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길'을 숙고하다
공부하는 삶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이재만 옮김│유유│2012)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지음│한티재│2013)
기독교는 흔히 책의 종교라 불린다. 기독교인은 '그 책의 사람들'이어야 마땅하다. 식민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은 '그 책'의 예언을 소망으로 삼아 험난한 세월을 견뎌냈고,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는 그 책을 완성하고 확장하였다.
‘그 책’은 모든 사람에게로, 모든 학문적 영역으로, 모든 사회의 환희와 고통 속으로 확장되어야 마땅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계승자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는 그 확장을, 지성인에게 주어진 고귀한 소명으로, 《공부하는 삶》이라는 격조 높은 제목으로 소개하고 권면한다.
먼저, 이 책의 치명적 단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자. 역자 이재만은 이 책의 내용 일부가 ‘시대에 뒤진 듯한’ 예스런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성인은 남성으로 상정하고 아내의 역할은 남편의 공부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르티양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1882‐1941)나, 이 책이 쓰이고 널리 읽힌 시기에 성장한 한나 아렌트(1906‐1975) 등을 떠올리면, 이 책의 전제는 예스럽다 못해 가부장적 독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딜레탕티슴(dilettantism, 향락적 문예도락)’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배제하며, 대부분의 소설은 정신에 해롭다고 단정짓는 것도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세르티양주가 말한 ‘책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 책을 사용하는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공부라는 우리의 목표에 대한 하나의 출발점으로선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책 문제에서 핵심이다. 책은 신호, 자극제, 조력자, 기폭제다. 책은 대체물도 아니고 속박하는 사슬도 아니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저자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246쪽)
이 책은 지성인에게 주어진 소명으로서의 공부를 다루고 있다. 지성인이란 ‘지적인 일에 일생을 바치려는 사람’이며, ‘지적 소명’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제1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제1본성은,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진심으로 우리의 전부를 바칠 때, 진리는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한다. 따라서 공부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순결한 진심과 곧은 의지이다.
지적 소명은, 어떤 지적 성취에 만족할 수 없다. ‘위대한 사유는 심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적 소명은 도덕적 덕목 속에서 그 가치를 입증한다. ‘참된 것과 선한 것은 같은 토양에서’ 자라며, 순결한 영혼이 순수한 사유를 담보하며, 마침내 신과 함께 진리에 동참한다.
세르티양주는 무엇보다 공부하는 자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다독인다. 모든 여건이 척박하더라도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공부하는 삶은 시작된다. 비범한 재능이 아니라 끈질기고 집요한 노력이 요구된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치 정성을 들여 착실히 일하는 노동자와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에 ‘두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열정적인 고독’과 ‘고요한 확실성’을 쏟아부을 수 있는 ‘두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독자를 설득하지 않는다. 세심한 격려로 우리의 가슴을 북돋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한 어조로 여러 세심한 규칙을 요구하기도 한다. 소리 내어 읽고 싶은 단단한 문체로 실천적 적용을 모색한다. 텍스트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공부하는 삶을 향한 불끈 솟는 결연한 의지에 이르게 된다. 바로 그때, 세르티양주는 거듭하여 공부의 목표를 되새긴다.
읽기와 공부가 정신과 삶이 되게 하라.(203쪽)
이 책의 부제는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다. 좋은 책이고, 공부하는 삶에 대한 충만한 자극으로 그득한 책이다. 앞서 지적한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사례를 지금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용한다면 대단히 유용한 실용서가 될 것이다. 이만큼 품위 있는 실용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또 있다. 공부하는 삶이 지향하는 목표가 너무 막연하다. 정신과 삶이 되는 공부는,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루는 것인가. 세르티양주의 시대가 아닌, 우리의 시대에 공부는 과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모름지기 소명이란 훨씬 구체적인, 담대한 그 무엇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공부하는 삶’ 너머 ‘공부의 길’
성서적 가치는, 갇힌 진리가 아닌 세상으로 확장된 진리로서 실천되어야 한다. 공부하는 삶은 그 길을 찾는 것이며 그 길은 이 땅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공부의 길은, 깊은 사유이되 구체적인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청춘의 커리큘럼》의 부제는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이다. 저자 이계삼은 11년간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 후,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밀성고 2학년 4반 교실’에서 썼다고 한다.
그때 아이들은 숨죽여 공부를 하고 있었고, 가끔 나는 아이들의 무구한 얼굴들을 바라보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세상사의 격랑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견뎌 내야 할 세파의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 저리곤 했다. 이제 이 책을 그 아이들과 그의 친구들에게 바치고자 한다.(8‐9쪽)
저자는 '청년들이 이 가망 없는 대학과 취업의 좁다란 울타리를 걷어차고, 드넓은 들판을 질주하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썼다. 이 책은 E. F. 슈마허와 웬델 베리, 하워드 진, 도로시 데이, 다카기 진자브로 등을 통해 공부의 이유를 찾고 대중문화, 민주주의, 핵 문제, 전쟁과 평화, 문학, 교육, 철학, 영성 등의 분야에 있어 공부의 길을 탐구한다. 무엇보다 ‘자식 같은 제자’를 향한 ‘아비 같은 스승’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세르티양주와 이계삼의 공통점은, 치열한 고독이라는 전제,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걸음을 더 멀리 내딛는다’는 각오를 가졌다는 것이다. 세르티양주가 공부의 자세와 방법을 다루고 있다면, 이계삼은 그 공부가 성스러운 독방이 아닌 거친 광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디, 세르티양주에게 한껏 자극받은 공부에 대한 충만한 결의가, 이계삼이 교직을 내려놓고 뛰어든 그 광야 같은 세상에서 단단한 걸음으로 펼쳐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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