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상황(2014년 4월호)_“독서선집”
희망이란,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
≪사월의 미, 칠월의 솔≫(김연수 지음│문학동네 펴냄│2013년 11월)
소설가 김연수는 진실에 대한 탐구자다. 언젠가 그의 블로그에 쓴 독서일기를 모은 작은책 ≪김연수欄(란)≫이 있었는데(정식으로 출시되지는 않았다), 거기엔 이런 문장들로 가득하다.
“진실이란,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말하지 못하는 부분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160쪽) “진실은 버거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진실은 거기 존재한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 좀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180-181쪽)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진실에 대한 탐구자인 동시에, 그것을 함부로 예단하거나 장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진실을 열망하지만, 결코 그 진실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추리소설의 합리성은 탐정의 합리성이며 정신치료의 합리성은 의사의 합리성일 뿐이다. 합리성과 진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실은 가끔 모두에게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진실의 대부분은 모두의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진실일 확률이 더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성과 진실을 착각하니까.”(27쪽)
특히 그것은 타인의 진실일 경우에 더욱 분명하다. 우리는 타자의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김연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진실은 거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의 실존을 의심하지 않으며, 다만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의 소설은 타자의 진실에 닿고자 하는 열망이자, 그것의 실패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실패하였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진실을 향해 더불어 전진하는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함께’ 실패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가치 있는 위로 혹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진실, 패배를 받아들이는 일
이상문학상을 받은 <산책하는 사람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등 11편의 단편을 모은 다섯 번째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는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좀더 다양한 인물 군이 등장한다. ‘명품시계 정시당’의 주인 할아버지, 발달장애아 태호, 한때 영화배우였던 팸 이모, 닥터 강과의 재혼에 실패했던 엄마, ‘주쌩뚜디피니’를 부르던 엄마, 절필한 소설가, 방화범 동욱, 어머니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결국 사랑에 실패했던 아버지, 대리운전을 하는 선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소년 정인구, 가슴을 짓누르는 ‘코끼리’와 동거하는 한 사내의 서사가 빼곡히 담겼다.
첫 번째 단편 <벚꽃새해>에는 오래 전 헤어진 연인이 등장한다. 남자가 서른이 되었을 때,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선뜻 받아들인 여자로 인해, 남자는 몸살 같은 슬픔을 앓았다. 남자의 치기를 좌절시키는 ‘서른 무렵의 찌질함’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 또래 군상의 표지이기도 하다. 아무튼, 다시 4년이 흐른 뒤, 여자에게서 전화가 온다. 자기가 선물했던 시계 ‘태그호이어’를 돌려달란다. 이번엔 여자가 ‘찌질한 서른 무렵’을 지나고 있었다. 꼬박 2년을 다녔던 직장을 잃었고, 세상은 그녀의 것들을 그렇게 하나 둘씩 앗아갔다. 남자와 여자는 4년 만에 만나 시계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오랜 세월에 묻어 쇠락하고 있음이 분명한 빨간 간판을 가진 ‘명품시계 정시당’를 찾는다. 그곳에 시계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할아버지가 있었다.
“헛된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게 한심해서”라는 여자의 푸념에, 할아버지는 “헛된 시간이라…”라고 읊조리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그리고 ‘병마용 모형 인형’에 대한 사연을,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게, 날마다 먼저 책을 읽고 흥미로운 대목들을 찾아 다시 읽어주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꿈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일 수 없다는 것을, 옛 연인은 배운다. 마침 벚꽃 날리던 4월이었다. 뜨겁게 사랑한 그들이 맞이했던 4년 전 태국의 새해(쏭끄란, 4월 13일)가 생각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4년 만에, 그들은 ‘진실로’ 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깊은 밤, 기린의 말>의 발달장애아 태호에 대하여, 정의로운 비관주의자 아빠는 “완치 같은 말은 잊자. 그건 너무 아름다운 말이다. 너무 아름다운 건 진실하지 못하다.”라고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우리 모두 태호가 되자.”라는 각오를 다졌고, 확신에 찬 고집불통 엄마는 직장을 그만 두고 지극정성으로 매달리지만, 그들은 곧 패배를 인정하고 굴복한다. 그들에게 인내심이란 “뭔가 이뤄질 때까지 참아내는 게 아니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을 뜻했다. 견디는 게 아니라 패배하는 일”이었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적어도 그들에겐 같은 함의였다. 그런데 그들이 패배를 받아들일 즈음, 그리고 시각장애를 가진 강아지 ‘기린’을 입양하던 즈음, 태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소설 속 화자 태호의 쌍둥이 누나는 이 즈음의 기록에 “2009년 가을, 진정한 우정의 시작”이라 적는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걷는 것
작가는 저마다의 어떤 불가피한 슬픔과 불가해한 고통에 대하여 ‘진실’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각각의 서사로 구현한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진실에 대한 해명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죽는 일”을 꿈꾸던 한 여인의 삶을 관통했던 잔인한 슬픔을 애틋한 시선으로 관조하거나(<사월의 미, 칠월의 솔>). “현실은 고통을 원리로 건설됐다.”는 비관을 직면하고 해명되지 않는 그 실체의 ‘비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한때 사제가 되고자 했지만 지금은 대리운전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선배와의 동행 속에(<파주로>), 자식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엄마의 가녀린 추억 속에(<일기예보의 기법>),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 후에야 엄마와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깨닫는 딸의 고백 속에(<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작가의 바람은 어떤 희망을 조심스럽게 가늠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혼자서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저처럼 한낮과 다름없이 환하고도 파란 하늘에서, 혹은 스핀이 걸린 빗방울이 떨어지는 골목에서, 분당보다도 더 멀리, 아마도 우주 저편에서부터. 그렇게 저마다 다른 곳에서 혼자서 걷기 시작해 사람들은 결국 함께 걷는 법을 익혀나간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았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319쪽)
진실은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타자의 고통에 닿을 수 없지만, 그들과 함께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고백하며, 공존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온몸을 사용하여 그의 슬픔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함께 걷는 것이다. 작가는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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