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113

아이의 희망과 나의 슬픔

아빠,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밤새 예지의 섣부른 다짐이 아른거렸다. 어른이 되고픈 저 아이는, 어른이 된 세상에서는 더욱 자유로울 것이라고, 지금의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닐 만큼 단단해질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망설이다 그냥 웃고 말았다. 웃고는 있으나 짐짓 미안하고 슬펐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섣부른 것은 저 아이의 다짐이 아니라 나의 슬픔이 아닐까란 생각에 다다를 즈음, 아침을 맞이하였다. 오염되지 않은 바람이 나를 오래 기다려 맞이한 아침, 아득한 시선 넘어 저 바람의 나라엔 굳센 순수의 아이만이 살아남는다는 오랜 전설이 기억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나도 저 아이처럼 이 세상을 좀더 굳세게 살아야겠다고, 순수의 시절에 꿈꿨던 어른으로 도약하고 싶다고 ..

霓至園_/rainbow_ 2015.06.02

예지의 첫 번째 이메일

아홉 살 예지가 아빠에게 메일을 썼다.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주었는데, 제대로 된 첫 번째 메일을 아빠에게 보낸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을 거의 금지하고 있는 까닭에, 다른 아이들보다 한참 느리다. 여섯 줄 메일을 쓰는데 더듬더듬 독수리 타법으로 거의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느린 걸음에 더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누리고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를 갈지 물으며 "두근두근 아빠의 선택은?"하고 덧붙이는 센스도 감동이고, 집안의 권력 서열을 제대로 숙지하고 '모르면 엄마한테 물어보고 알려 달라'는 그 눈치도 감동이고, "아빠 사랑해!"로 맺는 그 마음도 감동이다. 이제, 답장을 써야겠다. 고맙다, 딸.

霓至園_/rainbow_ 2015.04.07

Y에게

Y에게, 무의식은 내 안에 깃든 타자의 흔적이고 타자를 향한 사랑을(또는 그 사랑이 유실된 흔적을) 탐구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본령이라면, 가장 치열했던 사랑의 슬픔이 오히려 가장 무심하고도 심상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우리의 삶이 아닐까 생각하는 시간이었지, 내게는. 그리고, 그렇다면, 과연 무의식을 탐사하여 그것에 닿는 것은 가능할까, 다시 말해, 타자에게, 그 열렬한 사랑에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닿을 수 있을까 묻고 의심하는 시간이었지. 확신이나 불신의 확정적 단정이 아니라는 점에서 만족해. 밤새 비바람이 창을 때리고 창밖에 번개에 번쩍했는데,예지가 무서워서 잠을 못자더라. 그래서 옆에 누워 소리와 빛의 간극을 헤아리기 시작했어. 번개가 치고, 하나, 둘, 셋...일곱, 우르르쾅쾅. 번개가 치고, 하나,..

窓_ 2015.04.03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숱한 연민을 까만 눈동자로 앓는 사람입니다. 섣부른 말로 단정 짓지 않으며 가만히 타자의 슬픔을, 때론 무심한 척하는 얼굴의 미세한 요동을 응시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다가설 용기는 없지만, 굳센 사랑에는 무모한 결행을 감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참해질 때도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헤어짐의 윤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관계에 대한 경우의 수를 셈하는 이와는 우정을 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정을 맺은 벗에게는 경우의 수를 헤아려 그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우연'을 '섭리'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테레자'처럼 책을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밀란 쿤데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지만, 끝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건짓고 이유를 동반한다..

視線_ 2015.03.15

마음까지 담아내는 사진

저 때 아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하게 하는 사진들이다. 우리와 잠시 떨어진 아이들을 돌보던 분들이 찍어주신 사진들이다. 어떤 사진은 우리의 가슴이 무엇인가를 더 헤아리게 한다. 저 사진을 찍는 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고. 아이들의 행복을 담아내는 그 곡진한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마음마저 살며시 웃음 짓게 되는 것이다.

霓至園_/rainbow_ 201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