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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샬롬’에 헌신한 ‘그을린 예술’의 길 (복음과상황, 130805)

Soli_ 2013. 8. 28. 09:05

복음과상황(2013년 9월호)_“독서선집”


‘정의와 샬롬’에 헌신한 ‘그을린 예술’의 길

<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민음사 펴냄│2013년)

<행동하는 예술>(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신국원 옮김│IVP 펴냄│2010년) 




일흔이 되기 전까지 까막눈이었다. 뒤늦게 글을 배워 시를 쓰기 시작한 할머니는 이제 여든살이다. 이제는 한낮에도 시상이 자꾸 떠올라 밭일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다. 예술이란 “작품의 제작인 동시에 삶의 제작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한 몰두가 자아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사회질서가 자기에게 부과한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모험”이기도 하다. 어떤 예술은 비루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 되고 모험이 된다. 심보선 시인은 이를 ‘그을린 예술’이라 명명한다.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그을린 예술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해 있다(<그을린 예술>, 14-15쪽). 


예술가 본인이건, 그의 작품을 위탁한 어떤 자본 세력이건, 누군가에게 독점된 예술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리하여 심보선은 “예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라고, 불온한 희망을 선동한다. 한편, 위기에 처한 ‘그을린 예술’은 타인과의 우정을 모색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정은 어떤 손익을 헤아려 맺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추락하였으나, 진정한 우정은 “함께 살고 함께 존재하고 함께 지각하는 것, 그 자체가 좋고 즐겁기 때문에 맺는 타인과의 관계”를 지향한다. 예술은 창작과 해석을 통해 고유한 삶의 형태를 빚어내고, 타인과의 우정을 통해 공존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삶의 평범함과 궁색함을 창작과 해석, 친구-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각하고 나눌 때, 인간은 비범하고 위대해진다. 평범한 비범함, 궁색한 위대함이야말로 ‘우정으로서의 예술’이 밝히는 인간적 실존이다(34쪽). 


이 책은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의 예술 이론서이자 현장 르포집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며 시작된다. 첫째, ‘사회학자인 나’는 ‘시인인 나’의 꿈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 예술은 어떻게 사회적 실재의 운동과 연결되고 실현되는가? 둘째, 죽어 가는 현대의 예술이, 파괴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에 제공하는 꿈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술가들은 위기에 처했다.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려는 자기도취적 존재 증명”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편승해 성공을 욕망했지만, 과도한 경쟁 논리에 휘말려 낙오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따라서 저자는 사회학적 비평을 통해 ‘예술의 죽음’을 논증하고 ‘시인의 꿈’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가늠한다. “그 꿈의 장소는 피난처이자 서식지이자 투쟁 거점”이 될 것이다. 


‘꿈의 장소’는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2009년 용산참사 이후 출범한 ‘6∙9 작가선언’은 “이명박 정권하의 한국사회를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로 명명하며 ‘지금 바로 여기’가 전쟁 상태이며 적의 영토”임을 적시했다. 또한 예술가들은 홍대 두리반 투쟁을 통해 기어코 희망을 사수했다. 인천공항행 경전철역이 들어서면서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거대 재벌의 투기 자본에 휩쓸렸고, 그 일대의 상가 세입자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날 처지에 처했다. 칼국수 보쌈 전문집 ‘두리반’도 예외가 아니었으나 끈질기게 버티던 그들에게,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용역이 들이닥쳤다. 그날 이후, 2011년 6월 8일까지 531일의 지난한 투쟁이 펼쳐졌다. 2010년 5월, 59개의 밴드가 음악공연을 펼쳤고 3,000명의 관객이 두리반을 찾았다. 독립 영화가 상영되었고 문학 작가들의 낭독회가 이어졌다. 미술가들은 두리반 일대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저항은 쉼 없는 축제로 계속됐다. 거의 모든 예술 장르가 집결하여 우정과 연대를 과시했고, 그들은 끝내 두리반을 사수했다. 자본주의 불길에 휩싸인 위태롭던 희망을 구원한 것이다. 


두리반은 철거민의 투쟁에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을까? 위의 변수들은 우연히, 특이한 조건하에서 결합된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수는 ‘그곳에서 함께 말하고 행동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두리반은 무엇보다 그러한 의지의 거점이었다(119쪽). 


현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동물화, 노예화, 속물화’에 저항하는 ‘의지의 거점’에서, 예술은 가장 남루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진실의 실체를 규명하였다. 비참한 현실은 죽은 예술을 각성시켰고, 마침내 되살아난 예술은 그 현실을 축제의 장으로 비약시켰다. 두리반은 숱한 투쟁에 있어 하나의 전범으로 유효하지만, 보편적 희망으론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이 연대한 한반도 강토 곳곳의 투쟁은 여전히 비관적 전망과 싸우고 있는 까닭이다. 이 책도 희망의 증거를 채득하여 서술할 뿐, 섣부른 승리를 예견하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그을린 예술’일 뿐. 그런 까닭에, 저자는 예술의 꿈의 정체를, 예술이 가야 할 길을 거듭거듭 집요하게 질문할 뿐이다. 오직 그 질문만이 유효하다. 




정의와 샬롬이 실현되는 자리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현대 예술이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현대 예술은 일상과 분리된 채 범접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감상용으로만 활용되는 고급예술 제도 속에 갇혀 있다. 특히 19세기 박물관의 등장 이후, 예술은 사회에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여 ‘고급예술의 독재’를 모략했다. 하지만 고립된 예술은 사회적 가치를 상실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본래 예술은 정의와 샬롬의 가치를 지향하는 하나의 행동이어야 했다.  


오히려 예술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궁극적 성공을 확증해 주신 바 세상을 갱신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그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기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예술은 그것이 제공하는 기쁨 안에서, 다가오는 샬롬을 예견하는 가운데, 우리 존재의 타락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행동하는 예술>, 162쪽). 


‘죽은 예술’의 대척점에서 심보선은 ‘그을린 예술’의 길을 희망한다면, 월터스토프는 본래 예술의 소명인 정의와 샬롬의 가치를 복원시키려 한다. 물론 심보선은 사회학자의 시각에서, 월터스토프는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의 시각에서 서술한다. ‘그을린 예술’을 월터스토프 식으로 말하자면, ‘정의와 샬롬의 예술’ 정도가 될 것이다. ‘정의과 샬롬’의 함의는 훨씬 포괄적이고 근원적이나, 월터스토프의 주장은 종종 그 본질에 머무르고 만다. 이 책의 장점도, 아쉬움도 여기에 있다. 


‘정의와 샬롬’에 헌신한 ‘그을린 예술’의 길을 보길 원한다. 월터스토프는 철저히 ‘기독교 예술’이란 제한적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 실현되는 장소는 훨씬 세속적이 되리라 기대한다. 마치 두리반에서 이름 없는 숱한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어울려 거침 없는 저항의 축제를 즐겼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