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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하다 (복음과상황, 130905)

Soli_ 2013. 10. 3. 22:21

복음과상황(2013년 10월호)_“독서선집”



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억관 옮김│민음사 펴냄│2013년)






“기차역”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회사에서 역사(驛舍) 설계를 한다. ‘쓰쿠루(作)’라는 이름은 ‘만들다’라는 뜻을 가졌다. 공사를 담당한 역의 어딘가에 늘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십대 시절부터 그는 시종일관 기차역에 매료되었다. 역사가 없다면 기차는 멈출 수 없다. 기차가 플랫폼에 멈춰 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찾아 빠져나간다. 쓰쿠루는 기차역을 만드는 사람이다. 


“5”

다섯 명은 나고야의 한 고등학교 같은 반으로 만났다. 여름 봉사활동을 하다가 친해졌는데, 그들은 제각기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고 느꼈다. 다섯이란 숫자는 완전한 공동체를 상징한다. 남자 셋, 여자 둘의 구성은 자칫 연모의 정서가 개입될 경우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순수한 우정을 더욱 견고히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면서, 그들은 조금씩 균열되기 시작한다. 기차역 건축가가 되기 위해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쓰쿠루를 제외하고 나머지 넷은 나고야에 남았다. 쓰쿠루는 고독했으나 외롭지는 않았다고,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에겐 언제나 돌아갈 공동체가 있었던 까닭이다. 조화롭고 은밀하고 친밀한 공동체. 하지만 어느 날, 쓰쿠루는 그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 이유도 모른 채,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통보 받는다. 납득할 수 없었으므로 해명의 절차도 무의미했다. 더 이상 쓰쿠루가 돌아갈 곳은 없었다.  


“색채, 혹은 무채색”

쓰쿠루를 제외한 다른 넷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카마쓰(赤) 게이, 오우미(靑) 요시오, 시라네(白) 유즈키, 구로노(黑) 에리. 그들은 서로를 색깔로 불렀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하지만 쓰크루의 이름엔 색깔이 없었고, 그는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쓰쿠루는 쓰쿠루일 뿐이었다.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였다. 네 명의 친구들은 각기 개성이 넘쳤고 빼어난 매력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 아카는 수재였고, 아오는 럭비부 주장이었다. 시로는 모델 같은 외모에 피아노를 잘 쳤고, 구로는 총명하면서도 상큼한 유머 감각이 돋보였다. 쓰쿠루는 성적도 중상 정도였고, 이렇다 할 특징이나 개성이 없었다. 그는 늘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죽음, 혹은 삶”

삶의 원천이었던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대학교 2학년 여름부터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는 죽음을 동경했다. 하지만 죽음을 결행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죽음의 순수성을 담보할 구체적인 수단을 찾지 못해서다. 어느 날, 쓰쿠루는 한 여인을 간절히 갈구하는 꿈을 꾼다. 그녀는 육체와 마음을 분리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쓰쿠루는 그녀의 육체와 마음, 둘 중 하나만 취할 수 있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그때, 쓰쿠루는 처음으로 질투의 마음을 경험한다. 그가 죽음을 강렬히 갈망하던 일을 그만둔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물론 서른여섯의 쓰쿠루는 아직도 그때 죽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지만. 


“순례의 해” 

시로는 친구들 앞에서 종종 프란츠 리스트의 소곡집 <순례의 해>를 연주하곤 했다. 특히 소곡집의 제1년 스위스의 여덟 번 째 곡 <르 말 뒤 페이>를 빼어나게 연주했다. 쓰쿠루가 친구들로부터 추방당한 직후, 그는 두 살 연하의 남자 후배 하이다를 친구로 얻는다. 하이다는 쓰쿠루의 집에서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르 말 뒤 페이>를 쓰쿠루에게 들려 준다. 이때 비로소 그는 시로가 연주한 곡의 이름을 알게 된다. <르 말 뒤 페이>, “전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향수 또는 멜랑콜리.” 

서른여섯의 쓰쿠루에게는 두 살 연상의 사랑스런 여인 기모토 사라가 곁에 있다. 16년 동안 간직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사라에게 들려준다. 가슴 한 켠 묻어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사라는 그 아픔과 슬픔, 원망과 노여움이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출혈하고 있음을 직시한다. 사라는 그에게 순례를 제안한다. 자신이 왜 그들로부터 추방되었는지 묻고자 친구들을 찾아 나서는 순례. 그리고 쓰쿠루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순례의 마지막 여정에서 만난 구로의 집에서, 그들은 다시 <르 말 뒤 페이>를 들으며 시로를 추억한다. 시로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쓰쿠루는 순례를 떠난 직후에야 알게 된다. 시로가 세상을 떠난 시점은 공교롭게도 쓰쿠루 자신이 죽음을 갈구하던 그때, 하이다가 자신의 곁을 지켜준 그즈음의 일이었다. <르 말 뒤 페이>는 시로에게서 하이다로, 쓰쿠루에서 구로로 이어지는 또 다른 순례의 코드로 상징된다. 


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하다


쓰쿠루는 순례를 통해 오래된 혐의를 벗어버린다. 무채색이었던 자신이, 색채 가득한 친구들에겐 선망과 연모의 대상이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쓰쿠루는 기쁘지 않다. 시로의 비극적 죽음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순례의 마지막 시공간엔 ‘슬픔, 향수, 멜랑콜리’가 아프게 난무한다. 작가는 “가슴의 동통이 다시 살아났다. 격렬한 통증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격렬한 통증의 기억이다”라고 부연한다. 애초 쓰쿠루의 순례를 제안하고 북돋았던 사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라고. 결국 쓰쿠루는 순례의 여정을 통해, 숨겨진 생의 슬픔을 복원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격렬한 통증을 각오하는 일이다. 그것을 마주해야 이를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364쪽) 


구로는 쓰쿠루에게 말한다. 우린 살아남았다고, 살아남은 이들에겐 책무가 있으니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반드시 사라를 붙잡으라고 당부한다. 서른여섯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쓰쿠루가 밤잠 설치며 프러포즈의 날을 헤아린다. 

슬픔, 향수, 멜랑콜리에 새벽을 앓은 적이 있다면, 쓰쿠루처럼, 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_덧붙이는 말, 


1. 간혹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과도한 선인세를 비롯한 상업성 논쟁, 다소 편향적인 문학성 논쟁에 소모되거나 폄하되기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너무 아깝다. 그것은 본질이라기보단 하루키의 작품이 놓여있는 자리, 우리 출판계의 정황에 가깝다. 


2. 주어진 텍스트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평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문학의 경우, 비기독교적 요소가 다소 있더라도 서사적 맥락에서 그 가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참고로 이 책과 맞닿아 있는 기독교 책을 추천하자면, 댄 알렌더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IVP, 2006)를 우선 소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