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_

페이스북 단상_2013/04/04-04/30

Soli_ 2013. 10. 27. 00:07

20130430


_오늘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기독교사상><복음과상황>을 읽었는데, 이들 매체 모두가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을 다루었더군요. 저는 이 책이 매우 훌륭한 책이지만, 몇 가지 치명적 단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예스런 문장과 태도 속에 깃든 가부장적 독선, 둘째, 델리탕티슴이나 소설 등을 폄하한다는 것, 셋째, 공부하는 '삶', 그 삶의 자리가 모호하다는 점 등입니다. 세 번째는 약점이라기보단, 저의 아쉬움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덧붙인 책이 이계삼 선생님의 책입니다. '진짜 공부'는 어떠해야 하는지, 모름지기 '공부의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니까요. <복음과상황> 5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oli0211.tistory.com/423


_'복(있는사람의)집'에 가봤는데요, 감나무가 심겨진 아득한 봄날 같은 그곳에 살면 언젠가 '푸르른' 사람이 될 것도 같더군요. 쉬운 일터가 없겠죠. 이곳도 그럴테죠. 그런데 그냥 편집자 말고 책을 정말 좋아해서 제대로 배우고, 만들고 싶다면, 이곳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뜻과 결기를 가진 분들, 도전해 보시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ismessage&logNo=20185907423



20130429


_이번엔 서평은 아니고요, 조금 부끄럽고 많이 민망한 글입니다. "빛과소금"에 기고한 글인데, "빛과소금"에서 붙인 제목은 특히 가당찮습니다. 감히 '거듭난 남자'라니요. 전 실패한 남자에 가깝습니다만, 그럼에도 용기내어 '거듭난 남자'가 되기를 노력할 뿐이지요.


http://soli0211.tistory.com/422




_마감 날 후다닥 쓴 서평, 마지막 문단. 주제는 "물질". 추천한 책은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하나님이냐 돈이냐><돈의 인문학>. 내일 다른 매체 마감날 쓸 서평 주제는 "에로티시즘". 내일이 더 기대되누나. 흐흐. 


"마지막으로 김찬호 교수의 <돈의 인문학>(문학과지성사, 2011)을 권한다. '돈은 개인과 사회를 묶어주는 사회 시스템'이다. 돈은 '외부 세계에 있는 객관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과 존재에 심층적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다. 현대에 이르러 돈의 권력은 점점 막강해진다. 이 책은, 돈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고,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인문학, 즉 인간다움의 가치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함의로 주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돈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궁금하다면, 이 책 다음으론 당신의 욕망을 읽으시길 바란다."



_민주당이 우클릭했다기보단, 그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아닐까. 다만 정권 잡으려고 좌클릭한 척 했겠지(물론 그들 중엔 진심인 사람들도 '일부' 있었겠지만). 그런 면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비스므리한 집단이다.


_지난 주에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인데요, 블로그에 옮겨 놓습니다. 이런 책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행운입니다. 고맙습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http://soli0211.tistory.com/421



_
마감날 쓰기 시작한 서평 첫 머리. 후다닥 쓴 거라, 아마 원고를 넘길 때 즈음이면 훨씬 단아한 문장이 되어 있을 거다(물론 여기에선 '단아하단' 기준은 문장의 길이와 순화를 말할테다). 그나저나 요즘 내 서평은 그 자체로 좀 비루하고나. 


"요즘 나의 고민은 욕망의 문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이며, 더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살기 위하여, 살아 남기 위하여 바둥대는 욕망도 있다. 옳지 않은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있고, 살아 남기 위한 욕망 앞에서 잠시 모른 척하는 가치가 있다. 지금 내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이, 그 욕망에 우리의 삶이 압도되는 순간, 우리 존재에 존엄을 부여하던 가치의 몰락을 경험한다. 가치가 몰락할 때 우리 존재는 비루하다
. 

