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복음과상황_

다시, 책의 희망을 묻다(‘연재’의 맺음말, 혹은 ‘그럼에도 책 읽기’의 서문)

Soli_ 2014. 10. 29. 08:46

"복음과상황"에 2013년 2월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모두 20편의 서평을 통해 28권의 책을 소개했습니다. 중간에 바쁘다는 핑계로 두 달에 한 번 연재로 바꾼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였고, 글을 쓸 마음의 여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지요(바쁘다는 것과 삶의 여백이 없다는 것의 상관관계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연재를 그만두어야 하는 때를 생각했고, 결국 11월호가 마지막 연재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고정 연재하던 매체는 이제 없네요.  


이 글은 몇몇 곳에서 했던 강의 제목이기도 했고, 모 출판사에서 제안받았던 책의 서문으로 썼던 것입니다. 원고지 50매 정도가 되는 글을 1/3로 줄인 것이지요. 그래서 부제가 "'연재'의 맺음말, 혹은 '그럼에도 책 읽기'의 서문"입니다. 그간 귀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복음과상황"에 감사드립니다.



복음과상황(2014년 11월호)_“독서선집”


 

 다시, 책의 희망을 묻다

‘연재’의 맺음말, 혹은 ‘그럼에도 책 읽기’의 서문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종이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다국적 기업들은 싼 값으로 종이생산을 하기 위해 천연림을 정복하여 나무 농장을 만들었다. 그 결과 2초마다 축구장만한 면적의 원시림이 사라져 현재 세계 원시림의 5분의 1만 남아있을 뿐이다. 산업용으로 희생된 나무의 42퍼센트가 종이를 생산하고, 그중 3분의 2는 펄프를 위해 희생당한다. 세계 출판업계의 95퍼센트가 천연펄프 종이를 사용한다(1999년 월드워치 보고서 기준)


책은 무고한 나무들의 숱한 희생을 담보로 탄생하는 물질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희생당했을까. 책이라는 물질 위에 탄생한 사유(思惟)는, 과연 그로 인해 희생당한 뭇 생명들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을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나에게 책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아브라함 요수아 혜셀은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정념)가 예언자들에게 전이될 때, 목숨을 담보한 한 긍휼,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사랑, 애끓는 기다림, 폭풍 같은 분노 등의 다양한 정서적 양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파토스를 마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때로 진실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정의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미분하여 적실한 해석을 찾아내는 자리였으며, 책 읽기는 당위 이전에 하나의 일탈이었으므로 그것은 또한 은혜가 너울거리는 시간이었다.  


적어도 나는, 거의 20년 가까이 다녔던 학교보다 책을 통해 배운 것이 훨씬 많았다(학교는 책을 읽기에 가장 최적화된 공간이었으므로, 이 말은 모순이기도 하지만).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은 등록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들의 이름은 교실 게시판에 붙었고, 그들은 방과 후 청소를 했다. 처음엔 스무 명 가까이, 나중에 두세 명이 남을 때까지 그렇게 해야 했다. 나는 언제나 그들 중에 있었고 청춘을 비극적 인생의 오마주처럼 여겼으나 좌절하지 아니한 것은, 나의 골방에 놓인 몇 권의 책들 때문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우리 집은 점점 가난해졌다. 아버지의 유품 중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지금 유행하는 세계문학전집과는 질과 양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고 모자랐지만, 당시 나에겐 지난한 현실을 견뎌내는 거의 유일한 놀이 공간이었다. 책을 읽으면 상처받은 자존심은 위로를 받거나, 혹은 그것을 잊게 했다. 좋은 이야기는 현실을 딛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판타지가 되었다. 마음껏 일탈하던, 어린 시절 나의 골방은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광주,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이었다. 나는 책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 책의 사람들'의 위선과 독선


스무 살 즈음, 함석헌과 김교신, 리영희 선생의 책을 읽었다. 군대에선 신경숙의 <외딴방>을 노트에 옮겨 적었고, 언젠가는 불온서적이었던 <전태일 평전>을 읽다 걸려서 완전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수없이 돌아야 했다. 교회를, 심지어 신학대학을 다녔다. 숱한 신학서적을 읽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프란시스 쉐퍼 전집을 차례대로 독파했고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부질없는 일이었다. 


기독교는 흔히 책의 종교로 호명된다. 성서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유일한 가치로 여겼다. 하여 그리스도인은 ‘그 책의 사람’이어야 마땅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눈부신 행복을 누렸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그랬다. 깊고 치열해야 닿을 수 있는 학문이었다. 학부 졸업반 시절부터 대학원 1학년 때까지 교회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숱한 상처에 넘어지기 시작한 나날들 말이다. 


‘그 책의 사람들’은 위선적이고 독선적이었다. 목회는 그저 처세와 정치일 때가 많았고, 신학은 그 명분으로 차용될 때가 많았다. 전도사로 일하던 2002년 6월, “효순-미선이 사건”이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그 아이들이 훈련 중이던 미군 제2사단 공병 대대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무참히 ‘압사(壓死)’당한  사건이다. 미군은 그들의 확실한 죽음을 위해 후진하여 다시 ‘압살(壓殺)’의 절차를 밟았다. 범죄자들은 한국 검찰의 소환도 받지 않고 무죄로 풀려났으며,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하던 성난 군중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나도 몇몇 청년들과 광장을 향했고, 설교를 빌어 동참을 호소했다. 교회에서 엄중 경고를 받았고 무력감을 견뎌야 했다. 당시 교회들은 2002년 월드컵 응원을 위해 예배당을 기꺼이 개방하였으나, 이 사건에 대해선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결국 난 신학을 그만 하기로,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그리고 출판사에 입사하였다. 서른한 살 때였다.  


깊은 슬픔만이 희망에 닿을 수 있으므로


책을 소개하고 만들던 나의 삼십대는 고요했으나 뜨겁던 시절이었다. 희망과 슬픔의 책들 사이에서 환호했으나, 텍스트의 본위를 잃고 독선과 오만에 휩싸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청춘은 사위어 갔고 “울음이 목울대까지 차올랐지만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이동하, <장난감 도시>). 책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만들던 사람들의 위선은 더욱 교묘했고 공고했다. 분노로 시작했으나 절망으로 마무리 되었던 것은, 그것이 결국 나의 위선이었고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십년을 꼬박 일했던 출판사를 나오고 거리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또 다른 출판사에 들어가 밥벌이를 한다. 비극이었고, 다시 비극을 산다. 



책은 과연 유효한가, 라는 질문 앞에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변절한 시인의 오랜 텍스트가 여전히 눈부신 슬픔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비극을 살지만 그렇다고 파국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고 고백했던 시인의 텍스트를 온몸으로 부여잡고 깊은 슬픔으로 답하는 것이다. 깊은 슬픔만이 텍스트의 본령에 다다를 것, 그리하여, 오직 그것을 신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