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_ 87

주일, 남자의 자리

아침부터 몸은 곤했고, 마음은 불편했다. 교회 갈 준비하느라 부산한 아내에게 괜한 트집을 잡으며 투덜거렸다. 교회가 뭘까. 무너진 관계와 마음들은 애써 무시한채, 신학적 담론만 제시하고, 헌신만 요구하면 될까. 온갖 위선은 우리 안에 난무하지만, 그냥 모른척 넘어가면 되는 걸까. 그리고 남자의 자리는 도대체 있는걸까. 남자의 각성을 농담반 진담반 요구하는 한 집사님에게 기꺼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후 늦게 한숨 자고 나서야, 저녁이 되어서야 마음이 좀 풀렸다. 소란스런 아이들의 소리가 다시 정겨웠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세심히 남편의 마음을 살피는 아내의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어서 가서 일하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꿋꿋이 설겆이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집을 나섰지만, 그 죄책감은 여전하다. 아..

窓_ 2012.07.29

충남 IVF 가는 길

최근 좀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팀원 하나가 그만 두었고, 그이의 업무를 대신 감당해야 했고(그만 둔 그는 입사한지 두 달 밖에 안됐다. 그리고 그 자린, 여름시즌이 가장 바쁘다), 그를 대신할 한 명을 뽑았고, 그에게 업무를 인계해주고 있다. 한 주간 꼬박 행사 다녀오면 일은 잔뜩 밀려있고, 다음주부턴 다시 두 주간 행사를 지방에서 치루어야 한다. 물론 기존 내 업무도 소화해야 한다. 거기다 다음 주 월요일엔 상반기 결산을 해야 한단다. 요즘처럼 일이 많았던 적이 없었다. 아내가 회사에 잔뜩 화가 나있다. 집에 가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미안할 뿐. 두 주전, 강의 청탁이 왔는데, 잠시 머뭇했다. 충남은 지난 겨울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인데, 거절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럴 수 없더라..

窓_ 2012.07.25

이삭 언니

예지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다. 엄마, 아빠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였고, 어딜 가도, 누구에게도 쉽게 다가서지 않았다. 그런 예지가 너머서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서가 태어나기 전, 예지가 네살 즈음 너머서교회에 처음 왔을 때, 교회 어른들과 언니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래도 예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단, 이삭이 언니한테만은 예외였다. 이삭이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좀 남다른 아이였다. 키가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컸고, 이삭이의 생각과 마음은 그보다도 더 크고, 넓고, 깊었다. 예지는 이삭이를 너무 잘 따랐고, 그 다음엔 안해용 목사님과 이명희 집사님(사모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목사님과 집사님은 이삭이의 부모님이자, 예지의 첫 번째 멘토이셨다(그분들도 ..

窓_ 2012.06.09

여행

일요일부터 다음주 토요일까진 계속 여행이다.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연이어 동료들과 함께 울릉도를 간다. 가족과 함께는, 오랫만이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 우린 조금씩 더 아껴쓰나, 그럼에도 조금씩 더 가난해진다. 이번에도 카메라와 렌즈 등을 처분하여 간신히 여행비를 마련해서 떠난다. 그리고 덕분에 야근도 해야 한다. 여행 가기 전부터 몸살기가 조금씩 돋는다. 제주도에서, 울릉도에서 기대하는 바들이 있다. 마음을 위로하여 잔잔케하되, 오래되어 무뎌진 간절함을 되찾아왔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것에 용기를 내어, 속사람과 사랑하는 가족 앞에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기도한다.

窓_ 2012.05.10

Workholic & Integrity

일을 제법 열심히 한다(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의 과정과 결과를 추구했다. 동료와 발걸음을 맞추기보단, 그와 일할 때의 여러 가지 경우의 수까지 고려하여 일하는 것이 편했다. 업무 규정이나, 정해진 룰에 따라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늘 스스로가 만족스러워야 했다. 완벽주의와 약간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새벽이나 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이건 집이건, 언제나 일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일을 하다보면, 동료에 대해 불만을 가질 때가 제법 있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서, 약속을 쉽게 어겨서, 나처럼 일하지 않아서. 주로 그런 이유에서다. 1분기 결산 끝나고, 거의 한 달은 쉬엄쉬엄 일했..

