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_/책_

2013년 나의 책 나의 저자

Soli_ 2013. 12. 31. 10:06

2013 나의 책 나의 저자

 

 

 

내가 읽은 것은 빙산의 일각이며 그 편향성은 지극한 까닭에 선정 기준은 대단히 불공정하다. 나날이 '좋은 책'에 대한 확신은 무너지고 있기에 더욱 신뢰할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 '나의 책'들을 헤아려 본다. 그 텍스트의 자리에 나의 삶이 있었고 아직 이루지 못한 나의 사유가 있었으므로, 진심을 담아 최선의 찬사를 보낸다. 나의 책들에게.

 

 

(2012년 12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출간된 책 중 인문사회, 문학 분야는 각 10권씩의 책을기독교 분야는 7권의 책을 뽑았습니다. 출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요약

 

인문사회 분야 10권의 책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그대, 강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을린 예술

사랑은 왜 아픈가

거대한 사기극

사회문제의 경제학

다시 태어나다

다른 길이 있다


 문학 분야 10권의 책


체르노빌의 봄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눈 먼 올빼미, 눈 먼 부엉이

밤이 선생이다

창작에 대하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야만적인 앨리스 씨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관능적인 삶 


기독교 분야 7권의 책


당신들의 기독교

회심의 변질

박삼종의 교회생각

산둥 수용소

성서의 에로티시즘

옥중연서

C. S. Lewis


2013년, 나의 저자

황현산

서천석

C. S. 루이스 






 

인문사회 10권의 책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안희경 지음│오마이북 펴냄│2013 1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01



인터뷰어 안희경은 한국인의 지평에서 민주주의, 정치, 사회, 교육, 환경생태, 페미니즘 문제를 질문하고인터뷰이였던 세계의 석학들은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자본의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서 공동선(共同善)의 가치를 지켜내자고 답한다. 그리고 그 두 지평(인터뷰와 인터뷰이)이 만나는 지점에, '하나의 생각'이 온갖 난해한 절망을 딛고 다시금 희망을 추동한다.

 

2013년 첫 번째로 읽었던 책이며, 2013년을 가득 채운 책이다. 이 책을 읽던 겨울은 대선에서 내가 지지했던 진영이 패배한 절망감과 더불어, 10년 일했던 직장을 떠난 직후의 회의감에 몹시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희망의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세계의 석학들은, 정치적 역학구도 따위로 희망의 가능성을 가늠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의 민중들, 그들의 결기 어린 희망, 그 거대한 흐름에 주목하되, 그 시작은 나의 삶의 영역에서, 나란 존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다나 시바는 온 세상이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임을 강조하였다. 온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면, 결국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로버트 서먼은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라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거듭 역설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같은 것을 바란다는 그 본심을 이해하려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생기는 현실의 원인을 진단하며 연대를 확대해야 한다. 세계의 석학들은 생존 가능한 사회, 억압 없는 사회를 만드는 답을 한국인이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12쪽) 

 



 


≪그대, 강정≫

43인의 작가, 7인의 사진가 지음│북멘토 펴냄│2013 4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19

 


작가는 무릇 시대를 앓는 사람이다. 숱한 연민은 애끓는 고통으로 자승자박하여 마침내 숭고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그렇게 잉태된 문학은 시대의 슬픔을 치유하며, 작가의 영민한 시선은 폐허의 참상을 극복할 희망을 탐색하고 선동한다.

 

이 책의 인세와 출판사 수익금 일부는 ‘제주 팸플릿 작가’의 팸플릿 제작비와 강정 평화활동에 쓰인다고 한다. 이 책은 기적을 향한 희망의 연대, 그 시작일 뿐이다. 작가들은 평화책마을로 해군기지를 에워싸고,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용기를 보듬으며, 그들의 번뜩이는 문장은 나 같이 먼 곳에서 그저 마음 조리며 강정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북돋울 것이다. 책의 갈피마다 자리 잡은 사진작가들의 작품은 강정과 구럼비,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얼굴을 가식 없이 담아낸다. 그들과 수줍게 눈 맞추며, 나의 마음은 어찌할지 모를 난처함으로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만다. 연애의 감성이 가슴속에서 출렁인다. 큰일이다.

 

당신, 무사한가요. 저는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봄이 이제 막 도착하는 그곳에서 구럼비 검은 바위들과 함께 우뚝우뚝 힘을 내고 있을 당신께 언제까지고 무사한가요, 물을 겁니다. 당신과 내가 무사할 날을 위해서. 무사히 돌찔레 한 송이 이 봄에도 피워 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사하기 위해서, 평화롭기 위해서. 당신, 무사한가요.”(30쪽)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한윤형 지음│어크로스 펴냄│2013 4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27



저자 한윤형은 스스로를 '잉여'로 규정한다. 잉여는 과잉의 산물이다. “소수의 인간이 관료 조직과 자동화 기계를 붙들고 화석 연료를 펑펑 쓰며 너무 많은 물건을 생산하자, 그 공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간 대부분이 잉여가” 되었고,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버둥거려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의식을 가졌다.