욕망의 대척점에 가치가 있다. 가치란 우리 존재의 쓸모를 결정 짓는 그 무엇이며, 삶의 목표가 되는 그 어떤 의미로 정의된다. 성서는 가치와 욕망의 문제를,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한다. 성서는 '부(富), 돈, 재물'이란 뜻을 가진 맘몬을 우상으로 정의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를 수용하는 선한 욕망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간혹 그런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현실 속에서 가치와 욕망의 문제는 혼재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여린 마음은, 그것을 쉬이 구별하기 힘들지 않은가(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하지 않는 것인지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_이런 글 인용하면, 내가 '또' 이전 직장 '디스'한다고 해석하고 뒤에서 수근거리겠지? 그런데 이 글은 엄연한 출판계 현실이지만, 내 이전 직장은 대단히 훌륭한 곳이었다. 근로자기준법을 나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는 곳이니까. 그곳 사장님도 '악덕'과는 거리가 먼, 매우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이셨고. 그러니 오해마시라.(내참, 이런 구차한 설명을 덧붙여야 하다니!)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962




20130428


_샤를 단치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성을 넘어 감성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 것이 바로 문학이다. 유추와 감성, 이는 사물을 이해하는 또 다른 형태이며, 분석과 지성에 기대는 철학이 문학과 갈리는 지점이다."


20130426

_왼편엔 개울이 수줍게 흐르고, 오른편엔 진달래가 흐뭇하고 푸지게 피어있고, 아득한 가운뎃길엔 예지가 앞질러 걸어간다. 이곳 하늘은 감흥에 젖어 더욱 푸르다.



_사각사각. 나뭇잎 땅에 뒹구는 소리라고 했더니, 예지는 나무에게 속삭이는 바람의 소리란다. 




20130425


_지난 가을, 강정마을에 갔을 때 사실 난 좀 힘들었다. 사이렌이 울릴 때 난 어떤 자세로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몰랐고, 오후 공사장 앞 기도회에서도 뭔지 모를 낯선 시선들이 나를 주목할 때 잠시 당황했으며, 저녁 문화제에서도 그저 저들의 춤사위를 지켜보던 구경꾼 같이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때마다 에밀리가 그 환한 웃음으로 곁에 있어주었다. 강정에서의 둘째 날 아침 에밀리의 비자가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기뻐하는 그들은 에밀리의 용감한 로맨스를 들려주었다. 에밀리가 있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강정에서 그녀처럼 사랑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의 입국이 끝내 거절된다면, 강정은 연인을 잃은 슬픔을 감내해야 한다. 제발, 강정에 에밀리를 돌려주어라! 이 나쁜 놈들아!




201300424


_울며 소리친다. 잠간의 흐느낌이 스쳐간다. 난, 예지의 눈물을 닦고 말간 볼을 보듬어 속삭인다. "예지야, 꿈이야. 그러니까 잊고 다시 자. 알았지?" 침묵하던 예지가 들었을까 궁금했지만, 듣지 못했더라도 잠이 깨지 않아 다행인 거라고 단정지을 즈음, 예지가 내 손을 찾아 잡는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아빠, 옆에 있어야 돼." 

아빤, 예지가 내 곁에 있어 더 고맙단다.


_7년 전 오늘, 예지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내는 이틀간의 진통 끝에 예지를 낳고 그만 정신을 잠시 잃었습니다. 산소호흡과 응급처치를 받은 후에야 아내는 정신을 찾았고, 밤새 수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 예지 생일만 되면 아내의 존재를 다시 우러러 보게 됩니다. 예지를 낳으러 병원에 간 날부터, 예지가 태어난 다음달까지 아내 옆에서 쓴 7년 전 일기입니다. 지금 보면 갓난아이 예지는 참 못난이였는데, 그땐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이었습니다.





20130423


_<그대, 강정> 서평인데요, 블로그에 옮겨 놓습니다. 좋아하는 시인의 보석 같은 문장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지만, 강정의 절경을, 그곳을 지키는 낯익은 얼굴을 보는 즐거움도 그득한 책입니다.


http://soli0211.tistory.com/419




20130422


_"겨울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그러나 때로 부등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트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신경림의 "나목", <그대, 강정>에서 재인용)


_우리 교회에서 돕고 있는 성폭력 피해여성 쉼터 '하담'에 다녀왔다.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19세 이하 열명 내외의 여성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다음달까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비워줘야 한단다. 저들이 가진 재산은 전세보증금 1억. 그 돈으로 열명 내외의 공동체를 꾸릴 집을 찾아야 한다. 학교도 다녀야 하고 치료도 받아야 하는데, 더 멀리 더 깊숙히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막막하다. 


