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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 (복음과상황/오마이뉴스, 130226)

Soli_ 2013. 3. 3. 07:30

오마이뉴스에 13번째 채택된 글이며(버금), "몰락한 교회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복음과상황(2013년 3월호)_“독서선집”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


「당신들의 기독교」(김영민 지음│글항아리│2012)

「회심의 변질」(알렌 크라이더 지음│박삼종 외 옮김│대장간│2012)





철학자 김영민의 도드라진 언어는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그의 서사는 구체화된 비수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만 같고, 깊은 탄식으로 우리 존재를 기어코 몰락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몰락한 우리 슬픈 존재들의 희망을 오직 ‘동무로서의 연대’에 둔다.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이며, 포섭할 수 없는 이웃이며, 다독거릴 수 없는 긴장이며, 끝나지 않는 기다림”인 타자와의 간극을 오직 “동무와의 연대”로 닿길 바란다(<동무론_인문연대의 미래형식>, 98면). 그는 인문학을 수행하는 학자가 아닌, 인문적 삶을 살아내는 자다. 학문적 사유는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경지, 그곳에서 불가능한 꿈을 지피는 몽상가이자 선동가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기독교의 불가능한 꿈을 이야기한다. 늘 그러하듯, 이번에도 그의 절망은 깊고 처절하다. 


김영민은 스스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당신들의 기독교”다. 하지만, 그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잘 드러나듯, 그는 ‘예수의 공동체 서사’를 밑절미 삼아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의 사상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유력한 체제와 기꺼이 불화하되, ‘무능과 부재의 인문적 급진성’을 무기 삼아 싸우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지는 싸움’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그를 ‘노마드 신자’, ‘무교회주의자’, ‘가나안 성도’ 등 무엇으로 부르던 상관 없으나, 나의 생각엔 그처럼 오직 예수로 인한 지독한 질곡(桎梏)의 삶을 사는 제자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 <당신들의 기독교>는 기독교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여타의 책처럼 ‘맞서’ 읽을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숨죽여’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열 명의 신자, 그들의 서사는 한마디로 통속적이다. A부터 J까지의 신자들은 대부분 절망의 표상이며, 때로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되 지극히 현실적이다. A는 언뜻 독실한 신앙인처럼 보이나 일종의 노동 행위로서, 맹목적 신앙의 관성에 젖어있을 뿐이다(“그의 종교 이데올로기는 실존적 반조에 이르지 못한 채 상상적 지식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습관의 상식에 의해 규제된 것이다”). B는 ‘욕망의 상대를 부모나 남편 대신 신이라는 환상적 대상선택으로 교체’한 70대 노파다. C는 ‘목사요 교사라는 사회적 기표를 페르소나로 삼아’ 살아가되 강남의 룸살롱을 넘나드는 사이비 목사이다. D는 ‘방언이나 통변의 은사 등으로 대변되던 가상 신비 체험’을 통해 뭇 성도로부터 우상화되던, 그러나 정작 현실 속에선 비극적 결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F는 ‘지나치게 쏟아내는 언사’에 스며든 나르시시즘 때문에 위태로운 목사다. G는 ‘자본제적 풍요의 신학’에 물든 교회 속에서 ‘으뜸’의 자리에 있는 교회 장로다. H는 비슷한 수준의 성도들과 어울리며 삶의 욕망과 쾌락을 위한 소비적 종교 행위에 천작하며, 그저 ‘문화적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뿐이다. I는 광신에 이른 종교적 진지함을 무기 삼아 ‘아무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나대는’ 밀양의 고명한 노방전도자이다. 


이들의 캐릭터가 가진 현실적 개연성 때문에, 읽는 내내 낯이 뜨거웠다. 막장 드라마란 가상의 시나리오가 현실 속에서, 그것도 교회 속에서 재현되는 참담함이란!(특히 이 글을 쓰는 지금, 강남 S교회 담임목사의 논문 대필 사건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아, 이 개연성이란!)


불가능한 꿈, '지는 싸움'을 따르는 사람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이다. "알아낸 지식을 통해 믿음에 이르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어불성설"(<당신들의 기독교>, 11면)이고, “알지 못하므로 부득불 믿게 될 것이나, ‘믿는’ 순간 부패를 피할 수”(4면) 없는 이 역설적 상황은, 우리를 불가능의 딜레마에 처하게 한다. 하여 김영민은 무엇인가를 ‘믿는’ 것이 아닌,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교인으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호패는 ‘고백’이나 신념 혹은 어떤 감동의 울결 따위가 아닙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며, 가면의 일관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올곧은 삶의 양식 속에서만 삶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삶∙죽음의 총체성과 이를 생활정치화하는 일관성만이 그 영혼을 증거합니다.(4면) 

 

김영민은 지금, 여기에서 기독교의 절망을 폭로하며, 기독교 신앙의 원형을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서 찾고자 한다. 제자란 ‘타자성의 소실점을 향해 몸을 끄-을-고 다가서는 검질기고도 슬금한 노력’이어야 하기에, 결코 예수보다 앞서지 말고,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5면)라고 권면한다. 열 명의 신자 중 희망의 징조처럼 비쳐지던 E와 J는(그리고 인용되는 본회퍼는), 제도권 안에서, 혹은 밖에서 ‘지는 싸움’을 통해 예수를 향한 불가능한 꿈을 따라 걷는, 거의 유일한 제자들이다. 그 꿈은 기꺼이 그 길을 걷다 죽는 이들로부터 싹틀 것이다.  


김영민이 쉴새 없이 던지는 난해한 질문들 앞에, 며칠을 바둥대며 그럴듯한 답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그 절망에 이른 즈음에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 ‘불가능한 꿈’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또 하나의 급진적인 책, 알렌 클라이더의 <회심의 변질>이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민이 주목한 기독교 신앙의 원형인 예수 공동체는, 알렌의 책에서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표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되, 오직 예수의 길을 따라 신념(Belief), 행동(Behavior), 소속(Belonging)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지난한 여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 기독교는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제국의 종교’가 되어가고, 회심은 그저 심리적, 정서적 측면으로 축소된 것이다. 알렌의 명료한 문장과 명쾌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오늘 우리의 절망을 정확히 지적하되 돌아가야 할 신앙의 본질을 선명히 제시하는 수작이다. 


김영민의 질문에 알렌의 책으로 답한다. 김영민이 흡족해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몰락한 우리의 교회들이 쉬이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도 불가능한 꿈을 향해 걸으며 죽을 만큼 괴로웠으며 실제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하여 우리도 통속적 기독교의 절망을 딛고 기어코 예수의 길을 걷다 죽어버리자. 그것이 세상에 맞서 저항하며 예수를 철저히 따르던 기독교 본래의 자리였으니까,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므로. 

(201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