 

‘잉여세대’를 둘러싼 세대론 논쟁에서 정작 청년들은 논의의 주체에서 제외되어 있으나(또는 그들 스스로 무관심했거나), 그 세대론이 유통되고 인용되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청년들은 어떤 사회문제나 정치적 패배의 책임을 추궁당하곤 했다(예를 들면, '20대 개새끼론'). 그런 면에서 대부분의 세대론은 공허하거나 부당하다. 결국 세대론의 핵심은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혹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한국 자본주의의 실패와 직결된다. 그리고 저자의 안타까움은 ‘88만 원 세대’와 ‘쌍용자동차 투쟁’이 만나지 못한 그 막막한 현실을 주목한다.

 

“88만 원 세대가 쌍용자동차 투쟁과 만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쌍용의 노동자들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애저녁에 포기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 안전을 보장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66쪽)

 

청년세대론에 대한 당사자 반론이 담긴 2부를 곱씹어 소화한 후에, 1부에 담긴 저자 한윤형의 처연한 잉여인생론과 사적 비망록을 읽어내길 바란다. 이 과정에서 공감에 이를 수 있다면, 3부를 통해 그 '희망'에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을린 예술≫

심보선 지음│민음사 펴냄│2013 5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71

 


누군가에게 독점된 예술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리하여 심보선은 “예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라고, 불온한 희망을 선동한다. 한편, 위기에 처한 ‘그을린 예술’은 타인과의 우정을 모색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정은 어떤 손익을 헤아려 맺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추락하였으나, 진정한 우정은 “함께 살고 함께 존재하고 함께 지각하는 것, 그 자체가 좋고 즐겁기 때문에 맺는 타인과의 관계”를 지향한다. 예술은 창작과 해석을 통해 고유한 삶의 형태를 빚어내고, 타인과의 우정을 통해 공존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예술가들은 위기에 처했다.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려는 자기도취적 존재 중명”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편승해 성공을 욕망했지만, 과도한 경쟁 논리에 휘말려 낙오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따라서 저자는 사회학적 비평을 통해 ‘예술의 죽음’을 논증하고 ‘시인의 꿈’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가늠한다. “그 꿈의 장소는 피난처이자 서식지이자 투쟁 거점”이 될 것이다.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그을린 예술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해 있다.”(14-15쪽)

 

삶의 평범함과 궁색함을 창작과 해석, 친구-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각하고 나눌 때, 인간은 비범하고 위대해진다. 평범한 비범함, 궁색한 위대함이야말로 ‘우정으로서의 예술’이 밝히는 인간적 실존이다.”(34쪽)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지음│배수아 옮김│봄날의 책│2013 6

 


태초에 말이 있었다. 말은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몸짓이나 생식기의 가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말은 소리가 아니다. 말은 존재의 시작과 더불어 주어진 운명이며, 존재가 이루어야 할 숙명이다. 신은 우리에게 말을 주었다. 피카르트는 ‘침묵’에 이어 ‘말’의 본질을 수려한 문장으로 추적한다. 그의 사색은 우아하고 탐스럽다. 추락한 말의 본질이 회복되었을 때 우린 비로소 삶을 희망한다.

 

피카르트의 대표작 ≪침묵의 세계≫(까치글방, 2010)를 꼭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을 더불어 읽어야 한다. 침묵이 근원적이되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성찰의 공간이었다면, 말은 존재의 성숙과 완성을 도모하는 수련의 과정으로 제시된다. 시적 운율로 충만한 피카르트의 문장을 배수아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겼다. 

 

말을 위해서는 하나의 행동이 불가피했다. 하나의 행동을 침묵으로부터 꺼내와야만 했다.” “말은 전적으로, 온전히 진실이어야만 했다. 말은 진실을 통해서만 그림에 맞서서 최초의 현존을 획득할 수 있었다.”(206쪽)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지음│김희상 옮김│돌베개 펴냄│2013 6



사랑은 우리 존재를 사로잡는 거의 유일한 서사다. 내 존재가 들썩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프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서사가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계급과 자본의 논리는, 오늘 우리의 사랑에 값을 매기고 수치화 한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오늘날 사랑이 심리학적의 연구 대상으로, 기껏 치유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사랑의 파트너를 고르는 하나의 시장의 생성되었다. 학벌과 재산, 성적 매력 따위로 권력의 서열을 줄 세우는 사랑은, 언제나 아프다. 


사랑은 스스로에게, 둘에게만 매몰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존재의 확장이어야 한다. 오늘날, 사랑이 아프다. 그 아픔을 추적하면 병든 세상이 보인다. 사랑은 우리 존재를 사로잡는 거의 유일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의 낭만적 사랑은 20세기에 일어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문화적 혁명을 포괄한다. 하나는 생활방식의 철저한 개인주의화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자신의 감정을 가장 우선시하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사회관계의 경제화로 자아와 심지어 그 감정을 꾸미는 일까지 경제모델이 장악했음을 뜻한다.” 


“이는 자본주의 문화의 문법이 권력을 가지고 이성애라는 낭만적 관계의 영역으로 침투해 장악한 결과다.”(이상 25쪽)

 

 




≪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지음│북바이북 펴냄│2013 8



이원석을 처음 본 것은 2007년 2월이었다. IVP에서 줄곧 문서학교를 담당했는데, 그해 그를 "독서법-서평 쓰기" 강사로 초대하였다. 신학과 철학적 개념, 날 선 논리를 동원한 그를 청중들이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으나, 그는 쉬이 청중들과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청중은 환호하였으나, 어떤 청중은 좌절하였다(최근 출간된 ≪거대한 사기극≫을 보며 놀란 것 중 하나는, 드디어 그가 독자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쉽고 간결한 논리, 적절한 위트가 그의 문장에 담겨 있었다).