며칠 전 은수연 씨와의 인터뷰에서 나눈 이야기지만,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 국가는 가해자 처벌에만, 그것도 이슈가 될 때에만 집중한다. 가해자는 집을 지키고, 피해자는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살아 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인프라가 확보되어야 한다. 치료는 물론, 최소한의 학업도 마쳐야 하고 직업 교육도 받아야 한다. 만만찮은 재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국가는 피해 여성들을 돌보는 일을 여성단체로 떠넘긴다. 지자체는 자기네 영역에 보호시설을 두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업이나 교회들도, '티' 내며 도울 수 없는 이곳을 쉬이 찾지 않는다. 이사 갈 곳을 찾지만, 집주인들은 대부분 이들을 기피한다. 

저들은 이 아름다운 봄날, 당장 몸과 마음 쉴 곳을 찾아 가슴 저미는 한숨을 삭힌채 오늘도 길을 나선다. '하담'은 '하늘을 닮은, 하늘을 담은'을 줄인말이다. 소장님의 명함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신나는 동행"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하담'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수억, 수십억, 수백억 짜리 교회 건물이 서 있더라. 아프고, 처연한 봄날이다. 

+쉼터 '하담' 
연락처: 010-9140-1366
홈페이지: http://goyang.womenlink.or.kr/act/coop03.php




_"당신, 무사한가요. 저는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봄이 이제 막 도착하는 그곳에서 구럼비 검은 바위들과 함께 우뚝우뚝 힘을 내고 있을 당신께 언제까지고 무사한가요, 물을 겁니다. 당신과 내가 무사할 날을 위해서. 무사히 돌찔레 한 송이 이 봄에도 피워 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사하기 위해서, 평화롭기 위해서. 당신, 무사한가요?" (<그대, 강정> 중 시인 김근의 글) 


애닯은 사랑은 연인의 마음을 직시하여, 그 심연의 상처에 한없이 고운 위로의 말을 살며시 포갠다. 그저 묵묵히 기다려 그 슬픔을 보듬는다. 마치 죄인처럼 사죄하고 대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용맹스럽게 적의 뻔뻔스런 야욕을 폭로한다. 

가능한 피하고 싶은 강정이기도 했다. 송강호 박사님의 책을 만들면서 그랬고, 강정에 다녀오며 그랬고, 속절없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강정의 평화를 지켜보며 아픈 마음에 잠시 잊고자 했다. 하지만 작가들의 연서는, 사랑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패배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잊을 수 있는 그리움이라면, 피할 수 있는 운명이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여 난, 작가들의 연서를 읽고 또 읽으며 다시 그 사랑에 사무친다. 애닯은 사랑은 그렇게 봄처럼 다시 내 가슴에서 반짝인다.



20130421


_오늘, 타임라인은 유독 외로움에 사무치나 그 외로움이 마냥 외롭지는 않다. 

외로움을 향한 시선이 이리도 서로를 다독이니까. 


_아내 순일이 금요일부터 몸살이 났고, 난 토요일 오후부터, 예지는 오늘 새벽부터 차례대로 몸살이 났다. 아내가 제일 심했는데, 예지가 아프지 않았다면 끝내 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암튼, 우린 교회도 빼먹고 병원에 다녀온 뒤 잤다. 사실 토요일부터 우린 밤낮 자거나 끙끙 앓기를 반복했다. 아내와 내가 잠든 사이 예지가 일어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휴지심을 이용한 연을 만들었다. 아빠, 엄마, 예서의 연, 모두 세 개를 만들었고 홀로 멀쩡했던 예서는 좀 전까지 연을 들고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녔다. 예지의 편지에는 이렇게 써있다. 자기도 아프면서, 그 마음은 엄마를 닮아 은근 깊다. 


엄마에게,
엄마 개화나요?(괜찮아요?) 마니 아파요?
엄마가 아프니까 네(내)가 트별하게 마드어었요(특별하게 만들었어요).
사랑해요. 
예지 올림. 

아빠에게,
아빠 사랑해요. 아빠 네(내)가 아파서 잘 도와조서(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해요. 
예지 올림.





