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2008년 5월호)_책 읽어주는 남자
슬픔의 사람이 말하는 그리움, 사랑, 꿈 이야기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노사과연, 2008)
몇 번씩이나 호흡을 멈추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거친 분노, 그러나 그마저도 품고 보듬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나의 일상적 게으름 내지는 관성과 타성에 젖어가던 무미건조한 가슴을 아프게 만들기도 하고 너무 아파 주저앉을 즈음이면 다시 아득한 위로를 주는 책들이 있다. 내게 있어, 서준식의 책이 그러하다.
닫힌 공간은 존재로 하여금 짙은 외로움에 깊은 좌절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단절의 고통은 존재로 하여금 또 다른 존재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존재들은 닫힌 공간에서 되려, 더 ‘착한 존재’가 되어 타인과 세상을 향한 더욱 처연한 사랑을 한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무언인가를 이루어놓은 것, 세상의 온갖 악이나 어리석음과 타협하지 않고 강직하게 살아가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분노할 줄 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그 얼마나 중요한 일들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끝끝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소망에 더하여 나에게는 요즘 또 한가지 작은 소망이 생겼다. 좀더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572-573페이지)
서준식은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대학 시절 1970년 형 서승과 함께 북한을 다녀왔고, 이듬에 이 일로 인하여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7년, 자격 정지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징역형을 꼬박 살아낸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갇혀있었다. 사상 전향을 거부한 까닭에, 사회안전법상의 피 보안 감호자로 10년을 더 갇혀있어야 했던 것이다.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은 그때 쓰여진 17년간의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수인(囚人) 서준식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내는 양심의 문제였다(“저의 지상 목표는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16페이지). 타협할 줄 모르는 공산주의자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국가가 간섭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수인(囚人)이 되어, 지인들에게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약자에 대한 연민에 대하여,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적어 내려가고 있다.
"17년 동안, 나는 음산한 독방에서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세상에 위조지폐처럼 유통하는 통념에 말려들지 말라고, 유행을 따르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 달라고, 고난을 정면으로 돌파해 달라고, 그 고난을 피해가기 위해 실리주의를 택하지 말아 달라고, 부도덕한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의 위치에 두어 달라고, 지겹도록, 정말 신물나게 되풀이 당부했다. 일상에 갇히지 말고 꿈을 품어 달라고, 현실을 열심히 살되 착한 마음으로 살아 달라고, 독서하되 착한 마음으로 해 달라고, 겉으로 드러난 표피에 속지 말고 깊은 곳에 놓인 허위를 꿰뚫어 봐 달라고, 역사를 공부해 달라고, 그 도도히 흐르는 역사 앞에서 겸허해 달라고… 그것은 요컨대 사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너희는 언제나 아웃사이더로 남아 달라는 메시지였다"(2002년판 머리말)
이번에 새로운 개정판이 다시 나왔다. 이번이 두 번째 구입이고 세 번째 만남이다. 처음에는 이십 대 내내 품었던 소망(또는 야망?)을 내려놓고 허망해하며 방황하던 시절 존경하던 은사님에게서 선물 받아 읽었으며(그리고 선물 받았던 그 책은 나와 비슷한 방황을 답습하던 후배에게 주었다), 두 번째는 절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서교동에 있던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절판본을 구입했다. 절판되었던 이 책이 올해 다시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추호의 갈등 없이 또 다시 구입했다. 물론 이전에 실리지 않았다던 15통의 편지와 80여개에 이르는 주(註)가 새롭게 실렸다는 것도 감안했다.
이번 개정판은 900페이지가 훨씬 넘는다. 쉽게 읽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수인(囚人)이 온갖 검열을 피해 써 내려간 글에 담긴 고립과 단절의 고통에의 극복, 그리고 그리움, 사랑, 꿈들로 가득 채워져 전혀 아낌이 없는, 벅찬 기쁨을 안겨주는, 가까이 두고 꼭 읽어야 하는 고마운 책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나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이루지 못할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진 사회 속에서 그 사회에 먹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저항해야 하는 슬픔을 가지고 나는 살아왔다. 이 슬픔은 옥중서한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라이트 모티프'이다.”(2002년판 머리말)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란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도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도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란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569페이지)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서준식, <서준식의 생각>(야간비행, 2003)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대담>(돌베개, 2007)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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