 

자기계발이란 허상을 폭로한 것은 이원석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십수 년 전, 서동진은 그 근저에 신자유주의의 욕망이 담겨 있음을 명백히 밝혀냈다(≪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그사이 신자유주의 사회는 몰락하고 있지만, 자기계발이란 허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번엔 이원석이 나섰다. 자기계발의 역사, 형식, 주체, 담론을 이원석은 군더더기 없는 논증으로 파헤치고 폭로한다. 그리고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의 비극’을 보여준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학교에서 자기계발이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 되었다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기계발은 이제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생존과 복지를 위해 충실하게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된 사회 현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이제 우리 모두가 자기계발적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각자 자기 인생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216쪽)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독자들은 그의 논증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것인가. 그가 말한 대로, 자기계발은 생존의 조건이 되었거나,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희망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대한 사기극’에 불과하다면, 이제 독자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이원석은 “자기계발을 하지 않더라도 취업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된다고 말한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에 비약이 있다. 자기계발로 성공하는 인생이 될 확률이 높은가, 아니면, 자기계발이 없어도 누구나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확률이 높은가. 저자의 대안은 가능한가. 다만 나는 이즈음에서 이원석의 편을 들고 싶다. 그가 옳기 때문이다. 하여 이원석을 ‘나의 저자’로 모셨다. 이번엔 “공부란 무엇인가”란 주제다. 기대하시라.

 



 


≪사회문제의 경제학≫

헨리 조지 지음│전강수 옮김│돌베개 펴냄│2013 9



물질의 진보가 진행될수록 노동자들은 분배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노동자들은 절망에 처한다. 모든 어려움은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비롯된다. “의회권력에 기대어 성립한 독점기업의 존재와 정치적 부패 또한 이런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1883년에 쓰여진 이 책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톨스토이는 이 책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헨리 조지가 쓴 뛰어난 책, 연설문, 그리고 기사 중에서 이 책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작품이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간결함, 명료함, 논리적 엄밀성, 논박하기 어려운 논증방식, 문체의 아름다움, 진리와 선과 사람에 대한 진실하고도 깊은 사랑이 그것을 입증한다.”

 

헨리 조지는 모든 사회문제의 근본에는 “인간과 지구의 관계-즉 노동과 자연자원의 관계-와 관련하여 만든 사회제도”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토지의 사유화다. 


지구에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감히 땅에 대한 배타적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가. 헨리 조지의 비판은 근원적이지만, 그 대안은 사뭇 현실적이다. 토지를 국유화하거나 모든 인민에게 배분하자는 극단적 주장이 아닌, 오직 토지세를 확실히 징수하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와 토지의 가치 상승에 따른 유익을 모두가 향유하자는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개인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존재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생기는 토지가치를 사회가 징수해서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쓰자는 말보다 더 정의에 부합하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272쪽)

 





≪다시 태어나다_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 지음│김선형 옮김│이후 펴냄│2013 11

손택에 관한 글 http://soli0211.tistory.com/364

 


수전 손택(1933-2004)은 작가이자 평론가였다. 그녀는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이자열렬한 실천가로 불리길 원했다서른세 살에 출간한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는 당대 지성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손택은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라고 도발했다. 또한 그녀는 언제나 지배 권력의 불의에 맞서 '용기와 저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평생 그렇게 살았다

 

손택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타인의 고통>을, 그리고 ≪해석에 반대한다≫와 ≪문학은 자유다≫를 읽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 ≪다시 태어나다≫은 손택 입문서로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다만 손택을 충분히 읽었다면, 이 책을 참으로 좋아하게 될 것이다. 


일기 3부작 중 첫 번째 책으로, 이 책은 14살부터 30살까지 손택의 민낯을 보여준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방황, 그리고 지적 열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진하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젊음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삶의 번민, 절박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일까?”(17쪽)

 

늙어간다는 두려움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인식에서 탄생한다. 그건 현재를 오용하고 있다는 인식과 상응한다.”(374쪽)

 


 

 


≪다른 길이 있다≫

김두식 지음│한겨레출판 펴냄│2013 11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92



아이러니하지만 김두식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선 후에야 진정한 구도자가 되었다. 세상의 불의와 교회의 무력함에 애통했고, 그 슬픔은 그를 용감하게 했다. 구도자는 끊임없이 묻고 도전하고 수행한다. 구도자의 결기는 파토스를 앓는다. 김두식은 법조계의 불의한 카르텔에 맞선 내부고발자였고(≪헌법의 풍경≫≪불멸의 신성가족≫≪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국가적 신념 속에 굴절된 사회적 금기에 맞선 평화주의자였다(≪평화의 얼굴≫). 그런가 하면 영화라는 프레임을 통해 인권 문제를 대중의 언어로 풀어냈으며(≪불편해도 괜찮아≫), 급기야 강박에 가까운 자신의 삶 속에 깃든 은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노골적인 탈선을 선동했다(≪욕망해도 괜찮아≫).