20130419


_"4.19"


그때 그 슬픔의 날, 아버지 같던 큰형님을 잃었던 나의 스승이 그랬다.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오늘 '4월 19일'을 제외한 364일이라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오늘, 4월 19일뿐. 그것을 잊지 않는 오늘이기를.


_싸이의 "젠틀맨". 듣지도, 보지도 않았지만, 그를 비판하고 옹호하는 글만 냅다 읽은 나의 결론은... 음, 뭐, 싸이 그런 것 이제 아셨어요? 마초, 섹스, B급... 초지일관 아닌가요? 왜들, 그리 발끈하시는지. 뭐, 그냥 '싸이'스런 노래고 뮤비겠거니 생각되네요.



_차별금지법이 한참 논란일 때 썼던 글이다. 그리고 오늘, '종북 게이' 논란에 파묻힌 차별금지법이 결국 국회에서 철회되었단다. 차별금지법을 상정한 의원실에는 '목사님의 지시'로 걸려온 전화가 끊이질 않았고, '항의에는 욕설이 섞였다'고 한다. 결국 기독교는 '차별금지법'을 꺾어 '차별'을 지켜냈다. 좋겠다, 나의 기독교. 


차별금지법 관련 기사: http://bit.ly/13np3RE

그리고 나의 블로그: http://soli0211.tistory.com/411



20130418


_한 목사님께서 물으시고, 제가 답한 내용입니다. 다소 편파적인 책 추천입니다만.


http://soli0211.tistory.com/415



_마은희 선생님께, 


<왜 책을 읽는가>의 저자 샤를 단치는, 마치 '더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하다가 죽음을 맞는 신화 속의 이카루스처럼', 독서를 통해 '소멸과 죽음에 맞서 결국 불멸에 이르는 것'을 말하더군요. 너무 비장한가요? 

그는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이타심'이라고요. 따라서 우리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며 독한 독서라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광주 선생님의 책과 책에 대한 정의를 좋아하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 읽기는 '일탈의 공간'이자 '수태의 성별된 시간'이라고요. 멋지지 않나요? 마음껏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기는 공간이라는 것이죠. 

그런 일탈과 놀이 속에, 현실의 힘겨움은 퇴화되거나 숙성되죠. 세르티양주가 말한 '열정적인 고독'은, 사실 욕망과 쾌락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린 어느덧 새로운 존재로 수태되는 것이죠. 샤를 단치가 말한, 이기심에 출발한 독자가 이타적 존재로 진화(혹은 성화)된다는 것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요. 
  

모쪼록 '즐거운' 책 읽는 시간 누리시길!  마은희님과 함께.



20130417


_"누구도 인간이 갖는 약점과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나는 더더욱 그러했다. 저마다 다른 유혹에 사로잡히고 정복당할 뿐이다."


1945년의 산둥수용소의 이야기, 1966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나, 2013년 한국을 사는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의 '감춰진 실존'을 향해 이 책은 뚜벅뚜벅 나아간다. 그래서 불현듯 두렵다.



_기억한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망각한다는 것, 우린 망각의 존재라는 엄중한 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린 존재의 시름에서 놓여난다. 죽음을 망각함으로 삶에 생기를 돋군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사로운 깃발을 움켜쥐고 조바심 내며 달리는 까닭에 실패하고 넘어진다. 망각을 사유할 때, 우린 비로소 불가능한 세월에 굴복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녀린 나의 실존과 화해한다. 


오늘의 마지막 문장이자, 나의 몫으로 남겨진 한줌 위로이다.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는 자는, 기다림의 빈 곳인 삶과, 삶 저 너머의 빈 곳인 기다림이 다가오고 있음을 본다."(50쪽)
"죽음을 망각하면서, 죽음이 망각을 지속시키고 망각이 죽음을 가져오는 지점과 만나면서, 망각에 따라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따라 망각으로부터 우회하면서, 그렇게 두 번 우회하면서 우회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기."(78쪽)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그린비, 2009)



20130416


_여자들이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간, 가랑잎 밟는 봄비처럼 바스락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고독한 예술가 빵구 예서군만이 오직 내 앞에 있다. 사진을 찍으니, 뭘 봐요. 앙빠, 한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다. 아빠도 고독하고나.



