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 120

희망의 ‘그날’은 없다 (복음과상황, 20140417)

복음과상황(2014년 5월호)_“독서선집” 희망의 ‘그날’은 없다 ≪“살아가겠다”≫(고병권 지음│삶창 펴냄│2014년 1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철학과 배움, 투쟁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살아가겠다”는 사유의 본질이 된다. “철학자란 자기 삶으로 철학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책에 갇힌 사유가 아니라, 길 위에서, 현장에서 입증되는 사유가 철학인 것이다. 하여, 이 책의 저자 고병권은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린다. 책의 제목은 ≪“살아가겠다”≫이다. 따옴표가 붙은 이유는, 그것은 저자의 말이 아니라 어느 날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적혀 있던 누군가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겠다”를 읊조리며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고병권..

세상에서 가장 옳은 질문이, 이제 막 주어졌다 (기획회의 364호)

기획회의(364호, 20130322)_출판사 서평 세상에서 가장 옳은 질문이, 이제 막 주어졌다 공부란 무엇인가 (이원석 지음|책담 펴냄|10,000원)이원석은 공부에 대한 오랜 통념을 전복하고 새로운 통찰을 시도한다. 바로 존재를 변혁하고 삶을 벼리고 우정을 도모하는 공부의 삶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행복은 공부 순이다. 이원석 선생을 처음 만난 건 2007년 2월이었다. 당시 일하던 출판사는 해마다 독자들을 위한 독서와 글쓰기 워크숍인 ‘문서학교’를 열었고, 담당자였던 나는 이원석 선생을 ‘독서법-서평쓰기’ 강사로 초청하였다. 그는 여러 매체에 서평을 쓰고 있었는데, 텍스트에 대한 집요한 열정이 돋보이면서도 구도자적 지향을 성실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실은, 그를 강사로 초청하는 데 내부의..

희망이란,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 (복음과상황, 140310)

복음과상황(2014년 4월호)_“독서선집” 희망이란,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 ≪사월의 미, 칠월의 솔≫(김연수 지음│문학동네 펴냄│2013년 11월) 소설가 김연수는 진실에 대한 탐구자다. 언젠가 그의 블로그에 쓴 독서일기를 모은 작은책 ≪김연수欄(란)≫이 있었는데(정식으로 출시되지는 않았다), 거기엔 이런 문장들로 가득하다. “진실이란,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말하지 못하는 부분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160쪽) “진실은 버거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진실은 거기 존재한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 좀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180-181쪽)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진실에 대한..

꽃처럼 붉은 울음, 꽃보다 아름다운 시 (복음과상황, 140110)

꽃처럼 붉은 울음, 꽃보다 아름다운 시 ≪꽃보다 붉은 울음≫(김성리 지음│알렙 펴냄│2013년 11월) 작가 존 버거는 시와 소설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 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 준다.”(≪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29쪽) 소설이 어떤 서사의 전모라면, 시는 그 서사 속에 갇힌 ‘부상당한 이’의 독백이다. 시는 역설의 언어이기에 평화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그래서 ..

위태로운 경계를 걷는 이들의 위로 (복음과상황, 131210)

복음과상황(2014년 1월호)_“독서선집” 위태로운 경계를 걷는 이들의 위로 ≪다른 길이 있다≫(김두식 지음│한겨레출판 펴냄│2013년) 루쉰의 소설 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소설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에 만약 정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면, 우선 감히 말하고, 감히 울고, 감히 노하고, 감히 욕하고, 감히 싸우며 이 저주스러운 곳에서 저주스러운 시대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이상, , 을유문화사, 2008)김두식과 ‘그의 인터뷰이’를 따라 걷는 내내,..

‘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C. S. 루이스 (복음과상황, 131110)

복음과상황(2013년 12월호)_“독서선집” ‘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C. S. 루이스(C. S. 루이스 지음│홍종락 옮김│홍성사 펴냄│2013년)(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홍종락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13년) 친애하는 벗 루이스, 이 글은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에 대한 답장입니다. 이 책은 월터 후퍼가 편집한 3부작에서 385통의 편지를 발췌한 것입니다. 당신의 오랜 벗이었던 아서 그리브즈, 친형 워렌 루이스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신인이었지만, 저는 이 ‘모든’ 편지들을 당신이 저에게 쓴 편지로 읽었습니다. 예의와 품위가 깃든 여러 조언과 변증은 하나의 표상으로, 은밀함을 담보한 우정은 자긍심으로 남았습니다. 슬픔을 관조하듯 담담히 써 내려간 대목은, 벗으로서(벗이기에!) 참으로 ..

'관능'의 습격에 관한 소고

'관능'의 습격에 관한 소고 (이서희 지음|그책 펴냄|2013년 11월) 시인 김소연은 '근거를 찾아 나선 상태'를 "홀림"으로,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해 불안정한 상태'를 "반하다"로, '근거들의 수집이 충분히 진행된 상태'를 "매혹"으로 정의한다(, 123쪽). 그렇다면, 이 책에 대한 매혹은 합당하다. 감각을 한껏 자극하는 미려한 문장들이 그 첫째 이유다. 문장들에 스민 삶의 서사는 독자의 가슴을 도발하여 흔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요동친 존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체득한다. 이른바 '관능'의 습격이다. 미셀 푸코는 성(Sex) 문제를 사회적 권력의 지배 관계로 고찰한다. 지배 권력은 '합법과 비합법, 허용과 금지'의 통치 기제로 성을 통치하려 한다. 성은 근원적 욕망의 문제인 까닭에, 사회적 통제(..

엄혹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빛과소금, 131112)

빛과소금 2013년 12월호 엄혹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스무 살 예지에게,[각주:1] 1979년 4월 3일, 아버지가 암으로 소천(召天)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 그대의 할아버지였지요. 저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으니, 지금의 그대보다 한 살 어렸을 때입니다. 아버지가 투병하시던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우는 누나를 달래곤 하셨지요. 전 아버지의 냄새가, 가래 끓는 소리로 탁하게 갈라진 낮고 굵은 목소리가 싫었습니다. 담배 냄새 절은 삼촌들이 얼굴을 비비대는 것도 싫었습니다. 집 앞 골목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큐티진, 131105)

큐티진 2013년 12월호 거부할 수 없는 숙명,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달라스 윌라드 지음|윤종석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07)(쉐인 클레어본 지음|배응준 옮김|아바서원 펴냄|2013)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슴 벅찬 감격의 순간도 있지만, 수치를 감당하거나 슬픔이 압도할 때가 더 많다. 교회는 더 이상 시대의 희망이 되지 못한 채, 저잣거리에서 값싼 능욕을 감당해야 하는 처치로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라는 압도적인 확신 때문이다. '거대한 누락'을 극복하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것 이 모든 안타까움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소명의 부조화에서 비롯되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

기고_/큐티진_ 2013.11.22

불의한 역사의 전복을 위한 시도(복음과상황, 131008)

●복음과상황 11월호_“독서선집”●복음과상황(link)에는 원고가 넘쳐 본문을 조금 들어냈습니다. 블로그엔 전문을 싣습니다. 불의한 역사의 전복을 위한 시도 (장 아메리 지음│안미현 옮김│길 펴냄│2012년) 장 아메리의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벨기에로 이민갔다. 이후 반나치즘을 위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43년 7월 체포되었고,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등의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종전과 함께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체포된 유대인 2만5000여 명 중 겨우 615명이 살아 남았으며, 아메리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한 사람 때문에, 엄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 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