 

경계를 걷는 그의 행보는 위태롭고도 굳건하다. 그는 종종 자신의 ‘소심’을 고백하지만, 그 함의는 보다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여 자신의 삶이 부서져버린 이들 앞에서, 그는 그저 ‘바른 청년’이었던 그의 과거를, 기독교인으로서의 무지를 성찰한다. 이번에 출간된 인터뷰집 ≪다른 길이 있다≫에서도 그 ‘소심’은 여러 곳에서 발휘되지만, 이 책을 함께 기획한 고경태 기자는 “소심을 돌파하는 결심”이란 합당한 레토릭을 선사한다. 이 책은 서른 명의 인터뷰이가 서 있는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나눈 대화라는 점에서, 그들의 절실함을 이끌어내는 인터뷰어 김두식의 굳건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과 같은 결을 갖는다.

 

동일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인터뷰어를 만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터뷰가 된다. 김두식이란 인터뷰어를 통해 구현된 서른 명의 ‘말’은 절창에 가깝다. 수려한 문장을 구사한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가장 위태로운 지점을 고백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터뷰이의 진심을 믿는 인터뷰어의 선의는, 그들의 가장 깊숙한 슬픔에 닿는다. 깊고 깊은 곳에 놓여진 슬픔은, 오늘 그의 삶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저는 기억의 감정을 풀어낸 순서대로 작업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왕따 사건을 20년 동안 반복적으로 저 자신에게 납득시켜온 것과 같은 작업이었죠.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내가 아파했던 부분, 쉽게 넘어가지 않는 부분만 기억에 남아요. 그렇게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 고리로 연결되어 서사가 되는 거예요. 그보다 완벽한 서사가 없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김성희 편, 191쪽)   

 




 


 



 

문학 10권의 책



 

  


≪체르노빌의 봄≫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길찾기 펴냄│2013 3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389

 

건축학도 출신의 만화가 엠마뉘엘 르파주는 동료들과 함께 체르노빌에 갔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증언자뿐 아니라 참여자, 행동가, 투사가 되길 바랐다. 그들은 원자력 발전소로부터 40킬로미터, 방사능에 오염된 금지 구역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볼로다르카란 작은 마을에서 지내며, 금지구역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황폐화된 땅에서 신성한 공포를 느꼈다. 금지구역은 엄격히 통제된 땅이다. 오염된 땅의 참사가 오롯이 보존된 끔찍한 현실 속에서, 금지구역의 숲에서 르파주는 충만한 신록과 조우한다. 상상일까. 르파주는 그것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여운을 남긴다.

 

르파주와 그의 동료는 폐허의 실상을 그림으로 옮긴다. 목판과 연필, 수채화로 표현된 그림은 세밀하고 정교하고 사려 깊다. 독자들은 그림에 몰입하여 어느새 르파주와 함께 체르노빌의 숲을 거닌다. 그러다 문득, 놀라 멈춘다. 르파주가 그랬던 것처럼, 오염에 내가 노출된 것이 아닌지 움추리며 악몽 같은 현실과 직면하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폐허에는 낭만이 아닌 인간의 죄의식이 서려 있다.”(93쪽)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창비 펴냄│2013 4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29



소설에는 유독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언어장애를 가진정애의 어머니가 그랬고, 가난에 집을 떠나 도시로 가야 했던 아버지의 말이 그러했고, 차츰 미쳐가는정애의 말이 그랬다. “키욱키욱파파라파휴우라!” “수리수리마수리 수수리 사바하” “아바아바사융기샹가바그것은 소리였고, 울음이었고, 노래였다

 

나는 어머니의 진짜 말은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말 속에 있는 것같이 여겨졌다. 어머니가 알아먹을 수 있는 말로 하는 말은 가짜인 것만 같았다.”(262쪽)



 

작가 공선옥은 ‘작가의 말’에서, 그 알아들 수 없는 말의 출처를 밝힌다. 어머니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 ‘진짜 말’로 느껴졌다고 고백한다(‘정애 어머니’는 작가 어머니의 슬픈 과거가 반영되었다). 어쩌면 소설 속 그들이 읊조리는 숱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오늘 우리가 외면하는 ‘진짜 말’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소설을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들어주는 사람 없어 혼자 울어야 했던 그대, 광주”에게 바친다고 썼다. 


어느 날 '정애'는 사라진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무성한 소문만이 떠돈다. 소설의 마지막 시제는 '지금'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영암집 주모 묘자'에게 '이 세상 모든 냄새가 나고 또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정애'가 찾아온다. '정애'의 영혼이었을까. 알 수 없다. 구천을 떠도는 '정애'와 해후한 '묘자'의 슬픔은, 그 시대를 견뎌 지금까지 살아온 이들의 가슴속에 여전한 고통으로 존재한다.






≪눈 먼 올빼미≫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공경희 옮김│연금술사 펴냄│2013 5

≪눈 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배수아 옮김│문학과지성사 펴냄│2013 5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7쪽, 배수아 번역)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17쪽, 공경희 번역)

 

소설의 첫 문장은 전체를 지배한다. 그것은 죽음의 전조였다. 서늘한 죽음은 존재의 부조리를 추적하고, 존재의 부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는 불안을 야기한다. 한 가난한 예술가가 영감의 원천이자 절망의 원천이 되는 한 여인을 암매장한 후 술과 아편의 힘을 빌려 현실 너머의 세계를 넘나든다. 억압의 시대, 그리고 부조리한 자신의 본질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서사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 서사를 이끄는 힘은 매혹이다.

