ‘유사 그리스도인’의 변종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제자다. C. S. 루이스는 그 순전함을 추구했고, 쉐인 클레어본은 그 단순함을 살아냈다. 


쉐인 클레어본의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는 불편하고 불온하여 위험한 책이다.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불편하고 볼온하여 위험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이다. 클레어본은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를 설립한 후, 가난한 이웃의 벗이 된다. 그들의 소유를 기꺼이 노숙인들과 나눈다.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고, 모든 폭력에 저항한다. 제국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폭격이 진행되는 이라크 바그다드를 방문하여 위험에 처한 이들을 보듬는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한 이상, 혁명은 거부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된다(이 책의 원제는 “The Irresistible Revolution”이다). 이 책이 위험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 클레어본의 책은 텍스트의 경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고, 기어코 당신의 가슴속에서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