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복음과상황_

꽃처럼 붉은 울음, 꽃보다 아름다운 시 (복음과상황, 140110)

Soli_ 2014. 2. 7. 19:53



꽃처럼 붉은 울음, 꽃보다 아름다운 시

≪꽃보다 붉은 울음≫(김성리 지음│알렙 펴냄│2013년 11월)





작가 존 버거는 시와 소설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 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 준다.”(≪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29쪽) 


소설이 어떤 서사의 전모라면, 시는 그 서사 속에 갇힌 ‘부상당한 이’의 독백이다. 시는 역설의 언어이기에 평화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시에서 치유의 희망을 가늠하기도 한다. ≪꽃보다 붉은 울음≫의 저자 김성리는 간호사로 일하다가 뒤늦게 문학을 공부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품기 시작했다. 몸을 치유하는 의학과 마음을 치유하는 문학의 융합이었다. 치료가 진단을 통해 처방을 하고 의학 기술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라면, 치유란 상처받은 내면을 돌보고 안아줌으로써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고통을 직면하고 마음을 드러내는 언어로서 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는 이를 “치유시학”이라 명명하고 한국연구재단의 학술 지원을 받아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다. 

시를 쓰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읽거나 쓰는 행위에서 현재 나의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가 자기만의 치유 의례가 되는 것이다.
(9쪽)

치유시학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저자는 그 가능성에 확신을 얻고자 한센인들의 집단촌을 수차례 찾아갔다. 무심의 경계에서 그는 그저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외부인이라고 자조할 즈음, 한 할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의 이름은 세 가지였다. 호적에는 이말란, 공공요금 청구서에는 이숙자, 첫사랑의 연인이었던 마쓰시타에게는 요시코로 불렸다. 저자는 그로부터 7개월간 매주 2시간씩 한 이불 밑에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가 구술하는 시를 받아 적었다. 아득한 고통의 세월에 대한 기록이었다. 

 




경상도 방언에 ‘문디’라는 단어가 있다. 서정주 시인은 ‘문디’를 “달 뜨면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해와 하늘 빛이 서러운” 존재로 묘사했다. 그것은 흔한 저주의 욕설이기도 했지만, 몰락하는 인생의 두렵던 메타포이기도 했다. 울산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할머니가 그랬다. 체육시간을 제일 좋아하던 건강하고 명랑했던 소녀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 사랑에 빠졌다. 일본 순사 부장의 아들이었다. 처녀의 임신이었고 일본 사람의 아이였으니 소녀는 위태로웠으나, 가장 뜨겁고 충만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한센병이 소녀를 급습했다. 다리의 피부색이 변하고 얼굴과 손이 부었지만, 처음 겪는 임신의 증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내 한센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소녀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부모 혹은 신을 향한 가장 강렬한 저항일 것이다.
 


하나님도 원망하고 싶고

내 자신도 미워

차라리 이 땅 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할머니의 자작시 <내 인생길> 중에서, 38쪽)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는 마을에서 쫓겨나 산속에 움막을 지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가 우물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나는 벌레도 아인기라.”라고 할머니는 한탄했다. 뜨거운 여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산모가 몸을 추스릴 경황도 없이 병은 더욱 맹렬히 육박해왔다. 어머니는 종일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한센병에 좋다는 느삼태를 구하려 다녔다. 느삼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통곡했다. 할머니는 그 후로 60년간 그 통곡 소리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 불효 여식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이것 무엇 보시고

당신께서는 그 높은 사랑

사랑으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십니까.


(할머니의 자작시 <어머니> 중에서, 48쪽)


할머니의 삶은 끊임없이 추락했다. 첫째 아이는 일본으로 입양 보낸 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웃으로부터 배척 받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 운명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쫓아냈다. 그들의 죄명은 “문둥이”였다. 첫사랑의 연인을 평생 연모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남자의 아내로 평생 살아야 했다. 결혼 후 낳은 딸은 한센병 부모의 딸로는 키울 수 없어 입양보냈고, 대신 마을에 홀로 들어온 아이를 입적하여 딸로 키웠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짐작하기 힘든 얼굴,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 몽탕해진 손과 발은, 그 모진 세월에 비하면 사사로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마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정경이었다.”
(150쪽) 

‘이말란’이란 이름으로 사는 할머니는, ‘이숙자’라는 어린 시절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감추었으나 ‘요시코’라는 이름은 유독 사랑했다. 저자가 시를 통해 할머니의 온전한 삶을 복원하려 하였을 때, ‘요시코’란 이름이 하나의 열쇳말이었을 것이다.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전부를 바친 임’이다.”(104쪽)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여인으로 존재했던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은 지금도 여전히 가슴 뛰는 흥분을 선사했다. ‘할머니도 여자’라는 너무도 평범하여 더욱 슬픈 사실의 발견이었다. 평생 닿을 수 없는 희망이었으나 할머니는 그 시절의 사랑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떤 행복은 통곡의 슬픔 언저리에서 자란다. 

시는 치유로 가는 문


시인 서정주는 <문둥이>라는 시에서 “문둥이는 서러워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고 썼다. 저자 김성리는 “꽃처럼 붉은 울음”으로 고통스러웠던 할머니의 애달픈 생애를 기록하지만, 결국 이 책에는 “꽃보다 붉은 울음”이란 보다 진전된 제목을 붙인다. 유복했던 유년, 충만했던 소녀 시절의 과거와 화해하려는, 그리고 사람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을 희망하던 할머니의 울음은, 꽃보다 붉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소천하였으나, 실로 할머니가 남긴 열한 편의 시는 꽃보다 아름답다.  


저자는 “실제로 치유는 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덤으로 알았다. 시는 치유로 가는 문이라는 걸 알았다”
(248쪽)고 말한다. 또한 이말란 할머니 외에 치유시학을 시도했던 다른 사례는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그 실패를 성찰하며 저자는 “실패의 경험은 시 치유 외의 다른 인문학적 치유가 필요함을 알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12쪽)라고도 기록하였다. 


꼭 시가 아닐 수도 있겠다. 문학이 할 수 없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마음이 하는 것’이란 믿음이겠다. 그 믿음은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쉬이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독선과 자만의 포기에서 비롯될 것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연민은 충분하지 않다고 거듭 말한다. 그런 까닭에 할머니와 저자의 우정은 우리에게 하나의 ‘시’가 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