窓_ 2012.05.02

양미를 보내며

양미의 송별회 때 제가 송사를 맡았습니다. 그때 썼던 편지입니다. 전 직장의 동료였던 양미는 그곳에서 15년을 넘게 일했습니다. 입사했을 땐 저의 팀장이었고, 제가 그녀의 팀장이었을 땐 저를 가장 가까이서 돕는 동료가 되었지요. 부서원이 늘어날 때마다 부서의 쓴소리는 늘 그녀의 몫이었고, 덕분에 전 '마음 좋은 부서장' 역할만 하면 되었지요. 그러면서도 유독 그녀에겐 싫은 소리를 제법 해야했던 시간들을 아프게 기억합니다. 그녀의 꿈은 그곳에서 정년 퇴직하는 것이었죠. 편지를 쓰며,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슬픔과 자책이 사무쳤습니다. 그리고 저도 곧 그곳을 떠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요.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저도 떠났습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요. 만나 봐야겠어요. 2013/01/07 ..

窓_ 2012.04.13

더디게 간다

더디게 간다 서둘러 떠나 숨가쁜 걸음 끝에 도착했지만 정작 내 시선에 남은 것이 없어 허망할 때가 있다. 느릿느릿, 숨을 고르며 걷는 길에, 수많은 풍경이 담긴다. 사람들의 웃는 모습도 수백 개다. 목소리는 수천 개다. 골목길 모퉁이 조그만 채소 가게 아저씨의 표정도 날마다 조금씩 다르다. 아이는 날마다 조금씩 자라는 것이다. 기억하는 만큼, 딱 그 만큼만 나의 세계다. 가슴에 남은 풍경만 추억이 된다. 수백 개의 표정과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들만 나의 사람이 된다. 때로 우리 인생엔 느린 걸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오늘도 쉽게 다다를 곳을, 더디게 간다.

窓_ 2012.01.31

김병년 목사님께

김병년 목사님께, 이번 학기에는 유난히 캠퍼스 강의 일정이 많이 잡혀 있어서 거의 매주일, 한번 또는 두 번 정도 캠퍼스를 방문합니다. 대부분 IVF 아이들이지만 가끔 CCC나 JDM의 청년들도 있습니다. 주제는 책읽기이지만, 강의는 늘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하여 공동체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늘 제 자신에 대한 처연한 고백이 빠질 수없습니다. 소망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마음의 깊은 슬픔을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강의를 하고, 청년들을 만나고 나면 마음 한 구석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는 합니다. 한편 제가 파악하는 요즘 청년들의 특징은, 소망이 없거나, 당위적인 소망은 주어져있지만 그것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없는, 기다림 없는 세대가 아닐까 합니다. 온갖 즐..

窓_ 2009.04.27

희진과 은정에게 _ 혁신과 자기 관리에 대해

혁신에 관한 드러커의 네가지 질문 1. 당신은 혁신을 추진하기 위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무엇을 폐기해야만 하는가? 2. 당신은 기회를 체계적으로 탐색하고 있는가? 3. 당신은 아이디어를 실천적인 해결책으로 전환하기 위해 규율이 잡힌 프로세스(disciplined process)를 사용하고 있는가? 4. 당신의 혁신 전략은 당신의 기업 전략과 잘 부합하고 있는가? 에더샤임, , 109페이지. 물론 이 질문들은 어떤 조직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만,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유효하리라 여겨진다. 특히 1번의 질문이 상당히 중요한데, 변혁을 위한 폐기 항목을 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것은 나의 습관, 관념, 선입견과 편견, 독선과 아집, 과거의 ..

窓_ 2009.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