_어떤 책은 곁에 두고 읽을 때를 기다린다. 섣불리 탐하지 않는 마음은, 드디어 내 책상에 놓인 폴 오스터의 신작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_"공정한 환대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저쪽 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위기의식을 치유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하느님의 행위에 참여하기 위해 차이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다."(레티 M. 러셀, <공정한 환대>, 156쪽)



_난 박권일의 글이 진짜, 너무 불편하다. 그래도 결국 설득당하고 만다. 그런 그에게 '자기 배려의 기술'을 권유받다니, 좀 놀랍다. 아무튼 이번 글, 거듭거듭 정독하기로 한다. 특히 미셸 푸코의 인용 글에 밑줄!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줄기차게 신자유주의를 욕하고, 자기 계발도 까고, ‘힐링 멘토’도 씹었다. 그들은 성공에 대한 집착, 달착지근한 위로의 수사가 당장의 마취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사회 모순을 결코 해결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중의 각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입을 싹 닦아버리면 끝인가. ‘당신들은 전부 속고 있다’는 식의 폭로야말로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에 기반한 가장 순진한 형태의 계몽신화가 아닌가. 특히 대중의 무지와 탐욕을 탓하며 자기 계발 담론을 악마화하는 식의 주장은 그저 도덕적 비난에 불과하다. ‘각성한 대중’과 ‘몽매한 대중’을 나누는 발상은 ‘드림워커’와 ‘비(非)드림워커’로 세상을 구별하는 김미경씨의 태도와 동일하다."

"미셸 푸코는 '자신과 자신의 관계에서만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그저 자리를 바꿀 뿐 권력관계가 그대로라면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그가 주목한 것은 고대의 주체화 방식인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너의 영혼을 돌보라)’였다. 그것은 앎, 인식의 차원뿐 아니라 글쓰기, 책 읽는 방법, 솔직하게 말하기, 경청하기 등등의 매우 실제적인 기술을 통해 주체가 자신에게 가하는 변형 과정이다. ‘성공’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한 자기 계발, 그것을 자기 배려라 할 수도 있을 거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계발 비판이 아니라 자기 배려의 기술일지 모른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03


_"그(신영복)의 진보주의는 자신만의 독특한 '고통의 인본주의'에서 비롯됐다."(김정운, <남자의 물건>, 179쪽)


_아내 순일의 솜씨. 봄보다 부지런하고 화사하다. — 허순일님과 함께




20130415


_그달에 읽었던 최고의 책은 "복음과상황"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5월호에는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과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을 소개했습니다. 이 좋은 책들이 널리 읽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세르티양주와 이계삼의 공통점은, 치열한 고독이라는 전제,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걸음을 더 말리 내딛는다’는 각오를 가졌다는 것이다. 세르티양주가 공부의 자세와 방법을 다루고 있다면, 이계삼은 그 공부가 성스러운 독방이 아닌 거친 광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디, 세르티양주에게 한껏 자극 받은 공부에 대한 충만한 결의가, 이계삼이 교직을 내려놓고 뛰어든 그 광야 같은 세상에서 단단한 걸음으로 펼쳐지길 바란다."

서평 전문은 "복음과상황" 5월호에서 확인하시길. 

http://soli0211.tistory.com/410



_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이 없었더라면, 난 좀 더 훌륭한 문학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_신경숙의 소설은 늘 내 오랜 고독을 꺼내 마주하게 만들었는데, 이번 그의 단편은 고독한 나를 토닥토닥 다독인다. 그것도 살갑게. 심각한 표정으로 인생의 고단함과 세상의 거대한 음모를 슬쩍 내비치던 서사들이, 그 앞에서 허물어진다. 어떤 담론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화자의 너른 품속에서 공격과 방어의 패턴을 일탈하였던 까닭이다.


"타자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뜻밖에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해." 

이런 소소한 변화, 작가의 연륜 때문일까. 아무튼 이런 문장, 반갑고 고맙다.

