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썼던 '미영'이란 아이는 실존 인물이죠. 교회 동생이었고 함께 '로뎀의 터'라는 모임을 했었죠. 더불어 기도도 하고, 책도 보던 친구들. 이 편지 형식의 서평, 아니 서평 형식의 편지는, 그 친구에게 쓴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바람에 맞서' 비틀거리고 타협하는 제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글인데 끄집어 내어 블로그에 올려놓습니다. 소개한 책 중 일부는 절판되었고, 지금이라면 다른 저자의 다른 책을 추천할 것 같으나 그대로 싣습니다. 2013/01/29 13:36
IVP 북뉴스 2005년 11,12월호_booker의 책 읽기
“바람에 맞서기, 그 이후”
-오랜 친구, 미영에게-
“바람에 맞서기”. 오래 전에 미영이가 내게 보내온 메일의 제목이었단다. ‘로뎀의 터’라는 모임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어떻게 맞서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절, 같은 고민과 열정으로 모였던 지체들이 옆에 있어 그래도 따뜻했던 시절. 그즈음 미영이가 내게 보내왔던 메일이었단다. 아마도 가을, 지금과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다.
바람에 맞서기. ‘가을’이란 계절이 주는 감흥, 내지는 스산함이 주는 변덕. 여기에서 ‘바람’이 단순히 그런 것들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신앙’과 취업을 앞둔 세상 속의 ‘삶의 자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고민 속에, 저항하며 때로 굴복하며 우리네 청년의 자리에서 세상과 치열하게 맞섰던 우리들. 그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던 미영의 모습을 기억한다. ‘치열함’은 분명 청년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다. 그럼에도 수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 보는 그 치열함에 대한 기억은 때로 마주하기 난처한 쑥스러움 정도로 치부되기도 한다. 요즘 그 난처함이, 쑥스러움이 유난히 아팠단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미영과 다시 나누었으면 한다.
우린 모임에서 여러 책들을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 지금도 통치하십니까?』(IVP, 1999)라는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싶다. ‘고통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 나라 입문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리처드 뷰스는 혼란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오히려 세상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살라고 말한다. 그것이 혼란과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내면화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역사 속에, 지금 이 순간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고민들이 바로 그 ‘통치권’에 맞닿아 있었음은, 오늘 다시 감사하게 되는 대목이다. 적어도 우리의 출발점과 문제인식은 바른 방향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최근에 읽은 『마음의 혁명』(그루터기하우스, 2005)에서 저자 클리로프 윌리엄스는 두 종류의 영적 분열성에 대해 논의한단다. 하나는 마음의 양면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착각이다. "Singleness of Heart"라는 원제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저자는 마음의 단일성을 온전히 갖게 될 때 인생의 비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가지 면에서 인상 깊었단다. 첫째는 저자의 집요함. 장이 거듭될 수록 나의 이중성과 분열된 양면성을 끈질기게 공격하는 저자의 집요함은 참으로 유용했다. 둘째는 책에서 인용되는 어거스틴, 도스토예프스키, 어네스트 벡커, 톨스토이, 키에르케고르 등과 같은 문호들의 사상과 영적 통찰력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우리가 고민하며 읽어냈던 이들이기에 그 감흥은 참으로 반가웠단다. 아무튼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이중성과 양면성은 오래 전 그 치열함을 묻어버리려 했던 또 다른 유혹이었기에, 만약 미영이가 나와 같은 난처함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가 모임을 갖던 당시만 해도, 제3세계 종교, 동양권의 신비주의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졌던 ‘영성’이란 개념이 이제는 기독교 내에서도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영성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라면 오늘 우리의 고민도 결국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그곳으로 귀결될 것이다. 영성을 논할 때, 난 항상 토머스 머튼, 헨리 나우웬, 유진 피터슨, 폴 스티븐스를 언급하는데, 앞으로는 마이클 호튼도 꼭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최근에 호튼의 책들이 여러 권 번역되었단다. 『미국제 영성을 속지말라』(규장, 2005)에서 호튼은 미국제 영성을 ‘인간의 전적 부패성이 간과된 채 인간에 대한 낙관, 실용주의와 성공지향주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가운데 갖가지 방법론과 테크닉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영적 경향’이라고 말한다. 호튼의 글은 명료하고 단순하다. 때로 어떤 결론이 이미 전제된 채 접근하여 자신의 논의를 확증시키는 듯한 그의 글이 무언가 허전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호튼의 책들은 주목할만하다. 특히 그가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적 신학의 전제들은 대단히 건강하다(물론 그러하기에, 그의 글에 아쉬움을 갖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도신경과 십계명을 다루는 또 다른 그의 신간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핵심』,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이상 부흥과개혁사, 2005)은 그런 그의 장점이 돋보이는 책이다.
