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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삶> 출간 기념 북토크 후기

Soli_ 2013. 12. 18. 01:46

<관능적인 삶> 서평은 여기에 있습니다_ http://soli0211.tistory.com/486




<관능적인 삶> 출간 기념 북토크 후기

2013년 12월 17일 스폰지하우스_

 

 

 

1. 진행자 김두식 교수는 처음부터 살짝 소외되었다. 이서희 작가와 민규동 감독의 은밀한 우정 때문이다. 이서희 작가는 민규동 감독의 이름을 풀이하며, 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멋졌다. 김두식 교수는 살짝 소외되었으나, 그 소외를 즐겼을 것이다. 어떤 기쁨은 자신의 소외됨을 기꺼이 허락한다.

 

2. 김두식 교수와 이서희 작가는 ‘페친’이란다. 김두식 교수는 그를 둘러싼 '페이스북 현상’에 주목하였고, 강렬한 매혹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흔쾌히 진행 요청을 받아들였단다. 이서희 작가의 북토크 진행을 한다고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40년 중년의 남성들로 그득할 거라고 하여 걱정하였단다. 그런데, 놀랍게도(물론 시커먼 남성분들도 제법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젊은 여성들이 참여하였다. 난, 그것이 기뻤다. 사실, <관능적인 삶>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이들은 여성일 것이다. 이 책의 위로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합당한 것이다.

 

3.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물었다. 자신 안에 있는 상처 때문이었다. 이서희 작가에게 관능은, 상처를 직면하고 그것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부모의 땅을 떠나 프랑스에서 갖게 된 '작은방'은 오롯이 그의 존재로 그득 채우는 최초의 경험이었고 충만한 행복의 공간이었다. 부유하는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돌아갈 '집'을 배제한 그의 모험은 맹렬하나 고독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집'에 정착했다. 일탈은 끝난 것일까. 아이를 키우며 다시 오랜 상처는 아파오기 시작했고 그는 다시 직면해야 했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보았고 그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관능적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4. 민규동 감독은 이서희 작가의 글쓰기를 계속 북돋았다고 한다. ‘너의 연애적 본능'을 글로 마음껏 표현하라고 했단다. 똑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비슷한 지식을 소유하더라도, 어떤 이들의 문장은 다른 빛깔로 생동한다. 이서희의 글은 다를 것이라고 믿었단다. 그리고 마침내 이서희의 글쓰기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곁에서 격려와 위로뿐만 아니라 때로는 강력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단다. 그의 글이 독자를 의식하여 수위를 조절하여 타협하는 것이 싫었단다. 이서희이니까, 그만이 할 수 있는 글쓰기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5. 민규동 감독은 계속해서 이서희 작가의 향후 행보를 주목한다고 했다. 이렇게 당부했다. 작가로서의 자기 검열에 잘 대처했으면 좋겠다고. 난, 그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이서희 작가의 관능이 독자를 고려하여 그 수위를 타협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계속하여 노골적인 서사를 이어가라고. 나도 같은 마음이다.

 

6. 민규동 감독은 언제나 내일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음을 깨달았다. 죽을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언젠가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할 수 없었다. 우린 좀더 농밀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불필요한 아픔에 매이지 말고 더욱 소중한 삶을 욕망해야 한다.

 

7. 관능은 섹슈얼리티로 발휘될 수 있지만, 섹슈얼리티 자체가 관능은 아니다.

 

8. 이서희 작가는 여성의 삶을 성찰했고 도전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요받는 제한적인 삶, 모성이라는 또 다른 금기를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연애만이 관능적 삶의 전부가 아니다. 관능적 삶은 여러 삶의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9. 도주한 땅 프랑스에서 이서희 작가는 ‘관능적이다’란 소리를 처음 들었다. 낯선 시선이었지만,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충분히 누리려고 했다. 한편, 그는 연애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했다. 연인에게 최선을 다해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충만한 행복을 누렸으며 마지막에는 제대로 정리하였다.

 

10. 성녀와 창녀 프레임은 남성의 자유도 옭아맨다.

 

11. 이서희 작가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와 순결주의자 어머니를 극복해야 했지만, '부모 때문에’란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몫이 더욱 크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아셔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부모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나쁜 아빠가 나쁜 할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한다고 한다. 실제 그의 아이들에게는 너무 좋은 할아버지란다.

 

12. 이서희 작가는 모국어로 글을 쓴다. 모국어를 모르는 아이들이 모국어로 엄마를 읽었으면 좋겠단다. 그들은 언젠가 모국어로 읽는 엄마라는 세계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상상에 살짝 웃음이 터졌다. 

 

13. 관능은 삶을 확장시킨다. 가족이란 경계를 넘어 타자까지 보듬는 삶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삶이 확장되면 사람도 커진다. 그러면 상처는 그만큼 작아진다. 감동적인 통찰이다[각주:1]

 

14. 그는 비록 미용실에서 '눈썹을 날려 버렸지만’, 사진보다 훨씬 나았다. 그의 목소리는 나의 상상보다 조금 더 매력적이더라. 관능이 존재의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순수(純粹)야말로 관능의 절정이 아닐까. 오늘 만난 그가 그러했다.





  1. 이 통찰은 이서희 작가의 선배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이를 바로 잡는 작가의 마음이 예쁘다. 우리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누군가에게 빚진 것일 게다. 그러나 그것을 공적 언어로 발화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아, '감동적인 통찰'이란 평가는 김두식 교수가 한 것이다. 물론, 나도 공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