 

두 책을 비교하여 읽는 재미가 제법 좋았다. 배수아와 공경희의 번역 모두 훌륭하다. 개인적으론 배수아의 문장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가독성은 공경희가 조금 나았다(번역의 차이일 수도 있고, 그들이 번역 판본으로 삼은 독어판과 영어판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연금술사 번역본의 디자인이 매우 훌륭하다(사진).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난다 펴냄│2013 6

 


1945년 태어난 황현산은, 2002년에야 첫 번째 비평집 ≪말과 시간의 깊이≫(문학과지성사, 2002)을 출간하였다. 그 책과 두 번째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과 더불어 내게 문학을 읽는 시각을 각성시켰으며, 문학과 세상을 잇는 사려 깊은 생각들을 품게 만들었다. 이번에 출간된 ≪밤이 선생이다≫은 세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산문집이다. 그는 글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모든 오만을 떨쳐버리되 정갈하고 맑은 언어로 서늘하면서도 농밀한 서사를 구현한다.

 

난 이 책의 출간 소식이 반갑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흠모하는 작가들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그의 문장을 공유하는 것이 싫었다. 이 책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유혹할 것이며, 그들은 기어코 황현산을 ‘나의 저자’로 꼽을 것이기 때문이다. 염치없는 욕심이었지만, 마치 이것은 내 연인을 올래도록 독점하고픈 기필한 욕망과 흡사할 것이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4-5쪽)



 

 

  


≪창작에 대하여≫ 

가오싱젠 지음│박주은 옮김│돌베개 펴냄│2013 6



노벨문학상을 비롯한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거장 가오싱젠의 예술론을 담았다. 저자는 줄곧 ‘20세기의 극복’을 주장한다. 20세기식 사회 비판과 예술 전복은 오히려 예술의 소멸을 초래했으며, 보수주의나 혁명은 모두 예술의 길이 아니다. 무엇보다 문학은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오직 미약한 개인의 목소리로 돌아와야 한다.

 

가오싱젠의 당부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문학의 정치적 필연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당위에 동원되거나 소모되는 문학의 처지를 개탄하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자아로 그리스도가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오직 자신을 겁박하는 정치적 압력과 세속적 욕망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미학’이 아니라 ‘나만의 미학’을 쫓아야 한다. “예술가는 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자기 자신을 완성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조이자 자기 시대에 대한 인식입니다. 문학은 바로 이런 자기인식에 한 줄기 빛을 가져다주는 몇몇 실마리입니다. 문학은 결코 타도와 전복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혹은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어떤 실상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진실이야말로 어떻게 해도 무너지지 않는 문학의 기본 품격입니다.”(36-37쪽)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억관 옮김│민음사 펴냄│2013 7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76

 


주인공 쓰쿠루는 대학교 2학년 여름의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배제된다. 그리고 서른여섯 살이 되어 시작한 순례를 통해 오래된 혐의를 벗어버린다. 무채색이었던 자신이, 색채 가득한 친구들에겐 선망과 연모의 대상이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쓰쿠루는 기쁘지 않다.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시로의 비극적 죽음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순례의 마지막 시공간엔 ‘슬픔, 향수, 멜랑콜리’가 아프게 난무한다. 작가는 “가슴의 동통이 다시 살아났다. 격렬한 통증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격렬한 통증의 기억이다”라고 부연한다. 애초 쓰쿠루의 순례를 제안하고 북돋았던 연인 사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라고. 결국 쓰쿠루는 순례의 여정을 통해, 숨겨진 생의 슬픔을 복원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격렬한 통증을 각오하는 일이다. 그것을 마주해야 이를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364쪽) 

 

그 시절 쓰쿠루를 짝사랑했던 구로는 쓰쿠루에게 말한다. 우린 살아남았다고, 살아남은 이들에겐 책무가 있으니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반드시 사라를 붙잡으라고 당부한다. 서른여섯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쓰쿠루가 밤잠 설치며 프러포즈의 날을 헤아린다. 슬픔, 향수, 멜랑콜리에 새벽을 앓은 적이 있다면, 쓰쿠루처럼, 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 킴 지음│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길찾기 펴냄│2013 7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59

 


이 책은 파시즘에 맞서 혁명의 전위에 섰으나 패배를 거듭하다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한 아나키스트의 패배를, 그의 비극적 삶을 담아내고 있다. 그들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정치와 자본 권력과 타협하며 적극적인 변절을 선택했기에, 그들의 비극은 더욱 서럽고 처연하다. 주인공 안토니오는 아내와 이혼하고 한 양로원에 갇혀 쓸쓸한 노년의 삶을 보낸다. 그의 투신은 마지막 저항이었고, 소년 시절부터 품고 있던 '하늘을 비상하는 꿈'의 극적인 실현이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의 패배와 자살. 이 비극은, 오늘 어떤 함의로 읽어야 하는가. 과연 어떤 희망을 도모할 수 있을까. 자살한 아나키스트의 아들인 저자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하나의 존재가 다른 하나를 으스러지게 껴안는 형태인 ‘융해’”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아나키스트적 존엄을 복원하고자 한다. “글쓰기는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고발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특히 만화라는 서술 방식은 그 슬픈 역사에 입체감을 더하고, 탁월한 공감의 언어를 체득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독자를 향한 새로운 동맹을 극적으로 도발한다.