미영에게 호튼을 소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시, 아니 언제나 필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신학적 전제를 저마다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란다. 우리가 고민하던 영성의 문제, 그리고 삶의 문제. 그 이전에 우리의 출발점으로서의 신학적 전제, 말이다. 호튼의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도 건강한 전제는 언제나, 반드시 필요하단다. 예전에 미영에게 소개해준 책 중에,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를 읽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에임스는 그 책의 첫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단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다”. 아직 안 읽었다면 이 책부터 읽는 것이 좋겠다. 흔히들 에임스를 어거스틴과 스콜라주의적 근원을 가진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학자라고 말하는데, 적어도 이 책은 정말 꼭 읽을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론 청교도신학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아쉬움이 있었단다. 그 아쉬움에 대한 갈증이 자끄 엘룰을 만날 때 어느 한 부분 해소될 수 있었다. 『존재의 이유』(규장, 2005)에는 역자이자 엘룰의 사상을 꾸준히 소개해온 박건택 교수의 서문이 있다. 엘룰을 아직 모른다면 이 서문은 매우 유익하다. 그가 말한 대로, 엘룰은 결코 합쳐칠 수 없는 양자로 치부되던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의 변증법을 전개했다. 사회학적이고 실존적인 현실 분석 앞에 그가 다다르는 변증법적 결론은 역시 성경이다. 그가 논쟁적 후기로 덧붙인 대로, 이 책은 그의 지적 여정이자 인생 여정의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을 담고 있다.
건강한 출발점과 ‘엘룰’적 고민과 통찰을 가지고 있다면, 다음으로는 유진 피터슨과 폴 스티븐스가 유익할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존재감을 기반으로 한 일상에의 탁월함을 말한다는 점에서, 유진 피터슨과 폴 스티븐스는 비슷하다. 특히 스티븐스는 ‘생활 영성’을 신학적 개념으로, 그것도 일상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은 폴 스티븐스만 얘기하자. 난 그의 최고의 책으로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IVP, 2001)을 꼽는다. 그의 논의는 적절하고 탁월하지만, 단 그의 글은 조금 지루하다. 최근에 나온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죠이선교회, 2005)는 그래서 더 반가웠다. 우선 이 책은 지속적인 그의 테마를 다루면서도, 재미있다는 장점이 있다. 야곱이 가지고 있던 연약함, 동경, 갈망, 모호함, 그리고 궁핍함에 대한 그의 고찰은 오늘 우리가 겪는 ‘난처함’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용기가 된다.
결국 우리가 다시 마주해야 할 고민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구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문제이다. 그리고 오늘, 그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고민에서 너무 멀리 돌아온 듯한 내 자신에게 다시 그것을 말하는 용기이다. ‘난처함’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의 출발점이 옳았다면, 그리고 우리의 고민들이 합당한 것들이었다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을 아낌없이 격려하는 것이다. 청년의 치열함은 보다 숙련된 언어와 몸짓으로 변모하겠지만, 그 정도는 용인하는 마음을 갖자. 그것을 변절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가을이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너무 오래 서로를 보지 못해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 난처함도 이제 극복해보자. 샬롬.
2005.10.25. Soli^^
ps. 나르니아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미영에게 선물하고픈 책이 나왔다. 『루이스와 톨킨』(홍성사, 2005). 이 책의 첫 구절에 인용된 루이스의 글이 ‘우정’을 말한단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어떤 요구나 의무도 없으며, 마치 한 시간 전에 만난 것처럼 모두가 자유롭고 동등하다. 그러면서도 세월에 무르익은 애정이 우리를 감싼다.” 다음에 만날 때, 이 책을 꼭 선물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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