_한 달 쯤 전에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이제야 들춰보다가, 갈피 사이에 놓인 김수영의 사진을 발견한다. 꼭 연인의 사진 같다. 아니, 오랜 연인의 사진이겠지.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여사의 마음에게 고은 시인은 "갖가지 시대 격변이 빚어내는 시련을 무릅쓴 무애의 필치"라는 찬사를 보낸다. 사진을 어루만지며, 그 마음을 잠시 느껴본다.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책읽는오두막, 2013)



20130414

_아버지 추도예배를, 이번엔 천안 누나네 집에서 했다. 먼길 오가느라 몸은 지쳤는데, 가슴은 더욱 생생히 그날을 추억한다. 아니, 정신은 지쳤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79년 4월 3일, 아버지는 소천(召天)하셨다. 아버지는 암을 앓으셨고, 죽음 직전 예수를 영접하셨다고 한다.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우는 누나를 달래곤 하셨다. 난 아버지의 냄새가, 가래 끓는 소리로 탁하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싫었다. 담배 냄새 절은 삼촌들이 얼굴을 부벼대는 것도 싫었다. 집앞 골목에서 세발 자전거를 타다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다. 난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뻤던 것 같다. 아, 무서운 아버지께 불려가 그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구나, 저 친척들도 이제 우리집을 떠나겠구나 생각했다. 주정하던 삼촌들 몰래 실실 웃기도 했던 것 같다. 훗날 지독한 가난을 만날 때마다, 밤새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때 내가 버릇없이 웃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래서 우리집이 벌받는 것이라고 자책했다. 아무튼 난, '두려움'이란 것을 그때 처음 만났다. 어머니의 곡소리,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힘겨워 하던 두 살 터울 형의 슬픈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낯선' 두려움이다. 비포장 도로를 두어 시간 달려 장지에 가기까지, 난 몇 번 토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기까지 멀미를 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마다 그 막막한 슬픔을 생각했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차를 타면 언제나 잠을 청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며, 천안을 오가며, 특히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정 넘어 도착하여 곤히 잠든 예지를 안아 옮기면서 그때의 시간들을 복기한다. 스치듯 재연되는 회색빛 골목, 우리집 담장 밑으로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난 아침마다 일어나 그 민들레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마치 내 딸 예지가 그러는 것처럼. 그런데,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그 민들레는 잊기로 했다. 잊기로 했던 그때의 다짐이 생각났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 첫째딸 예지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겪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20130413

_책 읽다가 예지에게 답장을 써서 편지함에 넣는다. 언젠가 예지가 예쁘다고 칭찬했던 '나무로 만든 15센치미터 자'를 선물로 같이 넣는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편지함부터 살필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니, 난 벌써부터 기쁘다.



20130412

나는 박웅현을 보면 살짝 헷갈리기도 하지만(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럼에도 배울 것이 많은 사람, 그리고 부러운 사람이다. 마치 조르바에 동의하지 못하지만, 그를 부러워하며 꿈꾸는 것처럼. 

"안타까워요. 하지만 저는 책이 좋다는 편견도 위험한 것 같아요. 책이라는 권위에 무조건 굴복을 하는 것 말이죠. 영화도 있고 드라마나 만화에 나오는 한 구절, 얼마나 좋은 게 많습니까? 하지만 책이 한 사람의 머릿속 풍경을 가장 밀도 있게 압축적으로 정리해놓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책을 안 읽게 되는 건 사회적 압박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추천 권장도서 같은 긴 목록들. 나는 재미가 없는데 톨스토이의 <부활>을 안 읽으면 취급 못 받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억지로 읽긴 읽는데,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 속물적인 책읽기가 무슨 소용이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터랙션입니다. 예전에 제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후배들에게 정말 강력하게 추천한 적이 있었어요. 근데 10명 중에 7명은 지겹대요. 그건 내 잘못인 거예요."
"잊으려고 노력해야죠. 눈앞에 있는 게 다다. 모든 사생활이 모든 복무에 우선한다. 이게 제 원칙입니다."
"개는 말이죠. 밥을 먹을 땐 밥을 먹고, 쉴 땐 쉬고, 주인에게 꼬리칠 때는 그것이 자기 존재의 유일한 이유인 것처럼 꼬리쳐요. 카르페디엠. ‘현재를 붙잡아라’에 가장 충실한 동물이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122112215&code=210100