 

더 넓게 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이 유대 속에서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벗고, 자신의 가장 연약한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흉터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맹과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혹은 애인, 친구, 희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오랫동안 속죄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말이다.”(214쪽)




 

 


≪야만적인 엘리스 씨≫

황정은 지음│문학동네 펴냄│2013 10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자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녀는 어쩌다 부랑자가 되었을까. 그 아득한 슬픔을 단단한 서사로 추적한다. 단단하다는 것은, 자칫 허물어질 수 있는 절망에 대한 경계의 자세다.

 

그녀는 잠들었다. 숨소리가 들린다. 앨리시어는 문에서 멀어져 방으로 돌아온다. 밤은 갈 것이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지난밤 서리에 젖었던 외벽이 마를 것이다. 피는 닦일 것이고 상처는 아물 것이고 다 자간 새끼 두 마리와 더불어 개장에 남은 개는 어제처럼 개장 속을 오갈 것이다. 내일은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방이 낯설다. 혼자뿐이다. 이 방에 혼자 있다. 동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디에 있나.”(149-150쪽)

 

이충걸은 솔직한 건 무정한 것이라고, 정직한 건 피를 흘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은의 서사는 오랜 습속을 거슬러 그 ‘말’에 아우라를 선사한다. 이 잔혹한 서사를 감히 슬픔이라 말할 수 없다. 이토록 처연한 폭력과 야만의 현장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람들의 무심이다. 다만, 소설 마지막 즈음에 놓인 문장 두어 개가 유일한 위로다.

 

그대가 옳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162쪽)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2013 11



그의 소설에 등장했던 상처받은 영혼들의 아픈 말들이 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심증은 등단 20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서 입증된다. 20년이나 걸렸을까.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저녁의 소묘 3’)라는 시어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고통은 시적 침묵을 야기했을 것이며, 그 침묵이 마침내 언어를 얻게 되었던 순간은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피 흐르는 눈 3’)이거나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그때’)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은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초상화를 마주하며 영혼의 피 냄새를 그려낸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마크 로스코와 나 2’)

 

함민복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김소연의 ≪수학자의 아침≫, 이병률의 ≪눈사람 여관≫, 이성미의 ≪칠일이 지나고 오늘≫ 등 여러 시집을 헤아렸으나, 가장 울림이 컸던 한강 시집을 이곳에 올려놓는다.

 

 


 

 

관능적인 삶≫ 

이서희 지음│그책 펴냄│2013 11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86

 


그녀는 페이스북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등장했다. ‘Sophie Ville’라는 필명으로 일기를 쓰듯 기록한 관능의 서사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서사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관능의 연대기를 이뤄낸다. 이서희의 에로티즘은 우선 바타유의 사유를 충족한다. 그녀의 관능은 억눌린 존재의 저항과 해방 서사인 동시에, 닿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필사적인 열망인 까닭이다. 

 

지금도 생각한다. 관계의 황홀경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을 때 찾아왔다가 그 사랑을 지속하기로 선택한 순간에 지극해진다. 존재의 연루가 관계의 단단함으로 이어지는 자리. 그곳은 인연의 결말이 어떠하든 눈부시다.”(46쪽) 

 

뜨겁게 질주했던 청춘의 관능을 회고하고 추억하는데, 불쑥 도드라진, 깊고 아득한 상처들과 조우한다. 골방 속에 갇혔던 그녀의 상처는 오랜 세월 고독했다. 그 상처들은 푸코가 직시했던, 억압된 성의 역사와 관련 있다. 아득한 슬픔에 대하여 그녀는 아우성치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는 일탈과 저항의 관능으로 결행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서의 관능을 희망한다.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해한” 관능의 의미들도 있겠으나, 그것이 단지 추억일 뿐이라면 얼마나 허망할까. 하여, 그녀의 관능은 여전히 절박하다. 불행에는 겸허하되 행복에는 당당하다. 그녀 고유의 열정은 언제나 오늘 다시 시작한다. 관능의 문장은 필사적이고, 관능의 서사는 생동하며, 관능의 존재는 언제나 건재하다. 관능은, 존재하는 모든 이의 심장에 거친 호흡을 선사한다.

 



 




 


 

기독교 7권의 책






≪당신들의 기독교≫ 

김영민 지음│글항아리 펴냄│2012 12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374

 

 

철학자 김영민의 도드라진 언어는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그의 서사는 구체화된 비수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멎게 만들 것만 같고, 깊은 탄식으로 우리 존재를 기어코 몰락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몰락한 슬픈 존재들의 희망을 오직동무로서의 연대에 둔다.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이며, 포섭할 수 없는 이웃이며, 다독거릴 수 없는 긴장이며, 끝나지 않는 기다림인 타자와의 간극을 오직동무와의 연대로 닿길 바란다(≪동무론≫, 98).

 

김영민은 스스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당신들의 기독교”다. 하지만 그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잘 드러나듯, 그는 ‘예수의 공동체 서사’를 밑절미 삼아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의 사상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유력한 체제와 기꺼이 불화하되, ‘무능과 부재의 인문적 급진성’을 무기 삼아 싸우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지는 싸움’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노마드 신자’ ‘무교회주의자’ ‘가나안 성도’ 등 무엇으로 부르던 상관없으나, 그처럼 오직 예수로 인한 지독한 질곡(桎梏)의 삶을 사는 제자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 ≪당신들의 기독교≫는 기독교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여타의 책처럼 ‘맞서’ 읽을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숨죽여’ 읽어야 한다.

 

종교인으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호패는 ‘고백’이나 신념 혹은 어떤 감동의 울결 따위가 아닙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며, 가면의 일관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올곧은 삶의 양식 속에서만 삶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삶∙죽음의 총체성과 이를 생활정치화하는 일관성만이 그 영혼을 증거합니다.”(4쪽) 

 

 




≪회심의 변질≫ 

알렌 크라이더 지음│박삼종신광은이성하전남식 옮김│대장간 펴냄│2012 12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374


 

김영민이 쉴새 없이 던지는 난해한 질문들 앞에, 며칠을 바둥대며 그럴듯한 답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그 절망에 이른 즈음에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불가능한 꿈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또 하나의 급진적인 책, 알렌 클라이더의 ≪회심의 변질≫이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민이 주목한 기독교 신앙의 원형인 예수 공동체는, 알렌의 책에서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표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되, 오직 예수의 길을 따라 신념(Belief), 행동(Behavior), 소속(Belonging)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지난한 여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 기독교는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종교가 되어가고, 회심은 그저 심리적, 정서적 측면으로 축소된 것이다. 알렌의 명료한 문장과 명쾌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오늘 우리의 절망을 정확히 지적하되 돌아가야 할 신앙의 본질을 선명히 제시하는 수작이다

 

김영민의 질문에 알렌의 책으로 답한다. 김영민이 흡족해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몰락한 우리의 교회들이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도 불가능한 꿈을 향해 걸으며 죽을 만큼 괴로웠으며 실제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하여 우리도 통속적 기독교의 절망을 딛고 기어코 예수의 길을 걷다 죽어버리자. 그것이 세상에 맞서 저항하며 예수를 철저히 따르던 기독교 본래의 자리였으니까,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공통의 신념과 생활 방식을 공유한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공동체 정신은 확연하고도 지속적인 것이었다. 165년 저스틴은 그와 공부를 했던 사람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 로마 출신뿐만 아니라 갑바도기아인과 프리기아인과 같은 다양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모습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회심 경험 후에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포괄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39쪽)

 

 



  

≪박삼종의 교회생각≫ 

박삼종 지음│홍성사 펴냄│2013 2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387



이 책은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체제의 극복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 ‘믿음은 곧 정의’이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세속 권력에 대항하는 정치적 영성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을 바탕으로 한 시민 불복종 운동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또한 “전쟁과 폭력을 획책하는 내외의 세력들에게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우리 이웃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경제민주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선물의 경제 공동체”를 대안 담론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선물의 경제 공동체”를 대전 동구의 교회 공동체에서 실험하고 있다. 목회자나 사역자에 의존하는 교회 시스템을 개혁하고, 수직 구조가 아니라 서로가 벗으로 생활하고 연대하며, 다함께 노동하는 자립적 기반을 가진 생산 공동체, 지역에 뿌리내린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저자의 확신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선물의 경제가 흐르는 변방에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솟구칠 수 있을까. 나의 생각에, 저자의 확신은 가능성이기 이전에 옳은 길이다. 변방의 불온한 혁명가였던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길, 말이다.

 

약탈적 금융사회의 높은 사회적 생존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거의 모든 이들이 불행해지고 약한 부분부터 파산하는 '빚 권하는 사회'입니다. 개인과 가계에 전적으로 책임이 지워진 이 높은 사회적 생존비용을 낮추고 결혼, 출산, 육아, 교육, 거주, 복지, 의료 등을 공동체가 책임짐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선물의 경제 공동체’는 대가의 경제, 거래 관계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시장 경제를 사는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가 앞으로 고민하고 나아갈 방향입니다.”(135쪽)




 

 

 

≪산둥 수용소≫

랭던 길키 지음│이선숙 옮김│새물결플러스 펴냄│2013 3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17

 


저자 랭던 길키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산둥 지역의 위현 수용소에 1943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갇혀 있었다. 이 책은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인간 실존에 대한 회고록이다. 빅터 프랑클과 프리모 레비와 동시대의 비극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랭던 길키의 상황은 훨씬 나았다.

 

저자는 산둥 수용소가 거의 일상에 가까운 꽤 살만한 곳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다고 수용소가 마냥 살기 좋은 곳이 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가장 힘겹게 한 것은, 각 사람에게 허락된 비좁은 공간이었다. 내 은밀한 욕망을 감출 공간이 없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위태롭다. 저자는 인간 본성의 민낯에 직면하며 깊은 회의에 빠진다. 추상적인 진리는 수용소의 실제적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자들의 위선은 그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진리, 그리고 신앙이 인간 본성 앞에서 무력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산둥 수용소는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는 하나의 샘플로서 유효했고, 현실은 그 연속 선상에 놓여 있었다.

 

그랜트는 자신의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인들이 ‘거룩’해질 수 있는 정정당당한 기회를 얻는 데만 신경을 썼지, 이웃의 배고픔이 해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도덕관은 천국에 복을 쌓는다는 개인적 공로에 입각한 것이었다.”(202쪽)

 



 

  

 

≪성서의 에로티시즘≫

차정식 지음│꽃자리 펴냄│2013 4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37



이 책은 외람되고 위태롭다. 성서를 둘러싼 전통의 금기와 세속적 욕망의 은밀함은, 이 책의 도처에서 탄로나거나 새로운 통찰로 대체된다. 저자는 성서에 기록된 에로스 서사를 뒤따르며, 왜곡된 통념을 깨뜨린다. 근친상간, 천박한 매음, 경계를 넘는 탐욕적 에로스 등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와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을 극복할 대상으로 산정한다. 