_황현산


"전쟁은 없어지지 않았다. 전쟁의 기술은 더욱 발전했고, 랭보의 시대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뽐내는 살상무기들이 앞을 다투어 개발되었다. ‘불분명한 이유’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와 찬란한 명분을 둘러썼을 뿐이다. 세계의 질서나 국가의 안녕 같은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평화라는 말까지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유와 명분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고, 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자주 감춰져 있기에 그 불분명함은 여전하다."
"지금 남북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더 위급한 상황을 맞고 있다. 남북 평화의 마지막 보루이자 가장 효과적인 보루인 개성공단은 폐쇄 위기에 놓여 있고,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전쟁은 이제 시간문제이며 남은 것은 무자비한 징벌뿐”이라고 말했다는 단신도 읽게 된다. 어느 장관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북한이 전쟁에 돌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도 있다.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이 항상 이성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전쟁은 그것이 처참할수록 이유가 불분명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122055375&code=990100


_요즘은 예지가 예서를 재운다. 아이들이 방에 들어간 후, 잠시 뒤 들어가 보니 둘이 손 잡고 잔다. 굿나잇.


_량원다오,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366p. 


"상실감은 너무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랑을 잃고 나서야 자아와 욕망의 대상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고독과 상실감 속에서 비로소 투철하게 사랑의 핵심과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이란 완전한 만족에 대한 추구이고, 그 핵심은 결핍이다."

_대륙의 맹렬함인가. 내면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 깊고 집요하다. 이 책의 역자 김태성은 "거의 해체에 가까운 자기성찰과 철저한 자기 부정은 종교에 근접해 있다"고 썼다. 량원다오가 보여주는 내면의 풍경은 짙은 슬픔이 깃들어 있으나, 그렇다고 그 함의는 절망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통스러우나 그 힘찬 문장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에 대한 나의 첫 서설.

_오늘, 나의 위로.



20130411


_빵구 예서는 덤. 저렇게 신나게 치다가 선생님 이마를 가격했다는. 흐흐... 죄송해요.


_예지, 오늘부터 풍류도 난타 배워요.^^



_일년 전 오늘 헤어진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그만둔 후 나도 두 계절이 지날 즈음 그곳을 나왔다. 모략하지 않는 어떤 우정은, 시간이 흐를 수록 견고하고 깊어진다. 다시는 그와 부대끼며 일하거나 사소한 취향을 살펴 아침의 첫 커피를 제조하지는 못할 테지. 그리움은 오랜 우정의 아련한 파편 같은 것. 추억은 늘 그렇게 불쑥 나의 가슴을 자극하고 어루만진다.



_어제 외출한 아내는 몸살이 났다. 오늘도 서늘한 봄이다. 여름에게 굴복해야 할 봄의 숙명은, 겨울의 역습을 받아 오늘도 위태롭다.


_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득한 슬픔을 각오해야 하던 때가 있었단다. 단지 신앙한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짓밟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교회는 슬픔의 사람들을 품고 지켰고 북돋았다. 복음은 교회 안에서 생명이 되고 불꽃이 되었다. 아득히 먼 옛날, 그런 때가 있었단다. 그러나 지금, 나의 기독교는, 슬픔의 사람들을 지키기는커녕, 그들을 도리어 억압하고 짓누른다. 기꺼이 어느 누군가를 모욕하고 차별할 수 있게 되었다. 주류의 종교는 기꺼이 그럴 만한 권력이 있으니까. 


나의 기독교는 그렇게 나의 절망이 된다. 무엇으로 절망을 딛고, 다시 그 아득한 희망, 불꽃 같던 생명에 닿을 수 있을까. 묻고 또 묻는 잔인한 봄이다.



20130410

_오늘, 모 잡지에 기고한 글의 한 대목입니다. 글의 주인공은 무려 '아내'입니다.

"아내가 돌아왔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한다. 나도 그녀처럼 한결 같은 사람으로, 그녀의 곁을 지키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거듭난 남자’가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하고 각오한다. 모든 회심은 지속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헌신은 전(全) 존재의 각성이며 실천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속삭이듯, 엽서 한 장을 쓴다. 아내의 삶, 엄마의 삶… 이런 것 말고,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삶이 소담스럽게 영글기를, 이제부터라도 그녀 스스로 자애(自愛)의 길을 소명으로 살아내길 바란다고,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쓴다."