 

저자는 성서적 본질과 인류의 실존적 현상의 간극에서 바특한 탐구를 수행한다. 본질에 근거하지 아니한 전통과 통념들은 그 앞에서 처참하다.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은 결국 허물어지고 합치의 지경에 이른다. 그 매개는 대체로 ‘몸’이나,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더 크고 더 깊은 사유까지 탐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저자로 인해, 성서의 황홀한 에로티시즘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에로스의 핵심은 무엇보다 합일의 정념을 지향한다. 에로티시즘은 그 합일을 훼방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이르는 모든 부정적 스캔들을 혁파하는 해체의 에너지다.”(250쪽)




 

 

 

≪옥중연서≫

디트리히 본회퍼마리아 폰 베데마이어 지음│정현숙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13 6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64



우리가 헤아려야 할못다 한 사랑이 여기에 있다. 나치 체제에 저항하다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여 1943년 체포되고 1945년 나치가 항복하기 직전에 처형당한 목사이자 예언자적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그리고 그가 체포되기 직전 약혼했던 그의 연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1924-1977). 그들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의 예표로서 반추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사랑은 역설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란, 그 자신을 던짐으로 완성된다. 그리하여 오직 의미로만 존재해야 하는 숙명을 기꺼이 수용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통념은, 그 숙명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본회퍼와 마리아의 짧은 사랑은, 서로의 부재를 견디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낙관을 다짐처럼 써놓지만, 비극적 종말을 아는 독자들은 완곡한 슬픔을 앓으며 그들의 사랑을 추적한다. 그들의 그리움이 격렬할수록 우리의 슬픔은 사무친다. 

 

디트리히, 우리 삶에 슬픔이나 절망이 찾아오는 힘든 시간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시간이 우리 둘보다, 우리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보다 더 커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슬픔이나 절망이 결코 우리보다 더 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게는 항상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 근거를 제게서 찾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쨌든 지금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슬픔도 절망도 우리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122-123쪽)

 





C. S.  Lewis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홍종락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13 10월│

서평 http://soli0211.tistory.com/487

 

 

C. S. 루이스 서거 50주년을 맞이하여 주목할만한 전기가 출간되었다. 이 전기는 당분간 루이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될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역사신학자답게 루이스와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루이스의 ‘텍스트’에 근거하여 그를 비평한다. 특히, 월터 후퍼가 편집한 루이스 서간집 3부작을 근거로 한 최초의 전기라는 점에서 돋보이는 객관성을 확보한다(이를 통해 그는 기존 전기의 몇 가지 오랜 추정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바로잡는다. 예를 들면, 루이스의 회심 시기가 1929년이 아니라 1930년이라는 점 등). 특히, '나니아'에 대한 돋보이는 통찰, 조이 데이빗먼과의 로맨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 등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맥그래스의 루이스 전기가 매우 훌륭한 저작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책을 더 읽어야 루이스에 대한 온전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루이스와 최고의 우정을 나누었던 조이 세이어스가 쓴 ≪루이스와 잭≫이다. 객관적 사실로만 입증할 수 없는 지점에, 세이어스의 촉촉한 시선이 닿아있다.)

 

“결국 당신을 허문 것은, ‘참된 신화’였습니다. 수많은 신화의 모태가 된 원형으로서의 이야기, 말입니다. 무엇보다 톨킨과의 우정이 당신의 ‘강철 문’ 빗장을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톨킨은 ‘신화는 근본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이야기, 세상의 근본적인 구조를 알리는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근거하여, ‘이성적’ 신앙이 갈망과 상상력과 통합하게 된 것이지요(맥그래스, 205쪽). 파스칼은 “종교적 신념이 옳은 것이라고 사람을 설득하는 시도는 부질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견고한 ‘강철 문’을 무너뜨린 ‘좋은 이야기’는, 당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테제가 됩니다. ‘나니아의 창조자’ 루이스의 이야기가 또 다른 사람들의 견고한 문을 여는 것이지요. 그 수혜자 중에 저도 있답니다.”(<복음과상황> 12월호 기고 서평 중)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루이스는 체스판 비유를 들어 어떤 수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그를 몰아갔는지 설명해나간다. 루이스는 그것들을 자신이 둔 몇 수가 아니라 자신을 상대로 둔 맞수의 몇 수로 묘사한다. ≪예기치 못한 기쁨≫은 루이스가 하나님을 발견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참을성 있게 루이스에게 다가간 이야기다.”(185쪽) 

 

 



 

 

 

그리고 2013,나의 저자

 

 


 ⓒ프레시안(최형락)

 

황현산

그가 오래도록 나의 ‘밤’이었으면 좋겠다.


 



 

  ⓒ김영사


서천석

그의 책은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그는 언제나 만족스러운 저자.

 




  

 

C. S. 루이스

그대 떠나신 50년 되는 해, 나의 ‘강철문’ 빗장을 열었던 그대를 추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