그리고 오늘, 아니 어제는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아내가 저를 구원한 지 8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나가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 송구했는데, 아내가 작은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이럴 때, '은혜 받았다'라고 고백하는 건가 봅니다.




20130409


_"오마이뉴스"로 보내는 출판사들의 책 목록을 접한다. 정말 많은 책들이 태어난다는 점에 놀란다. 그중 선택되어 소개되는 책도 소수이고, 결국 살아 남는 책들도 소수일 게다. 그런데 그 많은 목록 중 기독교출판사의 책은 전무하다. 시도조차 인색한 소통 노력이 아쉽다.



_늘부터 목요일까진 내내 서울에서 보낸다. 몇 개의 마감으로 미루었던 만남들이 점심, 저녁으로 이어진다. 그 첫 번째는 보르헤스의 '알렙'. 뜨겁던 이십대 청년시절 읽었던 그 텍스트가 아득하다. 난 알렙의 세상에 닿았던 것일까. 어쩌면 난해하던 그 텍스트는 이제서야 내게 허락된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보르헤스가 그립다.

_실패!



20130408


_지난 토요일 찬양사역자로 유명한 어떤 목사님의 글을 공유했는데, 다음날 보니 그 원래의 글이 삭제되어 있더라. 그 글은 '동성애자 차별 금지 법안'의 반대를 선동하고 있었다. 난 그의 글을 공유하며 이렇게 썼다. "이런 글은 그 자체로 선동이고 폭력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당신이 글을 삭제한 후,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늘 아쉬운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거친 반응들을 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고린도전서 13:4-6 말씀을 인용했다. 나는 거친 반응을 한 몇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난 여전히 무도한 폭력을 휘두른 건, 그 목사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만, 자신이 어떤 폭력을 휘두른지 모를 뿐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는 무식할 뿐이다.


_어떤 책을 읽다가 반해서 서평을 쓰기로 했다. 그러다 그 책을 다른 매체에서 다룬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난 다른 책을 찾아 읽었다. 그렇게 몇몇 책을 검토했으나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고심 끝에 다시 처음의 책으로 돌아갔다. 지금 서평 쓰는데, 이 책의 못난 구석이 자꾸 보여 꼬투리 잡고 있다. 너에게 반한 나의 마음은 무엇이었더냐. 초심은 온데간데 없고 마감은 훌쩍 지났고나.




_아내의 튤립이 기어이 봄을 터뜨린다. 사사로운 욕심은 난데없는 아름다움을 만나 길을 잃는다. 길을 잃어야 닿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 법.






20130406


_하늘도 사람이 원망스럽다. 무심한 건, 사람이다.





20130405


_그들은 기어코 담장 밖 세상을 탐하나, 그들은 결국 좌절할 것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결코 이루지 못할 갈망의 다른 이름이다.




_은수연

"제가 성경처럼 사랑하는 책이 있어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죠.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일상을 무심한 듯한 태도로 낱낱이 기록하고 있어요. 이런 대목이 있어요. '감정, 그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한 거죠. 정말 이 말은 진리에요. 고통의 순간이었지만, 고통을 하나의 이야기로 저의 가슴에서 격리시키는 거죠. 그래야 고통의 의미 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어요."

더 자세한 내용은 <복음과상황> 5월호를 참고하시라.



_제목을 너무 과분하게 달아주셨네요. 김지현 기자님, 고맙습니다. 흐흐흐.




20130404


_"복음과상황"에 기고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의 서평입니다. 두 책 모두 성폭력을 당했던 생존자들의 자전적 이야기이며, 서평은 트라우마의 문제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복상에 실린 글이 분량 문제로 조금 덜어냈는데, 블로그에는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다>가 절판이라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문제를 다루는 책 가운데 으뜸으로 꼽고 싶은 책입니다. 어디선가 복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은수연 씨의 책은, 특히 남성 분들은 필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http://soli0211.tistory.com/408


_잠자던 예지가 뛰쳐나와 갑자기 베란다 문을 드르륵 연다. 


엄마: 예지야, 왜그래?
예지: 응, 쉬 마려워서요.
엄마: 으,응? 거긴 베란다... 

우리집 모녀간 평범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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